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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Nov 04. 2017

#12. 보고 싶다는 것

후회하지 않습니다. 좋아해요.  

 그녀와 회의실에서 마주했다.

 반갑지만 반가운 티를 내서는 안 된다. 그래야 하는 걸 알기에.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아무 말 건네지 않았다. 그럼에도 여전한 그녀의 맑음과 순수함 때문에 눈이 간다. 노트북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는 어딘지 모르게 슬픈 듯한 눈을 매번 하고 있다. 저 커다란 눈은 누굴 닮은 걸까. 그날 잘 들어는 간 걸까.. 궁금해진다. 그러나 말을 먼저 걸진 않을 생각이다.


정 민, 무슨 생각해
아 미안. 미안합니다. 어디까지 진행했었죠?
프로젝트 양산 일정 체크하다 말았어.
정 차장, 요새 어디 아파? 미국 간다는 생각에 그저 설레는 거 아냐 하하.  
그럴 리가.. 한국에 두고 가는 게 얼마나 많은데요.
하여튼 가정적인 건 여전히. 잘 나가는 와이프에 잘생긴 아들 녀석에. 집도 있고 주재원에. 다 가졌고만



 그녀를 잠시 흘겨보았다. 여전히 노트북을 바라보고 있다. 하염없이, 무슨 생각에 빠져 있는 것처럼.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그 날 잘 들어는 간 걸까. 궁금해진다.


가기 전에 회식이라도 한번 하고 가야지. 우리 플젝 멤버들 엄청 개고생 하면서 일정 맞추고 있는 거 알죠?
그럼요 알죠. 해야지. 합시다. 못할 거 뭐 있나.  
말만 말고 오늘 번개 콜?
그래요 장소랑 인원 알아보고. 여기서 마치죠 오늘은.
장소는 막내가 정해야지. 헤라 씨가 좋아하는 걸로 정해요 오늘은
아.... 전 죄송한데 오늘 참석 못할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묻고 싶지만 여전히 입술은 떨어지지가 않는다. 나 때문인가. 모르겠다. 여전히. 나도 그녀도. 우리는 도대체 무슨 사이인 걸까. 어떤 사이로 남고 싶은 걸까. 가뜩이나 복잡했는데 더 복잡해져만 간다. 비겁한 나는 그녀를 피할 생각을 한다. 진짜 비겁한 새끼다. 정민. 넌 지금 뭘 원하는 건지.


장소는 제가 정하고, 아무튼 있다가 봐요 간단히 반주 정돈 괜찮죠 다들 바쁠 테니깐.
반주든 뭐든 모이자고. 진짜 골 때려 이 프로젝트
그래요 맞아. 정 차장 가고 나면 이제 본사에서 알아서 굴러야 하잖아. 아무리 같이 일해도 미국 가니깐
미국 가도 실시간으로 일할 테니 걱정 말고 다들. 있다 봐요.
수고... 하셨습니다. 회의록은 곧 공유드릴게요.


 그녀에게 마무리 인사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난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한마디가 이렇게 생각을 많이 하고 해야 하는 말이었다니. 새삼 그녀의 존재가 이젠 단순하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된다.


고생했어요 헤라 씨.
네....
오늘은 무슨 약속이라도 있어요?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네 몸이 좀 안 좋아서..
그래요 그럼.
아... 네


 어디가 안 좋은지 묻고 싶었지만 끝내 묻진 않겠다고 결심했다.

 이야기가 길어지면 마음만 더할 뿐. 난 나란 녀석을 잘 안다. 그렇게 보내면 된다. 그렇게 연습하면 된다. 이제 곧 난 갈 사람이고, 그녀는 여기 남아야 할 사람이고 더군다나 우리는 연결되어서는 안 되는 사이란 것쯤은, 나이 마흔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로서 지켜야 하는 예의라는 걸 모르지 않는다. 빌어먹을 사회의 예의, 규칙, 양심 말이다.


마음을 그렇게 지워내려 애써야 한다.
내가 원하지 않아도 이미 내가 선택한 것에 책임져야 한다.



 결국 그녀는 오지 않았다.

 사람들과는 의미 없는 회식 자리에서 한번 내뱉고 말면 그만인 가십거리와 그냥 그런 헛소리 몇 마디들을 주고받으며 일의 회포를 풀었다. 술을 먹다가 가끔 그녀 생각이 나긴 했지만 심하진 않았다. 이미 이십 대의 사랑에 울며 병나발 불 나이는 지난 지 오래니까. 다만 아련히 생각이 나지만 참는 것엔 익숙한 나이이기에, 무뎌져 가면 그만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자리에서 혼자서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가던 길이었다. 눈이 찾는 익숙한 실루엣이 먼발치에서 지나가고 있었다. 헤라였다.


헤.... 라..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들릴 리가 없었겠지만 그녀가 뒤를 돌아본다. 두리번거리다가 그렇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이상하게 그녀의 뒤를 쫓아가고 싶어 졌다. 그래서 그렇게 잠깐은 괜찮다는 생각에 나는 그녀를 따라가 보기로 했다.


 버스정류장에 서 있는 그녀를 멀리서 잠깐 지켜봤다. 좀 추워 보인다. 여전히 청바지에 블라우스, 갈색 코트에 단발머리의 그녀는 예쁘다. 젠장. 왜 저렇게 예쁜 건지. 그러니 꽤 깊게 생각나지 않을 수가 없다. 그 생각을 보란 듯이 깨란 듯,  집에서 전화가 온다. 아내였다.


어디쯤이야
이제 곧 들어가. 진우는
벌써 잠들었지. 오다가 쿠키 좀 사다 줘.   
알겠어...
얘기 좀 해
곧 들어갈 거야. 들어가서...


 이내 전화는 끊어지고 말았다. 화가 난 게 분명한 듯싶었다. 화 라기보다는 아내의 항상 비슷한 패턴이다. 행방을 체크하고 간단한 서로의 용건을 묻곤 끝.  이젠 그런 무미건조함과 자연스러움에 익숙할 나이가 되었는데 여전히 가끔 쓸쓸하고 당황스러운 건 매번 마찬가지다.


 전화를 하던 중에 헤라를 놓쳤다. 이미 버스를 타고 집에 간 듯했다.


눈에서 보이지 않는다.
그녀가 보이지 않고 떠나간 버스정류장을 보니 마음이 허무해진다.
 바람이 차다. 이제 곧 겨울인 듯싶다. 곧 떠나야 하는 계절이다.



 집에 들어가니 여전히 정리는 되어 있지 않은 집이 애석하기만 하다. 이것도 익숙해질 때가 되었지만 여전히 짜증은 가시질 않는다. 아내에게 쿠키를 건네주고 난 후 잠든 진우 방부터 들어가 보았다. 장난감을 가지고 놀았던 듯싶었다. 여기저기 책과 장난감이 어질러져 있는 방 중간에서 진우가 이불을 덮고 잠들어 있다. 아이를 보면 짜증 났던 마음도 금세 사그라든다.


 잠든 아이의 얼굴은 나를 편안하게 만드는 유일한 것이다. 문득 헤라의 얼굴이 겹쳐 떠오른다. 진우만큼의 작은 얼굴을 가진, 나를 편안하게 만드는 여자. 그녀의 잠든 모습을 본 적은 없는데, 상상이 잠시 될 뿐이다. 이렇게 작은 얼굴을 가진 사람이 내 곁엔 이제 두 사람이나 존재한다는 게 신기할 뿐이다.



왔으면 왔다고 얘기해야지
쿠키 식탁에다 놨어. 진우 언제 잠들었어
아까 전화하기 전에.
어. 나 옷 좀 갈아입고 올게
얘기 좀 해요. 옷 갈아입고 와서
그래...




 샤워를 하면서도 오늘의 피로가 쉽게 가시질 않았다.

 바로 잠들고 싶지만 잠을 자려고 침대에 눕는다고 해서 잠이 쉽게 오는 법도 아니다. 복잡한 생각을 가지고 있을 때면 더더욱. 완전히 일에 녹초가 되어서 야근을 하고 올 때가 아니면 새벽에 선잠을 자다가 일어나기가 일쑤다. 해외 출장이 많아서 그런 걸까.. 요샌 몸이 예전 같지 않다.



나 왔어. 얘기란 게 뭐야
출장 언제가. 또
다음 주에 일단 3주 정도 가게 될 거 같아
그다음엔?
거기서 집 알아보고 이것저것 수속 밟아놔야지.
.... 어떻게 하였으면 좋겠어?
뭘?
왜 화 안내?
.... 굳이 화 낼 필요 없을 거 같았어
... 당신 내 남편 맞아? 남자 아냐? 질투도 없어? 미친 거야?
미친 건 내가 아니라 당신 아닌가..
뭐? 지금 장난해?
아니... 수현아 진정해. 나 지금 싸우자고 그러는 거 아니고 오늘 정말 좀 피곤하다
항상 이런 식이지
아니, 진짜 오늘 좀 여러모로 피곤해. 싸우고 싶지 않아.
얘기하자고 했잖아.
.... 알고 있었던 건 최근이고, 그런데 별로 괜찮다. 이해해.. 내가 잘못한 게 많으니깐
... 당신 뭘 잘못했는지 알기나 해?
솔직히 다 알지 못해. 그렇지만 수현이 네가 나한테 만족 못하니깐 다른 남자 만났다고 생각해
.....
내가 못난 놈이어서 내 여자 하나 지키지도 못했단 걸 알아서 쪽팔렸어... 그래서 화도 안 난다
...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
당신 나 사랑하기는 하니?  
.... 수현이 넌 진우랑 나를 사랑하기는 해?
무슨 말이야 그게?
일이 더 좋다며. 그래서 애 낳자마자 양가 부모님께 맡기고 3개월 만에 복직한 너야.
나를 잃고 싶지 않았어. 원하지도 않았고.. 알잖아
잃고 싶지 않은 엄마들이 다 그런 건 아니야. 너한테 뭐라 하는 건 아니지만 가끔 네가 이해가 안돼.
뭐라고?
나랑 결혼을 왜 했는지 모르겠어. 이런 성격이면 너 혼자 살아도 충분히 잘 살았을 거 같은 여자야
..... 지금 말 다 했어?
아니 아직 덜 했어. 장모님도 너도 내가 부족하기만 한 건 알겠지만 나도 최선을 다했어.
우리가 언제 부족하댔어?
3개월 만에 만나서 결혼을 결심한 건 네가 같이 살면 편안하고 친구 같고 좋을 것 같아서 그랬어
지금은 안 그렇다는 거야?
....... 그만하자
그래서 당신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지금 살고 있는 거야?


 아내의 그 말에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무슨 생각으로 살고 있는 걸까. 사실 나도 그 답을 알고 싶었다. 나 조차도 입을 감히 뗄 수가 없었다. 그녀가 말한 들 이해해 줄까.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는 아내에게 화 조차 내지 않고 오히려 덤덤한 나를 이해가 될까. 아니 사실은 그것보다 더 요즘 복잡한 어떤 한 여자를 생각하게 된 나를 이해를 해 줄까. 복수하는 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질투심이 다분히 많으니 충분히 그럴지도 모를 일이다.


수현이 네가 원하는 게 뭐야
... 헤어지지 않을 거야
......
같이 미국 가.
수현아....
미국 가. 같이. 당신 혹시 여자 있어?


 순간 대답하지 못했다. 반박도 하지 못했다. 헤라는 여자긴 하지만... 내 여자라고 감히 말할 수 없다.


그저 오랫동안 연결되며 바라보고 싶어 지는, 여전히 날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힐링의 대상이라고 감히 말할 수가 없다.
그녀가 내 여자이길 바라는 내 마음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생각이다.



무슨 말이야 그게
난 정리할 수 있어. 잠깐 엔조이였어. 당신도 있으면 정리해. 당신 잘하잖아 정리하는 거.
수현아...
남자들 다 그런 거 아냐? 내가 모를 줄 알아? 당신 요새 이상했어. 멍 때리고 생각하는 일 많아지고..
....
누가 있었던 들 제로섬이야. 우리 쿨하잖아. 당신도 그렇잖아. 우리 그래서 만났고 3개월 만에 결혼했잖아.
수현아...
그 년이 어떤 년이든 상관 안 해. 헤어지지 않아. 같이 미국 가. 거기 가서 집 잘 구해줘. 진우랑 따라갈 테니깐.
일은 어쩌고... 너 일 좋아했잖아.
오늘 사표 쓴다고 얘기하고 나왔어. 나 진지해
아..... 왜 그랬어.
그래야 당신 나랑 헤어지지 않잖아.
수현아... 너 언제 그렇게 날 생각했다고..
뭐?
너야말로.... 아니다 모르겠다. 그래.. 같이 가자 미국. 가보자.... 그래. 가보자고.


 아내와는 얼마든지 헤어질 수 있는 마음이 이미 되어 있었다.

 그녀와는 정말 이제는 정리하고 싶었다. 10년을 살았지만 여전히 맞지 않는 구석이 존재하고 부부이고 이해하고 산다지만은 도저히 인내하는 것도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을 때쯤이었으니깐. 그러나 선뜻 내색하지 않고 바쁘게 일을 하다 보니 시간이 흐른 것뿐이다. 마음은 이미 멀어진 지 오래다.


 그러나 진우와는 헤어지지 못한다. 피붙이와 헤어질 수 없는 느낌은 아마 아들과 아빠이라는 끊길 수 없는 연결고리 때문일지 모르겠다. 견디고 견디다 보면 괜찮아지겠지 라고 생각하지만 도저히 견디지 못하는 날에는 진우조차 머릿속에서 쉽게 떠오르질 못했다. 그러나 잠든 아이를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와서 보게 되면 다시 마음을 다잡곤 했다. 진우는 이제 내게 그런 존재가 되어 버렸다.


 주말이면 내내 아내 대신 아이와 놀아주는 좋은 아빠가 바로 정민. 내 모습이다. 키즈 카페에 노트북을 들고 진우와 단 둘이 가게 되는 날이 잦아들 때 동네에 우스운 소문도 났었다. 이혼을 한 혹은 싱글 남이라는 재미있는 소문에 그저 쓴웃음을 짓고 만 나였다.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는 치기 어린 마음도 함께.


 그런 우리가 미국에 가면 다시 좋아질 수 있을까. 설령 좋아진 다 한들 이상하게 내 마음이 이렇게 허전하고 공허한 건 왜인지. 아내와는 다시 사이가 좋아질 수도 있다. 그렇게 사이좋은 부부로 좋은 엄마 아빠로 살면 그만이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마음이 아파온다. 나이 먹은 남자도 마음이 아프고 눈물이 나오려 할 때가 있다. 그러나 눈물은 쉽게 흐르지 않는다. 아니 어떻게 우는지 우는 방법을 잊어 먹었다. 참고 살아온 게 익숙해서 그런가 보다.


시간이 흐르는 게, 이상하게 허무하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은 더 그렇다. 뭔가 하나 소중한 걸 잃어버린 느낌이다.
그녀가 생각이 난다. 또 다른 내 모습을, 잃어버린 나를 찾게 해 주는 듯한 그녀...



공항 가는 버스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음악을 들으려 했다. 그녀와 같이 듣던 그 음악... 그러던 찰나였다.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헤라였다. 이제 막 버스가 떠나려고 할 참에 누군가가 뛰어 들어왔다. 정말 그녀였다. 믿을 수가 없다.


아저씨 고맙습니다.
아가씨 한 바터면 늦을 뻔했어
헤헤 그러게요 휴....
아.....
... 헤라 씨?
.... 차장님!
여긴 어떻게.... 어떻게 알고 왔어요?
아...
아 일단 여기 앉아요 지금 사람이 꽉 찼어. 내가 저 앞에 앉을게
아 저 괜찮은데
아니 2시간은 가야 해요 서서 가면 힘들어. 난 저기 간이 의자에 앉으면 되니깐. 난 바지 입었잖아요
아... 고맙습니다. 아 여기 차장님 이거
이거 뭐예요?
떡... 이예요. 아침 항상 안 드신다고.. 그래서 요기될까 싶어서 가지고 왔어요


 그녀가 왜 편안해지는지 알게 됐다.

 순수함. 앞 뒤 재지 않는 행동력. 무엇보다 배려있는 따뜻함. 반하지 않을 남자는 아마 없을 테다. 더군다나 그녀는 예쁘기까지 하다. 젠장. 내 나이를 탓한다. 아니 내 상황을 탓한다. 아니 탓하기 이전에 그저 오랜만에 심장이 떨려온다. 나는 이런 용기가 없는데, 그저 떠나는 누구를 마주하고 보러 달려와줄 만큼의 용기와 설렘은 이제 나에겐 남아있지 않는데.


 내게 없는 용기를, 그녀는 가지고 있었다. 아름다운 그녀가 더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갈색 트렌치코트와 끝이 약간 곱실거리는 갈색 단발머리의 그녀가. 여전히 키가 크고 여리한 몸이지만 마음은 나보다 훨씬 차분하고 강한 어른의 이 여자를.


난 그녀를 놓치지 않고 싶다. 오랫동안 곁에서 될 수 있음 바라보고 싶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을 생각이다. 그녀를 지켜줘야 하니깐..  



 공항에 도착했다. 내가 먼저 내려서 짐을 찾고 그녀가 버스에서 내리는 걸 기다렸다. 그녀가 드디어 내 눈에 가까이 보인다. 음악을 듣고 온 건지 끼고 있던 이어폰을 귀에서 내리면서 성급히 내려오려다가 발을 헛딜 뻔 한 걸 아차 하며 잡아 주었다. 그녀가 내 손을 잡았다. 꽤 힘이 들어간 손이다. 예전과는 어딘지 모르게 더 힘이 들어가 있다고 생각한 건 나만 그런 걸까. 어딘지 좀 달라 보인다. 예전의 지혜의 숲의 울고 있는 헤라와는 어딘지 모르게.


아... 감사해요
조심해요 내릴 때. 다치면 안 되죠.
네...
어떻게 알고 왔어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온 거예요


화를 내려던 건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화가 난다.


화내지 마세요. 오늘 떠나시는 날이잖아요.

화내는 게 아니라... 아니 정말 어떻게 온 겁니까. 제정신 이예요?

제정신 아니에요. 아니어서 왔겠죠

헤라 씨.....

너무 뭐라 마세요. 고양이가. 아니 사람이 한번 살지 두 번 사는 거 아니에요.

아무튼 들어갑시다. 나 시간 많이 없어요

저도 시간 많이 없어요.

출국행 티켓팅을 해야 해요

네. 하세요 저기서 앉아서 기다릴게요.

빨리 하고 올게요.


 마음이 다급해진다.

그녀와 함께 할 시간이 별로 없다. 비행기는 앞으로 1시간 후. 수속을 위해 들어가야 한다. 생각이 여전히 복잡해진다. 아니 그런데 복잡한 생각보다는 그저 기쁘다. 이렇게 설레고 기뻤던 적이 언제였더라 기억도 나지 않는다. 보고 싶다는 마음에 그저 달려온 막무가내 그녀가 싫지가 않다. 오히려 좋아져서 문제일 뿐이다. 욕망과 현실은 언제나 그렇게 서로 다른 이면에서 내 안에서 싸우기 일쑤다. 그러나 오늘은 싸우기 이전에 그저 그녀에게 집중하기로 한다. 몇 시간 남지 않았으니깐.


저기 잠깐 앉을까요.
네. 헤헤
오늘은 안 우네. 고헤 라...
울죠. 마음속으로 이미 울고 있어요. 그렇지만..
?
우는 모습보다 웃는 모습 보여주고 싶어서요.
어른이네.....
그냥..... 그냥 가시기 전에 한번 더 보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왔어요
그런 막무가내는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겁니까. 헤라 씨 그렇게 안 봤는데
차장님이 아직 저에 대해서 모르시는 게 참 많아요
많지... 우리가 서로에 대해 아는 게 뭐 있나
없죠 많이
그렇죠 많이 없죠
그렇지만 하나는 알아요
...?
보고 싶다는 것.
아...
보고 싶습니다. 보고 싶어요. 난 이제 당신이 보고 싶어 졌어요
.... 나도 보고 싶을 겁니다.


나도 모르게 내 마음을 말하고 말았다.

 그녀는 내 마음을 말하게 만든다.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오면 어느새 나는 내 마음을 입 밖으로 내뱉고 만다. 그녀의 용기에 나도 동행하고만 싶어 진다.


그거 하나면 됐어요. 그럼 또 볼 수 있어요
헤라 씨...
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으면 또 볼 수 있단 소립니다. 차장님. 저 어리지 않아요.
...
사람 동물. 아니 사람이 말이죠. 한 번만 산다는 걸 알고 있어요. 그건 동물이나 인간이나 마찬가지죠
.... 아.... 그래요
죄송해요. 미안해요. 알아요. 어떤 마음인지. 알아서 더 이상 긴 말은 하지 않겠어요 다만
?
제가. 기억할게요. 오늘. 그때. 지혜의 숲. 첫 만남. 제 첫 키스...
아... 첫.... 키스였어요?
네. 그랬어요. 차장님은 처음 아니시죠?
.... 말이라고 하나
쳇. 거 봐요.
미안...
제가 선택한 거예요
아...
전 제가 선택한 것에 후회하지 않아요. 저 만난 거. 저와 지혜의 숲 가신 거. 후회하세요..?
... 그럴 리 있겠어요?
아...
후회하지 않습니다. 좋았어요. 모든 게 다. 그리고...
그리고...?
좋아해요. 지금도 이렇게. 여전히..


 좋았었다. 그리고 여전히 좋다. 좋지 않을 수가 없다.

 그녀와 찾아간 지혜의 숲. 그녀의 입술. 그녀의 목소리. 향기. 모든 게 다 좋았다. 좋아서 내내 같이 있고 싶었다. 그러나 시간은 우리의 편이 아니고, 현실은 더더욱 우리의 편이 아니란 걸 알았다. 나는 어른이었고 또 어른 중에서도 이제는 책임져야 할 의무가 다분히 많은 어른에 속했기 때문에, 감히 이 여리고 어린 여자를. 나를 향해 들어오고 있는 이 예쁜 사람을 감히도 안을 용기가 점점 없어지기도 했다.


사랑은 고통을 동시에 가지고 찾아온다고 누가 그랬는데.
그 말이 이제야 실감이 난다.


평범했던 일상이 말이에요
..?
당신을 알게 된 이후부터 모든 사소한 것들이 하나같이 의미가 있게 됐어요
아....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 사람인지. 저 알 것 같아요 누구 덕분에
아... 나도... 나도 마찬가집니다.
지켜내고 싶기도 하고요.
아...
지켜내는 대상이 서로에게 다른 거 알아요. 그래서 저는 많은 욕심을 내지 않아요 다만
다만...
보고 싶을 때 되도록 많이 기억해 두려고요. 이렇게..



 그녀가 먼저 다가왔다. 처음이었다.

 항상 내가 먼저 으레껏 예쁜 그녀를 보면 어쩔 수가 없이 다가가고만 싶어 졌는데 이제는 그녀가 먼저 내 손을 잡았다. 약간 떠는 듯한 그녀의 손가락이 어느새 내 손을 꽉 잡고 있었다.


 볼에 키스를 해 주면서 싱긋 웃는 그녀가 슬펐고, 아름다웠고, 또 이런 내가 도무지 종잡을 수 없어서였을까. 나는 그녀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대로 그녀의 차가워진 두 볼을 양손으로 감싸 안고서 나는 입을 맞췄다.


아....


 그녀가 어느새 울고 있었다. 웃는 표정에 눈물이라니. 그게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니. 역시 예뻐서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게 만든다.


울지 마요. 당신 울면 내가 갈 수가 없잖아
거짓말. 가실 거 압니다. 가야 한다는 것도 알아요
걱정 마요. 갈 거니깐.
걱정해요. 이제 진짜 갈 사람이니깐...


 갑자기 차가운 현실이 내 이성을 되찾아오게 만들고 있었다. 그래 난 이제 진짜 갈 사람이니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마음에 없는 소리로 조금씩 이별을 해야 함을 안다.


이제 나, 많이 찾지 마요 헤라 씨.
.....
식구들이랑 같이 가게 됐습니다. 미국으로 다 같이 올 거예요
아....
뭘...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됐어요 거기까지만 해요
.....
괜찮아요. 저는 괜찮아요
.. 헤라 씨
제가 뭐 바란 적이 있나요


생각해 보니 없었다. 그녀는 내게 해주는 것만 있었을 뿐.

 이야길 들어주었고, 위로를 해 주었다. 미소를 건네주었고 간간히 사무실에 놓여있던 과자, 초콜릿, 사탕, 고구마 말랭이, 바카스, 스타벅스 커피, 떡 등. 그녀 다운 순수한 아침 선물들이 그녀의 마음을 대신해 주었으니깐. 나는 받기만 했다. 준 적은 한 번도 없단 생각이 그제야 밀려들어서 미칠 듯이 아팠고 미안해졌다.


바란 적이... 없군요 그러고 보니. 난 받기만 했네... 미안합니다.  
그거 아세요?
뭘?
줄 수 있을 때 주는 게 얼마나 큰 건데요
아...
전 바라지 않아요. 다만 주는 걸 받아주시는 게 감사해요
이제... 받지도 않을 겁니다.
.....
받을 수가 없어요
...... 알아요.
미안해요.
애태워도 마주치는 추억이 반가울 때가 있을 거예요
아....
수많은 제 모습이 보이실 때가 있을 거예요
아... 헤라 씨.
기다린다면 보게 될 거예요. 시간은 중요치 않죠
....


수속 장소로 들어가려는 게이트 앞에서 그녀가 손을 흔든다. 그렇게 손을 흔드는 그녀를 뒤로 하고 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미국행 비행기가 그렇게 무거울 수도, 그리고 처음으로 눈물이라는 게 흐를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녀가 보고 싶어서 아픈 마음이 이 정도일 줄은 나도 상상하지 못한 아픔이었다.


남의 이야기 같았던 설레는 사랑이, 감히 이제야 내게 찾아올 줄이야.


고헤 라. 잘 있어......





 그가 떠났다. 비행기를 타려고 들어가는 뒷모습 내내 나는 겨우 흐르려던 눈물을 애써 참아내야 했다. 어찌나 떨렸는지 말 한마디 하는 게 그렇게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는 걸, 그제야 알게 되었다. 한순간 조차 잊지 않고 싶은 장면들이 내내 머릿속에 그려지고 또 그려질 뿐이었다.


 여전히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사람. 여전히 비행기가 잘 어울리는 사람. 공항이 그렇게 슬픈 장소라는 것도, 그 공항과도 참 잘 어울리는 사람 동물이란 것도 말이다.


 3년 동안 나와 그는 어떻게 변해 있을까. 고양이의 수명으로 따지면 나는 별로 시간이 남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지만 그 시간보다 더 간절한 마음이 앞섰기에 그땐 시간을 생각하지 못했다.


 그가 돌아오는 그 시간에 나는 어떻게 변해 있을까.... 과연 살아서 볼 수 있을까. 그래서였을까. 나는 그를 보러 달려간 공항버스 정류장에서부터 그를 보내는 내내 울고 싶었다. 그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절대 죽을 수가 없다. 그래서 난 어떻게 해서든 살아내야만 한다. 수명이 다 할 때까지. 그대로 할머니처럼 소멸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그가 바라보고 있었던 비행기를, 나도 언젠가 바라볼 수 있기를. 아니 둘이 같이 바라볼 수 있는 날이 곧 올거란 믿음만 앞선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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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li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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