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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Apr 25. 2021

보여선 안될 틈

 난 사랑을 원해. 그런데 사랑이 없어. 그러니 모든 게 끝난 거야 


-안나 카레니나 -  




꿈을 꿨다. 짧았지만 강렬한 꿈이었다. 

그이가 아닌 다른 이성의 손가락이 살갗을 파고드는, 그런 꿈이었다. 유체이탈이 된 것 마냥 내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상 '나'라고 할 수도 없을 것만 같은 젊고 예쁜 그 여자, 그러나 분명 나와 닮은 그녀로부터 어딘지 모르게 이질감이 느껴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 옆에는 얼굴이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계속 그녀의 몸을 위에서 아래로 등에서부터 가슴으로, 마치 천천히 손으로 몸을 스캔하듯 훑어내려 가는 게 보였다. 그러면서 들리는 그의 중성적 목소리는 사뭇 매력적이라 생각됐을 무렵. 



꿈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잠시 생각했다.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은 있었을까에 대하여. 

아름답게 보이는 누군가의 눈부신 몸, 외향으로 시작된 호감을 사랑으로 착각한 환상에 불과한 건 아니었을까라고 생각하고 말았기에. 마음과 생각은 잘 보이지 않으니까. 사랑이 절대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도 없는 것처럼. 그런 의미에서 한나 아렌트의 문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사랑은 말할 수 없는 것' 이라던 그 문장은 옳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나 D.H 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연인. 혹은 플로베르의 보봐리 부인이나 호손의 주홍글씨에는 필적하지 못할, 그러나 그 엇비슷하게 발칙한 통속적 부분들이 카메라 줌/인 아웃되듯 편집된 꿈이었는데 왜 마음이 편치 않았던 걸까. 3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바라보는 그 장면 속 두 사람의 형태는 사랑이라고는 진실되게 생각할 수가 없었기에... 아니면. 



함께였어도 같은 꿈을 꾸는 것은 아니듯. 



보여선 안될 틈을 무의식에서 느꼈기 때문일지 모른다. 

당연한 것인데도 마음이 무너지는, 그 '마음'을 떠올렸기에. 저지른 죄보다는 들키는 죄가 더 큰 것이 바로 기혼남녀의 또 다른 사랑이라 포장되기 쉬운 불륜 아니던가. 하물며 사랑이라는 감정이 없이도 한 인간의 육체를 탐닉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평범한 인간이 저지르기 쉬운 '악의 평범성' 이 될 수 있고 그것으로 인해 누군가는 기어코 드러난 사실에 상처를 받게 되는 것처럼. 게다가 그 누군가가 '가정'이라는 무리 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가족 구성원이라면. '기혼' 이야말로 우리가 짊어지고 마는 꽤 무거운 단어 아니었던가. 



한 인간의 내면엔 모두 음습한 늪지대가 있다지만, 특히 기혼자들의 늪은 사실상 금기에 가깝겠다. 

그리고 그들에게 터부시되는 것들이야말로 - 특히 불륜이라는 소재는 - 고전부터 지금까지도 여러 예술 매체 - 문학, 영화, 그림, 음악 등 - 에서 기본이면서도 심화되는 아이템으로서 언제나 주목을 받아왔던 이유도 결국 환상 때문일지 모른다. 자신의 우월함을 증명하고 계속적으로 누군가의 인정과 사랑을 갈구하고 욕망하기 위해  끊임없이 가지고 가지고 또 가지려는 인간의 환상. 다가갈 수 없지만 다가가고 싶은 신기루적 허상. 현실이 될 수 없으나 현실에 가까운 환상을 꿈꾸고 마는 인간의 본능... 



애야 이것 좀 보라. 베널리 부인은 깡마른 손으로 코니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여자는 자기 삶을 살아야 해. 그러지 않으면 그렇게 살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살아가게 되지. 정말이야.

그러고는 브랜디를 한 모금 더 마셨다. 


- D.H. 로렌스, 채털리 부인의 연인, p.181




꿈 때문이었는지 괜한 자격지심에 애꿎은 몇 권의 고전을 뒤지다가 D.H 로렌스의 문장을 발견했다. 

'진정한 섹스가 있는 곳에서는 정절에 대한 열정이 바탕에 깔려 있다.' 던. 문득 우스운 생각을 하고 말았다. 안나 카레니나가 저 문장을 보았다면 어땠을까 라고. 겸손하고 예의 바른 모양새를 띄며 하물며 안나에 대한 사랑을 말하고 그 사랑에 책임까지 지려 했던 브론스키는 사실 진심으로 책임을 지고 싶었던 것인지에 대해서. 그랬다면 안나의 자살은 안나의 선택이며 브론스키를 탓할 수 없지만 그의 자신만만했던 겉 뒤의 추악하게 가려진 안나를 탐닉하고 욕망하려고만 했던 본원적 모습을 제대로 직시하려던 성찰적 인간이었는지에 대해서. 차라리 안나 카레니나 속에 나오는 '돌리'와 '스테판' 부부야말로 어쩌면 더 현실적 사랑의 모습에 가까운 형상은 아니었는지. 배우자의 도움 없이 전적으로 가정 경영의 일체를 묵묵히 일궈나가는 그 상황이 여간 힘들어도 돌리는 언제나 힘을 주고 마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동시에 안나의 화려한 사교계 삶에 의기소침하면서도 결국 삶의 진정한 기쁨과 평온이란, 비치는 외면의 화려함과 향락적 욕망적 기쁨에 있지 않다는 걸 알고 있다는 듯이. 그것이야말로 안나 카레니나에서 진정한 승리자는 '돌리'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속 깊고 정 많은 돌리를 읽어가면서...



뮤지컬 '안나 카레니나' 의 안나


두 사람의 눈은 무엇을 말하려 했던 걸까.  



위험 부담을 가지고도 다른 인격과 관계를 맺어나가는 이들에게는 나름의 사정이 있겠지만. 

자세히 지켜보지 않으면 절대 알 수가 없는 것. 그들이 사랑이라 말하는 그 사정들이 공통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한 가지가 있다면 바로 '본능' 이 아닐까 싶었다. 자신의 존재를 누군가에게 다시금 새롭게 받아들여지고 싶은 마음. 혹은 처음의 순수한 '사랑'을 다시 느껴보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적 열망. 자의와 타의가 타이밍 좋게 조합되어 그 본능을 인식하고 마는 한 인간의 위험한 질주... 브론스키가 안나의 '틈'을 파고들어, 기어코 안나 또한 보여선 안될 틈을 그에게 그리고 그녀 자신에게조차도 보이고 말았다는 것.  본능은 한 성별에만 갖혀 있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안나카레니나를 통해 우리는 알게 된다.. 그러나 그것을 용인한 채로 그들 곁의 다른 누군가의 슬픔을 묵살해서도 안 되는 것이니. 그래서 어려운 것이다. 사랑이라는 것은. 가까이 지켜보지 않으면 판단하지 못하는, 해서도 안 되는 것일테고. 



어쩌면 인간의 영혼은 외도를 필요로 하고 그것을 거절해서는 안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외도의 중요한 의미는 집으로 다시 돌아온다는 점에 있다. 


D.H 로렌스, 채털리 부인의 연인, p. 126



틈은 보일듯 말듯 가려지면서도 보인다. 눈에 띄인다. 



꿈을 떠올리다... 나도 모르게 사랑을 생각하고 말아 버렸다.

기혼의 세계에 접어든 이후 그와 이성간 솟구쳤다가 가라앉았다가 하는 역동적 감정 대신 현실적 온화한 사랑으로 대체된 채 조용히 흘러가는 지금... 가끔씩 밀려드는 '사랑'을 향한 의문과 실망과 어떤 배신감과 애매함의 파도에 인생을 맡긴 채로 그렇게 유유히 흘러나가 보는 기분이다. 그리고 이윽고 새벽에 마시고 잔 기네스 탓을 해 버리고 만다. 책을 읽다 잠들기 전, 식탁을 정리하다가 캔 뚜껑이 따진 채로 그대로 가득 차 있던 김 빠진 기네스를 기어코 한 번에 마셔버린 탓이라고. '탓'을 해야 조금은 편해질 것 같아서였을까. 아니면 길을 지나가다 마주하게 된 어떤 젊은 연인들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한참 부러워했던 그 생각이 결국 그런 꿈을 빚어냈던 것이리라. 



시절의 눈부셨던, 사랑을 주고 받았던 내가, 우리가 떠올라 한참 마음이 아팠었기에.

그런 꿈을 만들어 냈던 것이라고... 



꿈은 꿈으로- 



라일락과 눈부신 달, 봄 밤의 기억 




# 책과 맥주는 이렇게 착실한 바름이었는데. 꿈은 왜 그리도 속물적 인간미가 넘쳤던건지... 

마이클 샌델을 끝내고 다시 톨스토이로 가야 하나 고민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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