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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Apr 04. 2021

쓰기에 대한 쓰기

리시안셔스,변함없는사랑

리시안셔스, 변함없는 사랑. 

나의 글쓰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사랑하는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 나를. 그리고 우리를. 




쓰기에 대한 쓰기를 드디어 쓰려한다. 

말장난 같아 보이는 이 문장을 겨우 시작하고서, 나는 키보드 위에 열 손가락을 얹고 잠시 동안 pause 버튼이 눌려진 사람 마냥 하얀 여백이 가득한 흰 공간을 멍하니 바라보는 중이다. 나름 비장하고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 진지함은 겉으로 보이지 않는다. 일상은 볼품없는 모양새를 하고 있으니까. 곰돌이가 그려진 노란색 잠옷 바지에 자주 입어 반은 헤져버린 베이지색 면 티셔츠, 부스스하게 길어진 머리는 쪽 핀으로 질끈 집은 채로. 식탁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면서도 생각한다. 잠에 든 두 아이가 깨지 않고 그대로 자 주기를. 거실로 나와 물을 먹겠다고 하면서 기어코 노트북을 건드리고 마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기를. 



일상의 웃픈 고민을 하면서도 나는 쓰기 앞에서 매번 진지해진다. 그 누구보다도. 그 어느 순간보다도. 

이 마음은 어쩌면 '리시안셔스'를 닮아 있을지 모른다. 변함없는 사랑, 변치 않으려 애쓰는 사랑. 어쩌면 나의 글쓰기는 '사랑'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싶었다. 애정과 미움이 동시에 탄생되는 감정이 바로 사랑이니까. 뜨겁게 사랑하지만 강렬히 고통스러울 수 있는 것이 '사랑' 아니던가. 꽃도 한 철, 사랑도 한 철이라면, 이왕 피고 지는 그 한 철, 제대로 사랑하며 살겠다는 뜨거운 인간들만이 온전히 사랑하며 사는 것처럼.



꽃은 시들기 마련이다. 인간이 죽기 마련인 것처럼. 그러나 글은 영원히 남는다. 그래서 글이 부럽다... 때로는. 질투 날 정도로.




20대 시절의 글쓰기는 다분히 속물적이었다. 

등단을 하고 싶었다. 지긋지긋한 짝사랑이었다. 더 사랑하는 쪽이 지는 것이라던데. 나는 결국 문학 앞에서 매번 졌다. 고배를 마실 때 마다 사약을 목으로 넘기는 것 같았다. 쏟아부은 시간과 에너지가 아쉬웠다. 결과가 없었으니까. 처참해서 무릎을 꿇기 일쑤였고 결국 나가떨어졌다. 그러나 여전히 가끔 끼질 끼질 유치 찬란한 맥락도 별로 없는 소설을 재미 삼아 쓰고 있는 나를 발견하면 돌이켜 생각한다. 지겹지만 그럼에도 한결 같이 변함없는 사랑이구나 싶다. 창작에 대한, 문학에 대한 아픈 사랑을 떼지 못하는 이상한 인간. 



낙방하고 떨어지는 과정에서 나는 산문과 잠시 바람을 폈다. 

그런데 그 바람이 꽤 잘 통했(?) 던 것 같다. 짧은 에세이나 수필은 라디오 사연이나 기타 공모전이나 수필집에 자주 이름이 올라갔고 그래서 나는 내가 정말 작가가 된 것 같았다. 단행본을 출간하고 싶다는 지극히 속물적인 욕구에 한참 휘말렸던 그 해, 나는 출간 계약을 했고 첫 책을 출간했다. 전혀 생각하지 못한 의도하지 않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한 장르물인 책. 그러나 소중한 나의 첫 '아이' 같은 책... 지금 생각해보자면 이런 초보를 믿고 출간을 결심하신 출판사에게 다시금 죄송한 마음이 앞선다. 초판은 다 팔렸을까. 모르겠다. 여전히 미안하다. 팔리지 않는 작가라. 아니 작가 지망생이라. 



그 이후 몇 권의 책을 더 출간했다.

그러나 한 권씩 출간을 해낼 때마다 오히려 스스로 어깨에 뽕이 들어갈 법도 하고 나름 으스대고 자랑을 '남들처럼' 할 수도 있었겠지만, 이상하게 그러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자본주의 인간이 아닌 것일까. 나름 '저자' 타이틀을 달면 비로소 딸려오는 별책부록 같은 그것들을 위해서 오히려 책 쓰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이들이 꽤 많다는 것에 무언의 혐오감과 거부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마음이 좋지 않을 땐 꽃이나 바다와 같은 자연을 떠올린다... 그 편이 정신건강에 좋다며. 언젠가부터 터득한 방법이다.



너도 나도 팔리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시대에서.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충실한 자발적 노예가 된 것처럼, 이미 팔리는 게 중요한 상업출판이 성행하는 화보집 같은 책이 이미 잘 팔리고 있는 시대이니 이해도 되겠다만. 어딘지 씁쓸하고 못마땅해지는 건 왜인지 싶다. 책이라는 물성이 지닌 것이 이미 '퍼스널 브랜딩' 이 되어 버리고 그것을 발판 삼아 결국 글 자체의 완성도와 작가 고유의 이야기와 필체에 집중하고 스스로 악착같이 노력하는 것이 아닌. 그저 책을 통해 '자신'을 더 돋보이게 하고 '돈' 도 끌어 모으는 '통로'가 되고, 아울러 책이나 글 자체로 승부를 보려는 게 아니라 책을 쓴 '사람' 이 그만큼 책으로 포장되기 쉬운, 결국 '나'를 기어코 책을 통해 더 화려하게 드러내려는 이들이 이미 많아져버린 출판시장 앞에서 나는 무력해지고 만다. 필터조차 제대로 되지 않은 - 그럴 수도 없는 성인교육 시장의 범주 안에서 - 돈이 남아도는 사람들이나 받는 것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터무니없는 고가의 책 쓰기나 글쓰기 클래스나 강의가 이미 우후죽순 늘어나버린 현재 속에서. 



그럼에도 '작가'가 되고 싶은 마음은 변치 않은 사랑 때문일지 모른다. 

'유스토마' 라고 하는 속명을 가진, 그리스어로 '좋은 입'이라는 뜻의 꽃부리의 모양에서 유래된 리시안셔스. 한글 이름으로는 꽃도라지라 불리는, 가늘지만 단단한 줄기에 은은한 향기를 전하는 그 꽃의 꽃말은 변치 않는 사랑이라 한다. 



변치 않고 싶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글 앞에서는. 생이 비록 초라하고 남루하고 찌질해보이고 일상은 그리 행복하지 않은 잿빛 투성이의 별 볼 일 없는 24시간의 쳇바퀴 반복이라 할지언정. 그 일상의 세밀한 부분들 속에서 소박한 기쁨과 감사를 발견하는 우아한 마음을. 일상의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을. 사실은 상냥한 내면의 예쁜 모습을. 어떤 알 수 없는 모성애와 결국 지켜내고 싶은 삶의 행복을. 리시안셔스가 가진 그 모든 아름다움처럼. 



아름다운 사람이 진짜 아름다운 글을 쓴다 하던데... 가령 시인처럼. 부럽다. 그런 작가들은 여전히. 



지키고 싶었던 걸지 모른다. 글을 통해서.

매일 하루를 마치고 일기를 쓰거나 읽은 책의 기록을 정말이지 장장 십 년이라는 시간 동안 지켜내면서. 나는 나의 짐승 같은 본능과 때때로 스스로를 삼켜버리고 마는 지저분한 감정과 생각을 매번 정화해나감을 느낀다. 아주 느리고, 눈에 잘 보이지도 않고 그래서 금세 지쳐버리고 말 지언정. 



앞으로 써 나갈 '쓰기에 대한 쓰기'는 그런 나의 글쓰기에 대한 헌사이자 변함없는 예찬일지 모르겠다.

아니면 여전히 도무지 앞이 막막하고 삶에서 허우적거릴 때 글쓰기로 도피하고자 하는 자신을, 애써 다독이고자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고. 또한 일정 부분 여전히 어떤 분노를 머금게 만드는 글 같지 않은 화보집 수준의 책들과, 어디서 고전이나 철학서 베껴 쓴 듯한 짜깁기 수준의 많이 본 듯한 남의 문장들이 그럴싸하게 자신의 것인 마냥 나열된 글들에 대해. (책을 정말이지 많이 읽는 독자들은...귀신같이 알 것이다)  따끔한 독자의 시선으로 독설을 품고 쓰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다 스스로 성찰하고 스스로를 반성하게 되는 건 일상다반사이겠으나) 



쓰기에 대한 쓰기를 시작하려 한다. 시작은 리시안셔스를 닮았다. 

무언가를 향한 변치 않은, 그리운 사랑에서 시작된.

이것은 글쓰기에 대한, 작가로 살다 죽으려는, 누군가의 기록이겠다. 



글꽃 피기 좋은 시절, 드디어 글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시작부터 이렇게 재미없게 비장하면 어쩌니 싶지만. 알게 뭔가. 내 글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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