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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Apr 06. 2021

글이 터지는 순간

매화, 인내

매화, 고결한 마음, 기품과 인내, 어머니 나무.

참고 참고 또 참을 때, 반대로 글은 터져 나왔다. 언제나. 지금처럼.





글이 '터져' 나오는 순간이 있다.

쓰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시간, 그때야말로 소위 '글이 터지는' 순간이다. 10분 만에 A4 용지 한 페이지는 어느새 바탕체 10포인트에 줄 간격도 촘촘한 여백 조차 보이지 않은 채로 글은 써져 있다. 누가 쓴 거지 싶어서 정신을 차리고 읽어보니 그제야 머쓱해진 채 지그시 깜빡이는 커서를 내내 바라본다. 그러나 한 결 편해진 마음과 만난다. 그제야 문서 닫음 버튼을 누른다. 저장은 하지 않은 채로.



마치 내가 글을 쓰는 게 아니라 글이 나를 써 내려가고 있다면 그때는 '터지는' 순간이다.

여기서 터진다는 건 결국 '감정'을 말하는 것이겠다. 굉장히 부끄럽지만 어쩔 도리는 없다. 피하지도 못한다. 도저히 쓰지 않고는 살 수 없을 것 같은 차오르는 무언의 필링은 손을 움직이게 만든다. 그야말로 쓰면서 사는 게 아니라, 살기 위해서 쓸 수밖에 없는 글쓰기를 행했던 라이터들이라면 이 말에 적잖게 동의하실지도 모르겠다.



나의 글쓰기는 그렇게 불순한 동기와 함께 가속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바닥 밑에 지하실이 있다 했던가. 우울과 분노라는 감정이 바닥을 뚫고 지하로 기어이 돌진하려는 그 감정을 이겨내려 시작했던 게 다름 아닌 글쓰기였다. 죽지 않고 제대로 살아보려 했던, 일종의 발악질이었는지도 모른다. 다시 생각하자니 퍽이나 미안해진다. 나의 '글' 들에게. 험한 주인 만나서 문장 녀석들은 꽤나 고생하지 싶다. 지금도...



키보드가 더 아팠으려나. 미안하다...



인내는 보이지 않는 분노를 동반한다.

소위 참는 데 한계가 찾아오면 '화'가 내면으로 분출되는 격인데. 언제나 글이 제멋대로 터지고 마는 순간은 바로 임계점에 다다를 때다.



씨발.



다소곳한 시옷도 아니고 쌍시옷이어서 그렇다.

'쌍' 으로 시작되면 이미 끝난 게임이다. 그냥 시발도 아니고 '씨발' 이면서 그냥 놈도 아니고 '쌍놈' 이고 그냥 년도 아니라 '썅년' 이면서 그냥 개가 아니라 '개새끼' 가 되는 순간. 저 멀리 마음이라는 바닷속 심연을 헤엄쳐 들어가 깊숙한 바윗덩어리 구석진 어딘가에서 빡침이라는 감정이 뜨겁게 수면 위로 기어 올라 결국 툭 하고 '나'를 건드리는 순간. 생각과 감정은 '글'로 소용돌이치고 만다. 그때 탄생된 글은 참으로도 원색적이다. 지극히 본능적이고 감정적이고 동물적인 원초적 감각이 도사린 문장들은 기어코 똬리를 틀며 탄생된다.



읽는 이로 하여금 감정을 솔직하게 전달하는 글은 정말 바람직하지 않은 걸까.  

대부분의 작법서나 글쓰기 교재들은 그리 말한다. 독자들로 하여금 불편함을 동반하지 않을 수준으로 감정 조절을 잘하면서 써야 한다고. 이해는 한다. 나 조차도 글을 쓰면서도 감정이 지나치게 도드라진 글은 '좀 아니지 않나' 싶어서 지울 때가 다수이니까. 그러나 사실은 속으로 생각한다. '씨발 개뿔' 이라며.



얼룩덜룩한 물기자국과, 이미 구겨진 흔적은 없어지진 않는다. 다만 말리고, 다시 바로 세울 뿐. 그런 노력을 할 뿐.




통제할 수 없는 걸 통제하려는 인간만큼 어리석은 행태가 또 있을까.

인간은 본래 뇌 구조가 이성적일 수가 없고 지극히 감정적인 동물인데 하물며 어찌 통제할 수 없는 뇌와 호르몬과 각종 여타 눈에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것을 통제하려 한다는 말인가. 신이 아닌 인간이. 하물며 그리스 로마 시대의 그 잘난 신들 조차 사랑과 탐욕, 정복욕에 취해서 인간보다 더 감정 덩어리였는데. 하물며 MTS 창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매도 매수 버튼 하나 누르게 만드는 건 결국 뇌에서 이성이 아닌 감정의 호르몬들이 한 인간을 조작했을 때  '번쩍' 하고 귀신에 띄어서 하는 행위인 것을!



이처럼.... 인내를 하다 터지고 마는 감정의 시작선에서 글을 쓰다 보면 결국 그 작가는 깨닫는다.

자신이 지극히 '인간'이라는 점을. 그리고 인간으로 살아가면서 '씨발'이라는 감정과 만났을지언정, 그걸 현실 세계에서 표출하면서 무고한 이들에게 유해로 다가가기 이전에. 자신의 영역 안에서 최대한 객관성을 되찾고 흐트러진 마음을 '글'을 통해 바로 잡으려 안간힘을 내는, 꽤 훌륭한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런 인간들 중에서 '엄마'라는 이들의 글쓰기는, 엄마의 글쓰기, 여성의 글쓰기는 조금 더 특별해 보이기도 하다. 엄마라는 이들은 다른 인간들과 달리, 더 인내하는 인간으로 살아가야 하기에. 자식새끼 살리고 키우려는 엄마들은 매번 스스로 보이지 않게 임계점에 도달하고서도 어디 풀 데도 마땅찮아서 이리저리 울적함을 스스로 달래며 살아가는 이들이 여전히 눈에 보이기에.



매화가 아름다운 건 그럼에도 꽃을 피워내는 의지 때문일지 모른다. 사랑을 하려는 부모라는 인간들의 마음과 좀 닮았다...



눈 속에서도 꽃을 피운다 하여 설중매라는 애칭이 붙은 매화의 꽃말은 고결한 마음, 인내를 품고 있다.

그 춥고 서린 겨울이라는 계절을 통과하면서도 아랑곳없이 살면서 꽃을 피우려 한 매화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매화의 매(梅)라는 한자어 속에는 나무 목 (木)과 어머니를 뜻하는 모(母)가 합쳐져 있다. 어머니 나무다. 매화의 인내처럼 고결하지 못한 채 기어코 마음속으론 쌍시옷이 연거푸 나올 때가 있을지언정.



매화의 고결한 품위를 떠올리며, 결국 품위 있는 삶을 지키기 위해 오늘도 글을 기어코 터뜨려내고 만다. 

아이의 구토가 지나간 자리를 쓸고 닦으며, 토사물이 잔뜩 묻은 이불을 연달아 빨면서도 어금니를 꽉 깨문 채로. 예정되었던 약속과 일정은 전면 취소한 채. 퇴사하길 잘 했다며, 회사에 다니지 않은 전업주부로 사니 아이가 아파도 돌볼 수 있음에 씁쓸한 위로를 스스로 머금으며. 여전히 아이라는 세계에 나의 세계를 맞춰 종속되어 살아가는 환경이 서럽고 지겨워서 가끔 쌍시옷을 입에 머금고 마는 순간이 찾아올 때에도. 잠든 아이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이마를 쓰다듬은 이후, 아이 대신 아프지도 못해서 진퇴양난의 서글픈 마음을 숨긴 채로....노트북을 연다.



글은 터졌고 몇 십분 전의 쌍시옷은 어느새 증발되었다.

마음엔 고요와 평정이 찾아온다. 글쓰기를 하기를 잘했다 생각한 순간은 바로 그런 때이다. 남에게 훌륭하다 인정받고자 하는 약간의 가식과 약간의 위선과 약간의 허세가 들어간 그럴싸해보이는 글쓰기보다는, 어제보다 그저 나은 내가 되기 위한 찌질하고 못나도 솔직하고 감정적인 글쓰기가, 지금 내가 바라는 진짜 글일지도 모르겠다.



매화꽃을 닮고 싶은, 누가 봐주지 않아도 스스로 고결하고 품위 있게

결국 오늘 하루를 인내하고 나아가는 글쓰기만이 현재 내게는 '진짜' 글 이다...



쌍시옷을 사라지게 만들고, 다시 품위를.... 되찾는 데는 '글' 만한 게 없다.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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