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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Nov 06. 2017

#13. '안녕'으로 바뀌는 순간

보고 싶을 거라는 인사는 안녕으로 바뀌었다. 목소리는 여전한 채 그대로였

 나만 알고 있는 이 엄청난 이야기를 믿어 줄 사람이 이 세상에 한 명이라도 있는지는 모르겠다.

 유키와 밤에 공원에서 나눈 사람 동물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 고양이 여자인 내게 이건 누가 뭐래도 진실이지만, 아무도 내가 고양이 여자라는 것을 짐작하지 못한다.


 낮에 사람 모습을 하고 있을 때는 더더욱 외로움과 절망감이 찾아온다.

 사람 동물들의 세계란 여전히 알면 알 수록 그 민낯의 잔인함과 공허함을 경험하곤 한다. 그럴 때면 고양이로만 살고 싶어 진다. 밤에만 볼 수 있는 내 진짜 모습으로. 아니 사실 그냥 똑같은 하나의 생을 유지하고 싶다는 건 그저  단  하나의 바람, 아니 상상, 사람들의 표현에 의하자면 '그림의 떡'과 같은 것이다. 이게 바로 고헤라, 내가 처한 현재이고 현실이고 앞으로도 겪어내야 할 미래의 모습이다.


 그것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중요하진 않다.

 설령 내일 죽을지언정, 내게 이제 더 중요한 건, 고양이 여자인 나는 예상치 못한 사람 동물과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 하나뿐이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고양이와 사람으로 사는 삶의 세계는 붕괴되었다.


 파괴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며 살았었다. 그럼에도 말이다. 반은 고양이로 반은 사람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만큼의 자아분열과, 내가 아닌 또 다른 나의 모습이 거울 속에서 비쳐 객관적으로 드러나야 했을 때 찾아오는 고통스러움이 얼마만큼인지.


 그럼에도 나는 파괴되지 않으리라고, 죽음을 향해 하루하루 살아내면 그만일 거라고, 밤엔 공원에 가서 달빛을 쳐다보며 그렇게 하루를 쌓아 가면 된다고 생각했었다.


 그런 나의 시간이 이제는 대체될 수 없는 시간으로 변해버리다니. 내가 알고 있던 이 세상에 대한 진실을 구성하는 엄청나게 큰 조각들이 빠져 있는 느낌이다.


그가 떠난 이후, 내게 남겨진 똑같은 시간은, 이제 전혀 다른 세계가 되어 버렸다.


사람 동물이 이야기하는 '상실'이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다.

떠나간 자와 남겨진 자의 슬픔의 깊이가 뭔지 알 것 같았다. 부재에서 오는 그리움이 그렇게 처음엔 커져가다가도 괜찮아지고, 다시 또 그리움이 밀려올 때면 나조차 어쩔 도리가 없이 헤매기만 하는 일상을 겪어내고 있었다.


 아침에 사람의 모습으로 변했을 때, 옷장의 옷을 뒤지며 거울을 보고,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회사에 출근을 하고. 사람 동물들과 부대껴가며 사람인 척하며 사람으로서 일을 하고 돈을 벌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 밤 12시가 되면 고양이가 되어 항상 가는 공원의 그 벤치에 앉아서 달을 쳐다보는 시간들. 이 모든 시간들 속에서 나는 내가 아닌 것 같은 공허함과 절망감에 더욱 소스라치게 큰 아픔을 겪어내기 시작했다.


그의 부재가 주는 그리움과 고통의 깊이가 이 정도 일 줄은 몰랐다.


 처음이니 당연하다고, 현지는 말했다. 그럼에도 현지처럼, 알 수 없는 사람 동물들의 세계에 내가 감회도 발을 잘못 들여놨다는 후회만이 막심했다. 사람들은 도대체 이 아픔을 어떻게 견뎌내며 그렇게 거짓말을 하면서 살 수가 있는 건지 모르겠다.


다들 거짓말쟁이라서 그래
뭐?
그게 가능하다고. 온갖 세상의 달콤하고 그럴싸한 단어들로 포장하지만 사실은 '거짓말'을 할 줄 알아서 그래
사람 동물들이 말이지...?
어. 그니깐 내가 조심하랬잖아. 세상에 믿어서는 안 될 게 남의 고구마 말랭이랑, 사람 동물 이랬잖냐.
유키....
괜찮아. 변하는 건 없어. 앞으로도 지금도 마찬가지로. 넌 변하지 않을 거야
난...... 모르겠어. 내가 변하는 건지 안 변하는 건지 변한 건지 아닌지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사람 동물 세상에는 '반야심경'이라는 게 있어
그게 뭐야?
소위 말해서 '마음이 편해지는 진짜 저는 방법'에 대해서 멋지게 풀이한 고대의 진리지
아....... 훗.
웃어라 고헤 라 별거 없어 그 메시지는 간단해 이거 하나야
뭔데?
걱정하지 마. 괜찮아.
아... 응. 걱정하지 마 괜찮아.


나는 그 말을 계속 줄곧 되새겼다.

 마음에서 그렇게 한 해 한 계절이 지나가면서 그렇게 되새기면서 흘러가고 있었다. 고헤 라라는 낮에는 여자 사람 동물이자 밤에는 고양이가 되어 버리는 고헤 라로. 예전에 그를 만나기 전의 고헤 라로 다시 돌아가려 하고 있었다.


 할머니와 엄마와 유키와 듀이에게도 '고헤 라'일뿐이다. 심지어 다른 사람들이 내게 고헤 라로 알고 또 느끼고 있을 모든 감정과 감각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단 한 마리, 아니 단 한 명은 '고헤 라'를 여전히 그리워한다. 진짜 '고헤 라'가 원하는 게 뭔지, 그 진짜 고헤 라가 도대체 누구인지를 계속 찾고 또 찾아갈 뿐.


 3년이라는 시간이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렇게 찾아가는 도중의 계절은 여전히도 지나가고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그와 처음 만났던 가을, 지혜의 숲의 가을도 제법 낙엽이 쌓여 가고 없어짐을 반복해 내고 있었다. 그가 떠나고 난 이후 다시 찾아간 지혜의 숲은 그대로였으니깐.


여기 그대로구나.. 그래 이렇게 여전히 그대로구나. 바뀐 건... 딱 하나네.


 사람 동물들의 이별의 수순, 그리고 그 이후의 과정을 나도 겪어내고 있었다. 

 다시 볼 수 있을 거라는 착각과 나만의 바보 같은 기다림은 해를 지날수록 조금씩 희미해지고 있었다. 일상을 더 치열하게 부딪쳐 내보기로 결심한 이후엔 사람과 고양이로서 24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를 만큼 바쁘게 지내기로 했다. 그래서 일을 했고 돈을 벌었고, 밤엔 달빛을 보고 생각을 하고 유키와 함께 책을 읽고 글도 썼다.


 그 사이에 나는 바뀌기로 결심했던 건 지도 모르겠다. 물에 빠져 버린 핸드폰을 새로 바꾼 것처럼. 머리가 꽤 길어진 것처럼.


핸드폰이 고양이에겐 그다지 필요가 없으나, 사람 세상에선 그와 연결되는 유일한 도구였기에, 여전히 그의 번호를 저장해 두고 있었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을까..


2017년 11월이 되었다.

그가 돌아오기로 한 해가 되었지만, 나는 그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사실 연락하려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이제 익숙하게 잊힐만한 순간이었다.


어 왔어, 정 차장. 아니 이제는 팀장으로 승진해서 왔으니 화려한 컴백이네.


 사람들이 속닥이기 시작했다. 그 사람 동물의 특별했던 이름이 잊히려고 하던 찰나에 다시 내 귀에 들리는 순간이 잔인하게 느껴졌다. 입고 있던 스커트가 유난히 딱 달라붙어서 어딘지 모르게 불편하게만 느껴지는 어색함이 내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깊숙하게 겨우 잠재워 둔 이름이 다시 불리게 되자마자, 잠들어 있던 내 안의 사람의 심장 소리도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다.


온 건가...


 혼잣말을 하고 있을 때 팀장이 나를 부른다.


회의실 하나 소집해 줄래요 헤라 씨. 오후 3시쯤
아 네.. 안건은 뭘로 잡을까요
신규 프로젝트 오픈 미팅 정도로 하고 이번 플젝, 헤라 씨가 정식 담당이에요. 그쪽 팀장한테 얘기해두고.
그쪽 팀장이라 하시면..
아 미안. 헤라 씨도 알지? 3년 전에 미국으로 갔다가 이제 그쪽 팀장으로 들어온
정.....
응 정민 차장. 아니 이제는 팀장이니깐. 하하. 아무튼 있다 봅시다. 회의실 잡고 인바잇 해요
네 알겠습니다...


 사람 동물이 겪는 여러 환경에서의 인간의 감정이 수많은 것으로 나열되어 있다면, 고양이로서의 나는 기쁨과 슬픔, 아픔과 편안함이라는 단순한 감정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내가 한 인간 동물 덕분에 꽤 다양한 감정을 배웠고, 이제 그 감정을 전해 주고 떠난 그를 다시 보게 된다고 했다. 다시 봐야 한다는 현실에서 나는 편안함을 제외한 기쁨과 슬픔, 아픔이라는 세 가지의 단순한 감정들이 뒤섞여진 채 어찌할 바를 몰랐다.


현지야.. 바빠?
입사한 지 3년이나 됐는데도 나 왜 이렇게 바쁘냐 무슨 일이야 고헤 라
그가 온대.... 있다가 그 사람을 보게 된대
뭔 말이야 자세히 말해봐 알아듣게
그가....
뭐. 그가 뭐. 아..... 혹시
응.. 그 사람이 왔나 봐
다시? 회사에 다시 왔다고? 귀국한 거야? 다시 출근한대? 이혼은? 했대?
모르겠어 하나도 모르겠어.....
너....
이제 곧 회의실에서 만나게 될 거 같아
헤라야.
걱정하지 마 괜찮아. 나. 하나도 변한 거 없어
변했잖아. 네가 그 이후로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내가 다 아는데
3년이잖아
3년 동안 힘들어했잖아 너. 괜찮겠어? 일단 진정하고.
응... 괜찮아 나
괜찮아 고헤 라. 너 괜찮으니깐 그냥 오늘 그렇게 지내. 달라지는 거 없어 알겠지?
응.. 달라지는 거 없어.


 현지의 무심한 듯한 '달라지는 거 없어'라는 말이 이상하게 슬프게 느껴졌다.

3년도 기다렸는데. 아니 3년이 어찌 지나갔는지 모르는데, 지금 이제 와서 앞으로 만나게 될 1시간이 10년같이 느껴졌다.


잘.... 지나갔고 기다렸고. 아니 버텨왔는데... 1시간 정도쯤 아무것도 아니야 그런데... 왜 눈물이..


 시간은 어느새 3시를 달려가고 있었다. 화장실에 갔다가 회의실로 천천히 걸어가고 있을 즘이었다.

복도 끝에서 익숙한 실루엣이 눈에 뜨인다. 청바지의 검은 세츠 무늬 셔츠를 입은 누군가가 나를 쳐다보며 걸어오고 있었다.


헤라... 씨?


 그 사람이 나를 부른다. 목소리는 여전하다. 순간 잠들어 있던 떨림이 다시 나를 감싸기 시작한다. 도망가고 싶어 지지만 두 발은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이 마비되어 가는 느낌이었다.


오랜만이군요. 여전히..
.... 안녕... 하세요
여전하네요. 목소리는. 여전히 예쁘군요..
여전하시네요. 청바지가 잘 어울리시는 것은.
잘 있었나요...
네... 뭐. 모르겠습니다.
아...


 인사를 나눴다. '안녕하세요'로 시작하는 인사였다.

 그리고 나는 잘 지냈냐는 말에 선뜻 잘 있었다고 말하지 못했다. 모르겠었으니깐. 잘 지내고 있었는지 그동안 어떻게 지내면서 시간을 흘러가고 있었는지. 나도 나를 모르겠어서 내 입에서는 그저 모르겠다는 말을 연신 마음에서 나온 그 말이 새어나갈 뿐이었다.


'보고 싶을 거예요'라는 이별의 인사는, 3년이 지난 이후
다시 '안녕하세요'로 바뀌어 내게 찾아왔다.




그녀를 찾았었다.

  회사에 출근을 했다. 오랜만이지만 여전한 사무실은 익숙하다. 그녀가 궁금해서 전화를 해봤다. 나도 모르게 어느새.. 그러나  아쉽게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잘못된 전화라고 했다. 우린 어쩌면 전화기의 연결음처럼 잘못된 시작일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게 아님을 직감한다. 여전히 익숙한 공간 여기저기서 문득 떠오른다는 것. 그게 문제다.

어떻게 지냈을지, 간간히 들려져 오는 사람들의 소식에 의하면 그녀는 꽤 일을 잘 처리하는 대리로 승진했고, 안 좋은 소문에 휩싸여 다른 팀으로 발령이 났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아팠다고도 들었다. 어떤 일이 그간 그녀에게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그녀 답게 잘 지내 주었을 거라고. 그리고 여전히 다행히도 마음먹으면 연결될 수 있는 곳에 존재한다는 사실 하나만이 그저 멀리 떨어진 미국에서도 안도감으로 다가와 주었다.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만큼 바쁜 3년이었다는 걸 그녀에게 어떤 식으로 이야기해 줄까.

사실 이야기하고 싶었던 건 지나간 과거보다는 그동안의 나에 대해서인데, 그녀는 궁금해했을까. 바쁜 와중에 여유가 생기면 문득 생기는 내가 느끼는 그리움을 그녀도 느끼고 있었을까.


 처음 만나면 어떤 인사를 어떤 대화를 주고받게 될까를 고민하다가 그렇게 멀리서 복도에서 천천히 걸어오고 있는 그녀가 보였다. 이 감정이 뭔지는 모르겠으나 여전히 반갑고 그리운, 아니 사실은 여전히 이렇게 설레고 예전의 순수한 내 모습이 눈을 뜨는 것 같은 오묘한 감정을 불어 일으키는 여자라니.


 그 여자가 지금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다. 진한 파란색 스커트와 네이비색 블라우스를 입고 있는, 다만 바뀐 건 갈색 단발머리가 아닌 다소 긴 검은 머리의 그녀. 여전히 그럼에도 뭐든지 참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그녀가 지금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어떤 말을 건네야 할까.

 잘 지냈냐는 말을 하기엔 3년이라는 시간이 얕고 간사하게 느껴진다. 잘 지내지도 못했을 그녀와 내가 상상이 되었기에...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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