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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Mar 03. 2021

정리하길 잘했어

문서 정리를 마치고 기지개를 하며 노트북 아래쪽 시계 부분을 쳐다보다가 '헉' 했었다.

시간이 어느새 퇴근 시간에 임박했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그리고 나는 요즘 나 자신에게 깜짝깜짝 놀란다. 그렇게까지(!) 일 생각을 하던 애사심 충만한 바보 일꾼이었나 싶어서. (아서라 그럴 리가... 그런가...) 



여전히 의문이다.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드는 건지. 

팀을 리딩해야 한다는 일련의 무거움 (소위 자리) 때문일까. 아니면 경력 공백 기간에도 사실 은은히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나 때문일까. 아니면 나름 그 업의 형태가 (커리어) 내게 어떤 희열을 전하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저 무에서 유를 '창작' 하는 기획자의 묘한 (자신만의 세계에 빠지는 건 주의) 창작의 고통에서 나오는 변태스러운 기쁨 때문일까. (아무렴) 



그게 뭐든지, 나는 오늘 '정리하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성향이 워낙 지저분(!) 한 걸 못 보는 성격이다. 집안일은 두 말할 것이 없으며 간단한 문서도 너저분하거나 하다 못해 '예쁘지' 않으면 이상하게 불편해진다 (하 강박증....) 그런 인간이 '기록' 습관까지 베었으니 어쩌면 이런 인간은 이 업이 타고났나 (자뻑 시작이니) 싶지만- 아무튼, 나는 머릿속에 지속해서 부유하는 여러 프로그램 기획안들을 '정리' 하기 시작했다. 손은 역시 키보드 위에 올라가 있을 때 가장 편안함을 느끼는 인간이라는 걸 새삼 느끼면서. 



키보드를 누르는 그 감촉을 좋아한다... 



하루 반나절 이상이 꼬박 걸렸다. 

문서나 메일을 '보는' 입장에서는 별 게 아니고 쉽게 느껴질 수 있으나 보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이해하기 '쉽게' 만들어 내며 정리를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많은 에너지가 소비되고 투자해야 있는 게 바로 '일'이다. 그건 마치 누군가를 가르치거나 이해시키려면 반대로 스스로 가장 잘 알고 있어야 되는 것처럼. 특히 기획은 그런 같다. 가사노동이나 청소와 조금 비슷한 기분이다; (나름 쉽게 만들고 나면 아니어 보이고 남들 있는 같은데 막상 건드리고 하다 보면 이건 당최 끝이 없...! 일을 못 하나... 아니면 완벽주의인가;) 



눈은 이미 충혈되고 피곤이 밀려왔지만, 나는 뿌듯했다. 1차 정리를 하고 나니 묘한 자신감도 생겼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일지 모른다. 나름 레드오션에 후발주자로 뛰어들어 유저 감동을 이끌어내려 하는 나름의 슬로건! 을 지키기 위해.... 각 프로그램의 성격을 크게 정리하고 다시 대-중-소 분리하듯 머릿속의 생각을 하나하나 채워 나가기 시작했다. 배열을 마치고 다시 기획에 대한 맞춤 '운영'에 대한 생각 하며 그렇게 정리를 하니 대략 더 구체적인 how to까지 나오게 되더라. 실제 셋업부터 운영, 그리고 유저 피드백까지 받아 개선해나가는 사후관리까지, 이른바 A-Z까지 1 cycle을 다 돌아야 하는, 마치 PM 스럽게 일을 하는 기획자..... 느낌이랄까. 소규모 조직이다 보니 이렇게 일해야 생존한다는 걸 그나마 알아서 다행이다. 전체를 보고 기획을 한다는 건 중요하니까.... 부분만 보고 기획을 하면 대략 난감할 수 있는 것처럼. 



스케치하는 버릇.... 덕분.



정리하지 않으면 불편한 인간의 삶이란, 아쉬운 놈이 우물을 적극적으로 파는 피곤한 유형의 삶이다. 

가사노동이든 일터의 노동이든, 육아든 노는 일이든, 아무튼 지간에 일단 인정 기준에 따라 깔끔하게 정리를 하고 봐야 직성이 풀리는 피곤한 인간으로 살지만, 감사히 생각되는 건 모든 일 (업) 은 다 은은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두루두루 쓸모가 있다는 것이다. 세상에 무쓸모 한 일은 그래서 없는 듯싶다. 



써 볼 건 다 써 봐야만 한다. 힘들다고 더 이상 못 쓰겠다고 말하는 건, 

타이베이를 갔더니 너무 더워서 호텔에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다. 


- 지지 않는다는 말, 김연수 - 


         


퇴근하다 자꾸만 어떤 작가들의 책 제목이 떠올랐다. 

'지지 않는다는 말' 이라든가 '실패를 사랑하는 직업' 이라든가. 어쩌면 내가 지금 하는 이 일은 스스로 지지 않아야 하고, 실패를 가감 없이 사랑하고 앉을 수 있는 용기 있는 자가 오래 살아남는 일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나는 오래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내일의 내 일은 모르겠고 일단 오늘 노트북을 닫으며 스스로 뿌듯했던 나를 사랑해보기로 했다. 잘했어. 정리 여왕이라고, 혼자 셀프 칭찬해주며.... 




노트북을 홀가분히 닫는 그 순간은 스스로 뭔가 고맙다... 열심히 사는 것 같아서..... 그래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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