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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Dec 21. 2020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이 있었다.

우리 인생에는 가끔 그런 일이 일어나. 

설명이 안 되고 이치에도 맞지 않는, 그렇지만 마음만은 지독히 흐트러지는 사건이.


- 일인칭 단수 -




아이가 먹고 싶다던 식재료를 사서 요리를 했다. 

몇 번 먹더니 사실은 먹고 싶지 않다 하며 다른 반찬을 만들어 달라 아이는 칭얼댔다. 감정이 틀어지기 시작했으나 큰 소동 없이 시간은 지나갔다. 아이들이 먹다 남은 잔반을 해치우며 한 끼를 때웠다. 아이스크림을 달라고 다시 조르는 아이를 뒤로 한 채 설거지를 하다 접시 모퉁이를 나도 모르게 꽉 눌렀다. 접시를 깨뜨리고 싶었으나 집어던지지 못했다. 대신 그 옆의 플라스틱 유아컵을 던졌다. 깨지지 않는다는 걸 알고 행하는 발악질은 고작 이 정도다. 설거지를 마친 후 달력을 쳐다보니 오늘은 발표일이었다. 그리고 노력에 대한 기대를 아주 조금은 하고 있었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노력도 기대도, 애초에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었다. 그랬다면 갑갑함의 차오름이나 분노의 방향이 어긋나진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노력하면 될 줄 알았다. 

아이를 향한 분노와 슬픔, 절망의 횟수가 줄어들 것이라는 희망. 계속 글을 쓰면 언젠가는 한 번 정도는 공식적인 인정이라는 '증명'을 받을 수 있다는 희망... 노력하면 될 줄 알고 노력이라는 걸 하면서 살았다고, 그것도 꽤 '열심히'라는 부사를 달고서. 그러나 사실은 믿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 노력이라는 단어가 주는 희망에 대해서. 인생에서 '희망'이라는 없다면 끝없이 이어지는 시간의 터널을 지나다가 죽음의 문턱 앞에 어느 순간 있어 허탈하게 무너지기 마련이니까. 



겨울이 와야 봄이 온다는 걸 알지만 그 차가움이 견디기 쉬운 건 아니다. 



그렇게 살았지만, 나의 믿음은 애초에 틀린 것이었다. 

노력해도 안 되는 게 세상에는 분명 존재했다. 노력해도 되지 않는 건 결국 되지 않는 것이라는 걸 이제 알았다니... 노력하면 될 줄 알고 기를 쓰고, 그 노력이라는 걸 했던 인간은 흔히 이런 마음에 휩싸여버리고 마는 걸지도 모른다. 투자라고 생각한 그의 시간은 소비나 낭비로 변모하고, 희망이라는 한 때의 고취적 감정은 끝내 배신 혹은 절망이라는 비루한 감정으로 바뀌는 것... 



브런치 북엔 (또) 떨어졌고 읽히지 않는 글은 쓰다가 모조리 날아가 버렸다. 

거실을 청소하다 아이들의 뾰족한 장난감을 잘못 밟아 발바닥이 욱신거렸고 징징거림의 연속인 둘째 아이의 보챔과 투정은 익숙하면서도 묘한 분노를 자극하기 시작했다.,. 아이스크림과 쌀과자, 연어 요리와 삼겹살 구이, 식성도 취향도 성격도 극을 달리는 아이 두 명의 보살핌은 오늘따라 견디기가 조금 힘들기 시작했다. 목소리엔 데시벨이 올라가고 고함을 명확하고 시원하게 내 질러야 그제야 이해라는 걸 하는 그들이 더 이상 보기 싫어질 땐 노력이라는 걸 했다. 의지할 구석이 '나' 밖에 없다는 생각, 보살펴야 하는 주체는 다름 아닌 '나'라는 생각. 그 생각을 놓지 않으려는 생각. 그러나 동시에 제발 눈에서 보이지 않고 싶다는, 사라져 없어지고 싶다는 형편없는 생각, 그 볼품없는 생각들을 끝내 하지 않으려는 생각마저도...




우리 인생에는 가끔 그런 일이 일어나. 

설명이 안 되고 이치에도 맞지 않는, 그렇지만 마음만은 지독히 흐트러지는 사건이.

그런 때는 아무 생각 말고, 고민도 하지 말고,

그저 눈을 감고 지나가게 두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커다란 파도 밑을 빠져나갈 때처럼.


- 일인칭 단수 中 크림, p. 48, 무라카미 하루키 - 



그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눈을 감고 지나가게 두는 수밖에'..... 눈을 감았는데 입술이 깨물어지는 건 왜였을까. 



잘 지내냐는, 편안해 보인다는, 행복하냐는 물음에

나는 '네'라는 대답을 했었고 그 대답은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것도 어쩌면 거짓된 '노력'의 일부인지도 모를 일이다. 누가 봐도 남부러울 게 없는 듯한 여유 있는 표정의 고상한 미소를 지어 보여야 마땅한 환경적 삶인데, 어쩐지 '네'라는 나의 대답에서 절묘한 소름과 동시에 '네'의 주인이 내가 아닌 것 같았다. 어설프고 조화롭지 못하다고 생각했으니까.  노력해도 되지 않는 것들의 실체와 맞닥뜨렸을 땐... 



연약하고 소용없는 마음이 정처 없이 오늘도 흘러가고 있다. 

승률을 예측할 수 없는 인간의 속절없는 희망고문, 바로 그 '노력' 하면 될 줄 알았던 모든 것들로부터 배신당한 기분에 참패한 인간의 최후는, 노력해도 안 되는 게 있다는 깔끔한 인정 그 후의 삶일지도 모른다. 삶은 지치지 않고 흐르고 또 흘러, 멈춤도 기다림도 거꾸로 역행하는 것도 없이, 그렇게 흐르는 시간의 연속이니까. 그 속의 기억들이 짧은 행복이든 긴 절망이든, 참담하든, 희열이든, 비극이든, 희극이든. 



쇼는 계속되어야 하니까, 멈추지도 않을 뿐이다. 

노력해도 안 되는 게 있다는 걸 이 나이가 되어서야 아프게 알아가지만, 그렇다고 노력하지 않은 채로 그냥 사는 것도 슬프고 아까워서... 노력했던 누군가의 애쓰는 모습이 안타깝고 속상해서... 오늘따라 눈물이 가시지 않지만. 바라면서 흐를 뿐이다. 곁의 아이들을 담담히 견딜 수 있는 힘이 다시 생기기를, 누군가는 나의 글에 인정 버튼을 눌러줄 날이 오기를, 눈물보다 웃음이 더 많은 날도 있기를. 그리고.. 



나는 나에게 애원하고 있었다. 

노력해도 안 되는 게 있다는 걸 알면서도 

노력을 멈추지도 말아 달라고... 



그래야 볼품없던 것들이 빛에 반사되어 멋진 그림이 되는 날도 오지 않을까 싶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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