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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Dec 07. 2020

양보라는 미덕, 그러나 때로는 악습

아들에게...

어린 시절, 널 재우고 나면 나는 이 생각을 유난히 했었다. 사실 이 글을 쓰는 '현재'가 그러하지. 그렇기에 이 시간까지 이런 글을 남기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마 네 성격이 시절마다 변한다면, 부디 그러기를 바라며 이 고민 또한 흐려지기를 원하기에 이렇게 문장으로나마 네게 오늘 (요즘)의 생각을 남길뿐이다. 



양보는 미덕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부디 조심하기를. 

지나친 양보는 널 헤칠 수 있으니. 어떤 양보의 악습적 반복은 결국 널 무너뜨린다. 



내가 아닌 누군가를 위하는 그 마음. 그건 타인을 향한 연민 없이는 나올 수 없는 심성이다. 

그러니 예쁘고 갸륵하지. 나 보다 상대의 평화를 위하기에 나올 수 있는 마음 아니더냐. 그러나 나는 널 기르며 그런 생각을 한다. 난 널 지킬 책무가 있거든. 그래서 이런 생각도 하게 되는 것이지 싶다. 한편으로 부끄럽지만... 어쩔 수 없는 생각이다. 난 네가 건강하길 바라니까. 남을 위하다 네가 다치는 처참함을 참을 수 없는 '부모'라는 입장에서의 마음일지도 모르겠구나. 



널 향한 누군가의 (나의) 모든 양보는, 결국 '사랑' 의 다른 표현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네 것을 우선 지켰으면 해. 그것이 무엇이든. 

네 것을 지킬 수 있는 건강하고 건전한 심신 상태, 태도에서 진정한 미덕이 나온다 생각한다. 너의 먹을 것을 친구에게 내어 주고, 너의 물건들을 상대에게 먼저 미루어주거나 나누는 것. 자신을 위한 것을 먼저 사양하며 대신 너의 심신적 에너지나 네가 가진 자원을 아낌없이 보태는 것. 그 양보의 시간들... 



인간이라는 사회적 동물이 무리 생활을 하면서 뽐낼 수 있는 최고의 미덕일지도 모르지.

특히 연민이나 사랑을 품고 사는 이들은 조건 없이 양보를 서슴지 않는다. 때로 국가나 사회, 어떤 단체나 무리들은 우리에게 그런 양복의 미덕을 운운하며 주체적으로 양보하도록 행동을 종용하기도 하지. 교육 기관에서 흔히 가르치는 '도덕'이라고 하는 부분의 일종도 그러하고. 그런데 우리가 하나 간과해선 안 될 게 있다. 바로 그게 때로 악습이 되면 그건 더 이상 미덕이 아니게 된다는 것... 



굳이 양보라는 게 반대로 스스로에겐 악습이 될지도 모른다는 주의를 주는 이유는

그게 습관이 되고 지나치다 보면 그건 네 삶에서 너라는 주인을 밀려나게 하기도 쉽기 때문이란다. 최소한 어떤 공허함이나 외로움, 고독을 충분히 감내할 수 있는 그릇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양보는 그래서 묘한 슬픔을 동시에 남기기도 하잖니. 사실 인간이란 각자의 니즈와 욕망에 충실한 동물이잖니. 자신의 안락, 자신의 쾌락, 자신의 기쁜 마음을 '먼저' 생각하는 건 어쩌면 인간에게는 자연스러울지도 모르겠어. 그러니 그런 인간들 중에 '양보'를 잘하는 인간들은 소위 영적인 기쁨의 가치를 추구할 줄 아는 '성인' 이기도 하지. 그러나 세상에는 (특히 자본주의에서는) 그런 성인이 의외로 몇 없단다... 그렇게 '보이는 성인' 이 더 많을 뿐이지. 양보에도 여러 종류가 있으니까. 말미에 너 자신을 위하는 거짓된 양보와 그렇지 않은 진실된 양보를 구분하는 눈은... 아무에게나 주지 않으니. 나 조차도 때로 잘 모르겠고 말이다.. 



아낌 없이 주는 나무가 왜 위대한 줄 아니. 바라는 것 없이 마냥 줄 수 있는 태도, 그리고 그 시간의 고독을 감내하기 때문이다. 




양보하지 않는 인간의 이기심은 어쩌면 연민을 포기한 짐승의 본능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짐승의 본성은 결국 '생존' 아니겠니. 어쩌면 단순하지만 적확한 목적일지도 모르지. 그런데 여기에 조금 더 고급진(?) 생존을 해 보자는 것이다. 양보를 하고 싶다는 선심 이전에, 그게 습관적인 행동일지언정, 널 헤치거나 무리를 하는 선에서의 그릇된 양보들은 어쩌면 네 스스로에게는 마냥 고마움을 불러일으키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다. 



네가 속한 무리, 혹은 너와 관계되는 타인들을 위하는 양보의 품위는, 널 먼저 지키고 나서 더 높아진다. 

엄마는 네가... (특히 1호, 민아-) 네 것을 참 자주 나눠주고 살펴주고 위해주는 일상 속 행동 속에서 가끔 깜짝깜짝 놀라던 시절이 있었다. 공식적인 성년 이후의 '어른'으로 사는 사람들보다 한참 어린 네가 더 많은 '연민'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봤기 때문이지... 넌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너의 5세는 모든 게 '불쌍' 하다 했었다. 그래서 네가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지. 버리려는 물건들, 버려진 인형들, 길가의 강아지풀, 기관의 친구들, 그리고 때로는 바로 집에서 너를 돌보는 나까지도.



나로선 기특하고 대견했지만, 솔직히 기쁘진 않았다. 

반대로 네 마음을 우선하지 않고 누군가의 마음을 우선하는 너의 습관적 행동들을 관찰하다 보니 나로서는 너의 모든 미덕이 악습처럼 느껴지더구나... 참고 인내하고, 훗날'만'을 도모해야 하는. 너의 것을 먼저 내어주는 게 반복이 된 너는, 너보다 남을 더 위하더구나. 정말 훌륭하다... 그렇지만 나는, 그 훌륭함을 널 지키면서 동반되는 훌륭함이기를 부디 바랄 뿐이다. 


난 때로 네가 날 지켜주고 있다고 느낀다. 네가 날 위해 양보하는 것들로 인해 내가 눈물지을 때 마다. 




남을 위하다 너 자신이 없어지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진정한 미덕은 널 사랑하고 아껴준 상태에서, 건강하게 남'도' 같이 생각할 줄 아는 게 아닐까 싶은데. 네 생각은 어떨지 모르겠네... 오늘은 문득, 유난히 모든 선택에 양보를 했던 너를 떠올리며 괜히 마음이 저리던 통에 이런 편지를 충동적으로 남겨 본다... 



교양과 준법을 지키는 것 이상의 아름다운 양보들로 인해, 이 세상엔 '희망'이라는 게 존재하겠지.  

물론 그 희망이나 빛과 같은 것들은 절망과 어둠에 자주 가려져 있으니 이 세계에서 쉽게 보이지 않지만 말이다. 양보라는 미덕이 습관적 악습으로 변해서 너를 서서히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게 해서 결국 자멸하게 만드는 게 아니기를 바란다. 널 지키고 나서 남을 생각해... 세상은 그리 만만하지 않잖니. 슬픈 말이고 날 선 생각일 수 있지만, 나로선 널 지키는 게 현재의 우선순위라 어쩔 도리가 없었다. 



불편했다면 미리 사과하며- 

그렇지만 너의 양보가 너에게 불편한 감정을 조금이라도 남겨 준다면 그건 스스로 정직한 선의에서 나온 양보가 아니었음을, 반대로 기억하고 한번 정도는 생각해봐 주기를. 어둠에 어둠조차 다시 묻히는 추워진 계절, 네가 너의 행동으로 하여금 다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오늘은 이 정도로 마칠게. 



이 시절, 역설적이지만 나는 나의 모든 걸 네게 양보하려 했다. 

그것이 때로 나를 성실하게 무너뜨렸고 그래서 아팠다. 

그렇지만 그랬기에 너와 난 한편 살 수 있었다. 양보란 이건 관계에서 더 빛나는 것일지도 모르겠구나... 



너의 순정했던 시절을, 난 영원히 기억하게 될 것 같다..네 양보가 빛났던 이 섬광 같은 시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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