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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Apr 27. 2021

시간을 되돌리는 마법

라일락... 청춘이라는, 그 시절의 추억

기억은 결국 기록된다. 

그것이 좋았던 시간을 되돌리는 유일한 방법이라면... 라일락처럼. 눈부신 추억을 담아. 




흰 백지 위에서는 언제나 막막해지곤 한다. 

깜빡이는 마우스 커서를 그저 두 눈을 깜빡인 채 화면을 쳐다볼 뿐. 혹은 종이를 펼쳤으나 한 줄을 적어내기가 여간 막연해지는 순간. 그럴 땐 눈을 감곤 한다. 그리고는 장면을 회상시킨다. 산문을 쓰는 이라면 '인생'의 어느 시절, 어느 특정 부분에 멈춰진 장면이겠다. 그렇게 기억을 더듬어 가다 보면 문득 작가 스스로 멈춰지는 순간을 발견하게 될지 모른다. 장면들은 제각각 조각난 채로, 다만 쓰려는 이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때로는 어른의 몸이 되어서도 도무지 말끔히 지워지지 않는 어린 시절의 얼룩진 장면일 수 있을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멈춰버리고 싶을 정도의 눈부신 장면이다. 



장면이 그려지는 순간, 시간을 되돌리는 마법은 시작된다.

자극받은 뇌는 중추신경계에서 어떤 신호를 전달한다. 그리고 평소와는 다른 심박수로 쓰는 사람의 마음을 조작하기 시작할지도 모른다. 소환된 기억은 달팽이관과 고막을 거쳐 어떤 소리들을 실어 나른다. 그 혹은 그녀 특유의 잊을 수 없었던 목소리가 들리면 코끝에서는 이미 찡한 감동의 추억 혹은 미간을 움직이고 마는 장면과 마주하게 되면. 어쩔 도리 없다. 그때는 써야 한다. 주저하지 말고. 영영 보여줄 수 없는 글이 될지라도. 



흐릿해졌지만 기록으로 남겨진 기억은 분명 살아나게 한다. 좋았던 순간의 기억을. 그 마음을. 그 시절의 '나'를. 




슬픔에 기대어 기억을 소환할 때, 그제야 글이 더 잘 써지곤 했다. 

부끄럽지만 숨길 이유는 굳이 또 찾기가 힘들다. 다분히 가학적인 취향을 가진 작가라는 것에 대해서. 뇌는 쓰라는 신호를 보낸다. 심장은 이내 떨리면서 어떤 조급함이나 조바심이라는 신호를 받는다. 이 생각은 이렇게도 바꿔 말할 수 있겠다. 어서 쓰라는 신호는 계속 기다렸다는 것. 인내하고 참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가 결국 기다리지 못한 채 써내야 한다는 것. 쓰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은 무언가를 향해 말하고 싶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당신을 향해. 이 세계를 향해. 지워지지조차 않은 어느 장면에 멈춰 선 기억을 앞에 두고서. 다시 보기로 재생된 기억이 어쩔 도리 없이 여전히도 아픈 장면이라면, 쓰면서 도려낼 수 있기를 바라면서. 그리하여 새 기억으로 편집되어 대체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글은 저절로 탄생될지도 모를 일이다. 한 때는 매일 쓰는 글이 그랬다. 요즘도 별반 크게 달라진 건 없지만. 



쓰고 있는 뇌는 다시 신호를 보낸다. 그렇지만 말이야. 좋았던 기억을 떠올리라고. 그래야 나아간다고.

신호를 받은 뇌는 슬픈 장면을 프롤로그로 소환시켰을지언정, 이내 어떤 감정은 글의 에필로그가 되어 간다. 그 감정은 바로 '그리움'이다. 짧은 순간의 희열과 기쁨, 혹은 한 때의 열정적 환희나 감동이라는 감정을 모두 잠재울 수 있는 감정은 어쩌면 그리움일지 모른다. 결국 그립다는 건 붙잡고 싶었던 기억이라는 반증일지 모르니까. 



그리움을 정지시킨 장면은 화석이 되어 내내 마음에 묻힌다.

묻힌 마음을 가진 누군가는 시간이 오래 지난 어느 날 손 끝으로 시간을 되돌리는 마법을 펼친다. 쓰기를 통해서. 그리운 누군가의 기억은 기록이 되어 영원히 살아난다. 기록하는 자는 죽어가지만 그 자의 그리운 기억은 영원히 남게 된다. 그러다 지나가는 누군가에게 구전처럼 회자되는 작품으로 남겨질지 모를 일이다. 빈센트 반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전했던, 화공 이중섭이 그의 아내에게 전했던, 그들의 절절한 그리움과 마음, 삶의 기억들이 편지로 남겨졌듯이.... 



그러나 언어는 모든 마음을 표현하는 데 실패할지 모른다. 사랑은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한나 아렌트의 말이 옳다면. 



최근에 '좋은 기억을 벗 삼아 나아간다'는 편지를 썼다.

생각해보니 쓰기 시작하는 순간, 슬픔을 먹어내기 위해 시작된 글은 서서히 어느 시절의 그리움을 소환하며 괜찮은 현실의 엔딩을 향해 가고 있는 것만 같다. 그것은 마치 느리지만 착실하게 우리가 늙어가는 것과 닮았다. 늙어가면서 보이고 또 알게 되고야 마는, 인생의 보석 같은 최후의 진리들을 온몸으로 체감하며 맞이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처럼. 체념 혹은 받아들임 그 어느 쪽이 되었든. 



글도 착실하고 성실하게 글을 쓴 사람을 닮아 조금씩 변하게 되는 걸지 모른다면

라일락 같은 글을 좀 더 열심히 써 보고 싶어 진다. 좋았던 순간의 라일락향은 누군가에게는 잊기 힘들 정도의 강렬함을 선물할지도 모를 일이니까. 라일락이 첫사랑과 젊은 날의 추억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이렇게 다시 쓸 수도 있을지 모른다. 처음 사랑을 다시 시작하는 사람의 자세로. 오늘이라는 늙지 않은 현재라는 시간에 최선을 다하려는 부지런하고 기특한 태도로. 



누군가의 좋았던 시간은 결국 지나가고 없어지지만, 그 시간이 기록이 되는 순간 시간은 되돌려진다. 

시간의 경계를 뛰어넘어 글은 영원히 살아 남아 누군가에게 내내 읽히고, 그리하여 쓰는 자와 읽는 자 모두 적절한 시기에 어떤 구원을 받을지도 모를 일이다. 읽고 또 쓰면서. 때로는 혼자서 혹은 함께여도 좋을. 



그러니 나로서는 쓰지 않고 산다면 좀 아쉬운 인생인 것이다. 

'우리' 이자 '나'로 살았던 어느 시절의 풍성하고 눈부신 기억은 그렇게 오늘을 살게 만들어 주는 힘이 결국 되어줄 테니까. 어느 시절의 라일락 나무와 눈부신 달빛, 그리고 기억하는 목소리와 입술에 닿은 레몬티 한잔이 쓰기로 이끌었듯이. 



기억을 벗 삼아, 나아가게 하려는 듯이. 



#BGM @ When we were young... Ad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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