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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Oct 09. 2020

좋아하고 싶은 마음

Flashback

살다 보면 어떤 순간이 너무도 완벽해서 오히려 슬퍼질 때가 있단다.

왜냐하면 그토록 완벽한 순간은 일생에 단 한 번밖에 찾아오지 않는다는 걸 알거든.


- 곁에 남아있는 사람 中, 치앙마이 -





주말 오전, 늦잠에 익숙하지 않은 4인 중 3인의 외출은 9시가 넘자 시작되려 했다.

행선지는 이미 정해진 상태, 아이들의 마음은 몸보다 먼저 앞서 나가, 기어코 문 쪽을 향해 달려간다. 옷을 갈아입히고 캔버스 백엔 물티슈와 손수건, 탄산수 2병을 챙기고 난 이후, 운동화를 신는 그이에게 말을 건넸다.



- 너무 일찍 무리 안 해도 되는데..

- 다녀올게. 한 2시간 후면 올 거야.

- 그렇게 오래? 일찍 와. 오후엔 결혼식 간다며

- 시간 맞춰 올 거야.



그때, 둘째의 마디에 그와 나는 그야말로 현웃 (현실 웃음)을 터뜨리며 잠깐 아이와 장난스러운 문장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제법 말귀가 트인 아이들은 요즘 그나마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주말 시간에 자주 끼어들곤 한다. 가족의 시간은 이런 시간들이 모여 완성되는 것처럼.



- 아빠 결혼해?

- 응?

- 아빠 누구랑 결혼해? 나도 데리고 가

- 어머, 아빠 결혼하는구나. ㅋㅋㅋㅋㅋㅋㅋ 누구랑 하실까. 이번엔 잘 고르셔야 하는데.

- ㅋㅋㅋ 아빠 말고 아빠 친구야

- 아빠 그러니까 누구랑 결혼하냐고.

- 정음아. 아빠는 지금 양말을 신기려 하는 니 앞의 사람이랑 결혼했어. 그 여자 이름이 '엄마' 래.

- 그러니까 누구랑 결혼하냐구!!!

- 다녀올게. 양말 다 신었다! 나가자! ㅋㅋㅋ



당연하다는 생각이 없어야 고마움이 생기는 것처럼- , 난 오늘도 당신이 고마워....



세 사람이 나가자 하다 만 물걸레질을 마저 끝내고 세탁기를 향했다.

다 된 빨래를 건조대위에 올린다. 탁탁 털며 하나씩 옷걸이에 걸어두며 창 밖을 쳐다보다가 오늘도 공원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다 널린 빨래를 뒤로 한 채 식탁 위의 핸드폰을 열어 보며 그의 가을 점퍼 배송이 언제 완료되는지를 확인했다. 누군가의 옷을 고르고, 배송일을 확인하는 시간. 문득 그 일상의 아무 의미 없이 보일 시간들이야말로 누군가에게는 '좋아하고 싶은 마음' 이 아닐까 싶었다.



좋아진 마음은 뜨거워지고, 뜨겁게 달궈진 마음은 발화점을 지나 시간이 흐를수록 열기를 잃는다.

열기는 다시 온기로 변하고 가끔 급속 냉각으로 얼어붙기도 한다. 세상 모든 연인들이 그러하듯이. 사랑과 이별, 그 속의 열정과 아픔의 형태는 제각각 다를지언정.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을 유죄라고 단호하게 선언했던 어떤 작가의 말이 이제는 좀 더 진실되게 알 것만 같다. 톨스토이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화두에 '사랑'과 '희망' 이라던 대답을 했던 것도.



사람을 사랑하거나 사랑받는 것만큼 인생에서 중요한 일은 없다고 생각해.

슬아도 나중에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아빠처럼 해. 그거면 돼.

마찬가지로 슬퍼해야 할 때 충분히 슬퍼하고.

불완전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은 딱 거기까지야.


- p.104, 곁에 남아있는 사람 中 치앙마이 -




사랑이 사람을 살리기도 한다면,  모든 사랑은 용서받을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어떤 사랑들은 그런 형태는 아닐까.



좋아하는, 좋아했던 마음은 비록 서서히 사라지거나 미묘히 흔들리기도 하지만

다시금 좋아하고 '싶은' 마음이 나타나 삶의 냉기를 온기로 바꿔주기도 하는 것이라면. 생각해보면 그와 나의 '좋아함'의 온기는 2인에서 4인이 된 이후가 좀 더 정직한 순도로 유지되고 있나 싶은 착각에 가끔 빠진다. 혼자 남겨진 주말 오전, 요즘 들어 내게 잠깐의 휴식을 자주 선물해주려 애쓰는 그와 마주할수록. 반대로 그이의 점퍼를 고르며 우리가 머무는 공간을 되도록 쾌적하게 유지하고 지키려는 나와 마주할수록.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게 정리된 방구석구석.

건식 공간을 방불케 하는 쾌적한 습도의 화장실, 말끔히 갠 옷에서 풍기는 은은한 섬유유연제 향기, 색상과 두께에 따라 구분되어 정렬된 일렬로 나열된 바지와 와이셔츠. 정리된 옷장과 냉장고가 그의 눈엔 제대로 보이지 않을 걸 알지만. 나는 어쩐지, 퇴사 후 완벽히 '전업주부화' 된 이 상태에 최대한 온화한 친절을 담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임을 확신하듯, 사실은 내면의 옅은 공허나 우울, 잡지 못하는 어떤 그리움마저 이겨내려는 비교적 생산적인 행위에 속하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밖'의 세상은 '안'에서 보기에 더 빛나는 걸지도 모른다. 아픔을 모른 채 바라보니까. 그래서 순수해질 수도 있겠지만.



그를 처음 만났을 때의 열기는 사실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아득해졌다. 슬프게도. 아쉽게도...

대신 우리의 열기는 온기로 변해, 서로 '그래도 좋아함, 좋아해야 함'의 온기를 간직한 채, 한 사람은 거기에 더해 좋아하고 '싶은' 마음을 열심히 일상 속에서 티 나지 않게 드러내 본다. 어쩌면 정말 행복한 가사 노동은 자기 계발력이 있고 (변화와 혁신, 안주하지 않는 태도의 면에서 살펴보자면) 받기보다 주는 것에 익숙한 사랑을 하는 사람들이 제일 잘할 수 있는 노동이 아닐까 싶다. 여러모로.  



서로 적정선의 솔직함과 예의를 지키며 4인의 일상을 지키는 현실 부부로 살지만

다만 대책 없이 가끔 그리워지는  '열기'는 결국 나로 하여금 폭풍의 언덕 속 캐시의 히스클리프나 안나 카레니나의 브론스킨, 보봐리 부인의 레옹을 내밀하게 상상해보게 만들어 퍽이나 나를 곤란하게 만든다. 일 년의 몇 번은 꼭. 그 울렁거리는 마음은 마치 8년 전 애틀랜틱 시티에서 마음껏 '혼자' 사랑했던 시간들이 생각나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를 만큼.



당신을 '좋아하고 싶은 마음'을 생각하며, 편지지를 고르던 나는 그의 표정을 상상해본다.

매일 도시락 위에 붙이는 포스티잇 속 장난스럽게 쓰인 문장과는 사뭇 다른, 편지 속 바탕체의 문장을 그가 읽고 나면, 과연 어떤 얼굴을 할까. 반대로 일 년에 단 한번, 유일하게 그의 손글씨를 볼 수 있는 그 날의 내 표정이 더 가관이겠지만. 여전히 그에게 편지를 쓰는 나는, 이제 이런 나를 조금 더 사랑할 수 있을 것만 같으니 그걸로 됐지 싶다.



편지를 쓰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는 건, 삶에서 주어진 큰 선물일 테니까.

나는 내게 주어진 이 선물을 열심히 지키려 한다. 좋아하고 싶은 마음과 함께...



    

문장은 여러 마음을 담는다는 걸 당신이 알아낼 수 있기를.  



#BGM, Flashback from spring walt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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