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헤븐 Dec 19. 2020

유토피아

이 나라에서는 모든 사람이 자신만의 관습과 자기에게 주어진 것에 만족하면서, 

우리 세계의 온갖 더럽고 추한 악에서 떠나 놀라울 정도로 순수한 상태에서, 

천국보다 약간 못한 수준이긴 하지만 거의 천국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 유토피아 - 




지옥고 (지하실, 옥탑방, 고시원)에서 죽어가는 젊은이와 늙은이의 공존. 기러기와 독수리라 일컬어지며 사교육을 위해 가족이라는 공동 구성원의 따로 사는 삶이 오히려 누군가의 부러움을 사는 시대. 영유, 학원, 예체능 등등 한 인간의 아동 시절부터의 놀 권리, 쉴 권리가 침해되고 방해돼도 그것은 없어서 못하니 쥐어질 때 활용해야 하는 누군가들의 자녀를 향한 비틀어진 '사랑'이고 '조기교육'이라는 이름 하에 자행되는 사교육 시장의 실태. 토지와 건물지가의 터무니없는 상승, 벼락 거지와 벼락부자라는 말이 우스꽝스럽게 퍼지면서 동시에 너도 나도 영혼까지 끌어서 빚을 내서라도 돈이 도는 시스템을 만들어 낸다는 명목 하에 돈이 삶과 인간(인문성)을 뛰어넘는 시대. 별풍선을 받기 위해 서스름 없이 꼭두각시 노예가 되기를 자청해 옷을 벗고 춤을 추는 화면 속 인간들과 그 인간들을 다시 '돈'으로 조종하는 화면 밖 인간들, 인간과 인성, 도덕과 윤리는 이미 파괴된 채 빛나는 사유재산과 보이는 '성공 결과' 들만이 한 인간의 정체성과 인간 존재를 대표하는 상업적 자본주의... 



유토피아, 토머스 모어, 현대 지성, 2020.10.30.



사유재산의 추구와 경쟁이라는 건 어떤 면에서 '성장' 동력이 되니 나쁘다 할 수 없지만, 여전히 불편하다. 

그 시대가 은밀하게 우리에게 일삼는 여러 천태만상들이. 사유의 주인은 '나' 라지만 그 '나' 들이 모여 '대중'을 만든다. 그 대중들이 모여 사회를 만들고 사회 속에는 집단의 우두머리가 존재하고 그 집단의 추종을 잡는 이는 소위 권력을 지니게 된다. 그리하여 누구라도 그 권력의 맛을 본 자는 계속 유지하려 할 것이고 유지 및 포지션의 존속을 위해 지속해서 대중을 선동한다. 필요하다면 가진 돈과 힘을 열심히 멋지게, 그럴싸하게, '선하다'는 말로 충분히 '기만' 하듯 발휘하면서. 



나는 이 시대야말로 '디스토피아'에 가까운, 이미 불평등이 심화되어 언제 펑하고 터질지 모르는 거품경제의 피크를 치는 중이라는 느낌을 여전히 지울 수가 없다. 그랬기에... 이 책, 토머스 모어가 500년도 더 된 그 옛 시절에 생각한 그의 신념과 사상, 파격적으로 기본소득과 인간의 주거 공간의 개념의 틀을 바꿔 버릴 정도로 '공유'에 대한 공유 경제 개념, 경제적 평등이라든지 공유 사회가 진정 '인간'을 위한 형태로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몇 번 읽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최소한, 지금의 디스토피아적 자본주의에 불편을 느끼는 독자라면 이 '유토피아'는 어쩌면 그야말로 유토피아적 '희망' 이라든지 가깝지 않지만 그럼에도 가지고 싶은 '꿈'으로 남겨질지도 모를 일이다... 





사치와 향락 풍조가 만연되어 있는 것도 그러한 비참한 가난과 궁핍을 더욱 악화합니다. 귀족의 하인들, 여러 분야의 일꾼, 심지어 시골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든 계층에서 사람들이 분수에 맞지 않게 화려하게 차려입고 지나치게 사치스럽게 살아갑니다. 


게다가 요릿집과 매음굴과 유곽은 말할 것도 없고 그밖에도 다양한 방법으로 매음이 행해지는 많은 곳 그리고 선술집과 맥줏집을 생각해보십시오. 또한 여러 주사위 놀이, 카드놀이, 정구, 볼링, 고리 던지기 같은 온갖 불법 도박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런 곳에서 환락이나 술이나 도박을 즐기는 사람들은 전 재산을 금방 탕진하기 십상입니다. 그런 것에 중독된 사람들이 가진 것을 모두 잃어버린 후에 유흥비를 마련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도둑질이나 강도짓 외에 무엇이 더 있겠습니까. 


일하지 않고 빈둥거리는 사람 수를 줄여야 합니다. 농업을 재건하고 모직 업을 회복시켜 정직하게 돈을 버는 직종으로 육성하여 일이 없어 노는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일에 종사하게 해야 합니다. 가난 때문에 이미 도둑이 되어버린 사람들, 전에는 하인이었다가 지금은 실직해서 떠돌거나 놀고 있어 아직 도둑이 아니지만 나중에는 틀림없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유토피아는 독자로 하여금 생각의 꼬리를 물게 만든다. '공공복리'에 대한 생각, 경제적 사유의 불평등 심화의 원인을 깊이 파악해서 그 악순환을 근절시키는 사회적 대안들을 제시하면서도 한편 이 몇 백 년 전 철학자의 사상이 과연 현실의 상업 경쟁시대인 자본주의에서 얼마나 어떤 정책으로 생산적으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자면. 글쎄, 솔직히 잘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어떤 부터 이 '디스토피아' 같은 시대의 면면들을 치유할 수 있는, 연고가 될 수 있는 방책인지를. 책의 말을 꼬아 이해(?) 하기도 하자면 그렇다면 개인 자본주의를 버리고 전체 사회주의로 바뀌어야 한다는 말인 진대. 개인의 쾌락을 영원히 추구하게끔 태어난 인간 본성이 그 사회주의 체제에서 뒤틀림 없이 잘 살아남을(?) 수 있을까? 과연 '공공'의 이익 추구가 개인 내면의 욕망과 충돌하지 않고 얼마나  '공평' 하고 '평등' 하게 분배될 수 있는 것일까? 그게 잘 되지 않으니 사회주의 대신 개인 자본주의가 산업화의 혁명과 더불어 더욱 심화되고 발전한 것은 아닐지. 그러나 부작용처럼 불평등과 빈부의 격화는 더 가속화되니. 모르겠다. 정말... 




다른 나라도 어디서나 자신을 공화국이라 하고 자기 나라는 공공의 이익을 추구한다고 말하지만, 그들은 진정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할 뿐입니다. 반면에 유토피아에는 개인의 이익을 위한 일이 없으므로 모든 사람이 공공의 이익을 열심히 추구합니다. 하지만 여기서나 거기서나 사람들은 각자가 속한 나라의 체제에 따라 자신이 처한 형편과 처지에 맞추어 행동할 뿐입니다. 


유토피아에서는 모든 것이 공동 소유이기 때문에, 공공의 창고가 채워져 있기만 하다면 사람들은 자기가 쓸 것 중에서 뭐 하나라도 부족하면 어쩌나 걱정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넉넉하게 분배되므로 그 나라에는 가난한 자도 없고 거지도 없습니다. 아무도 사유재산이 없지만, 모든 사람이 부자입니다. 온갖 걱정과 염려에서 벗어나 즐겁고 편안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보다 더 큰 부는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늙고 병들어서 더 이상 일할 수 없게 되어 모든 것에서 나라의 돌봄이 절실하게 필요해졌을 때 그들에 대한 나라의 배은망덕함은 절정에 달합니다. 즉, 그런 나라는 사람들이 젊어 열심히 일할 수 있던 때 밤잠을 자지 않고 불철주야 온 힘을 다해 일해 나라와 사회에 엄청난 공헌을 한 사실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모른 체하고는 그대로 방치해 비참한 죽음을 맞게 내버려 둡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서 번영하는 모든 나라를 마음속으로 다 둘러보고 생각해보자, 유감스럽게도 그런 나라에서 부자는 국민의 이익을 위해 나라를 경영한다는 미명 아래 사리사욕을 채우려고 온갖 음모를 꾸민다고 밖에는 다른 말을 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에게 유토피아는 누군가에게 불편하고 부당한, 피하고 싶은 디스토피아일 수 있다. 마찬가지로 디스토피아도 누군가에게는 충분히 활용(?) 하기에 따라 개인의 삶에 있어서만큼은 유토피아가 될 수 있고. 이 정말 우스꽝스러운 역설이 아닐 수 없지만. 그 답은 '나'라는 개인 안에서 다양한 해석이 탄생될 수 있을 듯싶을 뿐이다. 내게 있어 이미 현재를 살아보고 있는 2020년은 충분히 '디스토피아'를 방불케 하는 소식들이 가득하니. 가끔은 토머스 모어가 말하는 이 '유토피아'가 그대로 재현될 수만 있다면, 그럼 과연 그게 현재의 어두운 면들을 깔끔히 해소시켜줄 수 있는가 라는 의문을 품다가도.... 갈수록 첩첩산중, 괜히 답답한 마음은 더 갑갑해져 올 뿐이다. 



다만 한 가지, '희망'을 품어 본다면 그것은 바로 '나'와 '이웃'을 생각하는 소수의 '우리'라는 존재들. 

바로 그 존재들의 유한함만이 현재의 암울한 시대를 그럼에도 지나갈 수 있도록 만드는, 소금과 빛 같은 존재가 아닐지 싶다. '사랑'과 '윤리'로 자신을 단련한 사람들, 그리하여 그들은 자신의 이익 추종과 개인적 쾌락과 욕망을 절제하면서까지 나를 넘어선 '너'를 챙긴다. 이웃을 돌아보는 이들로 인해 사회는 유지된다... 유토피아가 별건가 싶기도 하다. 바로 그런 이들이 모여 공존하는 시간과 공간. 겉으로 드러난 인간의 면을 보고 함부로 판단할 수 없는 게 어쩌면 인간이라는 무리 동물 집단의 이중성이라지만, 그래도 믿고 싶은 건, 그런 인간들 중 '이웃'을 생각하고 실제 그런 이웃과의 화합과 동반 성장을 생각하고 일상 속에서 생산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이들, 바로 혁명가들의 시간과 공간, 어쩌면 내가 생각하는 유토피아는 그렇게 현재의 추악한 사회의 면에 맞설 수 있는 혁명가들이 존재하는 곳일지도 모르겠다...


읽으며 은근한 분노와 답답함, 현재를 향한 질문만을 남기게 되는 책

그러나 스스로 답을 찾아 헤매어 자꾸 책을 파고들게 만드는 책

고전이란, 그런 것 같다. 읽고 또 읽을수록... 



덧) 개인적으로 현재 나의 유토피아는, 사랑하는 이들 곁에서 잘 살다가 호상으로 자연사할 수 있는 삶... 단지 그것을 이룰 수 있다면 정말 좋겠지 싶었다. 


어쩌면 내게 유토피아는, 순리대로 살다가 호상으로 사랑하는 이들 곁에서 자연사할 수 있는 시대...라고 생각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마감 일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