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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May 09. 2021

제어되지 못한, 향수

그 플로럴향이 좋아서. 내내 닮고 싶어서...

Prejudice prevents me from loving others, Price makes no one else love me.

편견은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게 하고, 오만은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할 수 없게 만든다.


- 오만과 편견 - 




갈망과 억제가 맞부딪친 이후엔 어떤 일이 발생할까. 

반쯤 잠긴 욕조 안의 물속에서 모락모락 피어 나오는 김을 바라보며 문득 생각했었다. '나는 뜨거워요 그러니 조심해요'라는 일종의 경고를 주려는 것처럼 보이던, 욕조 속에서 피어 나오는 연기를 바라보면서. 발목을 담갔을 때 약간 뜨거운 기운에 아차 했었지만 발을 뺴진 않았다. 그대로 풍덩.  다소 뜨겁게 달궈진 물속에 나체가 된 몸을 담갔을 때의 그 순간. 처음엔 찌릿하고 가끔은 불쾌한 감각을 자극하지만 조금의 인내를 발휘하다 보면 그제야 밀려오는 무언의 기쁨이 찾아온다. 그것은 인내한 자만이 느낄 수 있는 일종의 감각적 평온과 같다. 매일 반신욕을 고수하는 이유 중 하나로서는 '씻김' 이라든지 '정화'와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리하여 발가벗고 들어가 보고 싶다는

욕조를 향한 갈망과 동시에 너무 뜨거운 물이라면 곤란할 것이라는 예상되는 억제가 맞부딪치더라도. 결국 기어코 들어가 버린 채 반신욕을 즐기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겠다. 뜨거움에 데일 지라도. 그래서 좀 아플 지언정. 그렇게 어떤 일이 발생할지 짐짓 예상이 될 법함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해 봐야 직성이 풀리는 지독한 악취미를 가진 한 인간의 그로테스크한 취향의 결말은 그래도 담가보겠다는 것. 하루의 고단함을 해소하고 싶다는 욕망에 휩쓸린 채 발을 담그고 만다. 설령 발목을 데인다 할지언정. 살갗은 이미 뜨거운 물에 담가져 불그스름한 피부색으로 변하더라도. 게다가 반신욕 이후의 독서는 쾌락의 절정을 불러일으켜 주기에. 그 정도의 쾌락은 허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서. 



거기에 산책까지 더해지면 더 좋겠다고, 언제나 생각한다. 언제나. 언제까지나...




쾌락과 자기 파괴를 구분 짓는 선은 어디에 있을까.

반신욕을 하면서도 엉뚱한 생각이 솟구쳐 올라오곤 한다. 연상되는 장면들과 인물들과 그 안에서의 '나'를 떠올린다. 가령 집에서나 직장에서의 조력자를 가진 그와 한편 그와는 대조되게 현실의 '조력자' 로서 최선을 다하는 요즘의 모습들처럼. 청소와 요리, 빨래와 양육, 생필품이 떨어질 만할 때 사들이는 온라인 쇼핑이나 각종 집안의 시시콜콜한 것들의 챙김과 돌봄... 반신욕이 필요한 건 '그것들'로부터 잠시 해방되고 싶다는 욕망 때문일지 모르겠다. 



뜨거운 욕조에 대한 오만과 편견이 있었다. 

그래서 매번 미지근한 물로 반신욕을 하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조금 더 데워진, 누군가 만져보면 다소 뜨겁다 생각할지도 모를 온도로조차, 조금씩 그 수위를 높여가는 중이다. 생각하자니 뜨거움을 원한다는 건 무서운 일이지만... 애초에 원한다는 것 자체가 언젠가부터 금기시되어 버리고 마는 것 같지만. 



성역할의 구분이 훨씬 모호해진 시대임에도, 훨씬 개방(?) 적인 세상이 되었음에도.

모호하지만 한편으로는 확실한 생각의 금기에 부딪히고 만다. 그것은 마치  '오만과 편견' 같기만 하다. 가령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지치고 좌절하고 조용히 격분하는 시간이 쌓아질수록. 누군가로부터 인정받거나 사랑받거나 구애를 받고자 하는 그 '원함' 들이 기혼 제도권 안에 들어오면서 은근하게 억제당하고 마는 것 같은 묘하게 분한 기분. 그리하여 자신조차도 이유를 알지 못할 깊은 심란함을 느끼고 좌절하고 마는 것들. 자신 안에 꿈틀거리는 욕망과 동시에 원하는 것들을 향하는 상충된 감정들을 느끼면서도 애당초에 스스로 욕망하고 원할 권리가 있는지조차 확신하지 못하고만 채, '욕망'을 부끄럽게 여기게 되고 마는, 조신하고 정숙한 인간이 생각해야 마땅한 '바르다'라는 자기검열적인 생각들. 심지어 자신의 욕망을 거의 인정조차 하지 못한 채로 그대로 늙어가는 시간들. 사라지는 시간 앞에서 무력함에 빠지는 인간... 



그래서 우리는 그 무력함에 대항하고자 '글'을 쓰는 게 아닐까. 남겨서 없애려는 감정을 위해. 혹은 남기고도 싶어서. 



그에게 차마 하지 못한 말은 반신욕을 하면서 물속에서 자주 내뱉곤 한다.  

더 이상 자신이 없다는 것, 자신이 생기지 않을 것 같아서 두렵다는 것, 나 말고 누군가를 돌본다는 것이 가끔 신물 나게 지겨워져서 두렵다는 것, 지겹고 싶지 않지만 기어코 지겨워서 울고 마는 착한 여자의 갈등... 혹은 동시에 양가성을 품고 말아, 본분을 망각한 채 때때로 자유를 갈망하고 욕망하는 악녀이기도 하다는 것, 여전히 나를 사랑해줄 미친놈 같았던 당신을 그리워한다는 것, 그러나 이젠 그 '미친놈' 은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것, 바라지도 않게 되어가고 있다는 것... 하물며 늙어가는 여자를 웃게 만드는 것들이 가족 안에서부터 찾을 수 없게 변해가기도 한다는 것. 아이를 키우며 더욱 커져가는 기혼 제도의 모순과 역설을 기어코 경험하고야 만다는 것, 존재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그 욕망하지 않아야 마땅한 괘씸한 '브론스키' 같은 존재를 그럼에도 잠시나마 상상하다가 웃고 만다는 것, 당신을, 나를,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반신욕을 하면서 내뱉고 마는 웃기지도 않은 생각을 하다가 기어코 웃고 넘긴다는 것... 



오래전, 이 '욕망'에 대한 토론을 하려 했을 때 그의 표정은 무서웠다. 그래서 탄생된 지혜는 '제어'였다.

마음의 제어, 금욕주의로 단련된 생각의 통제, 건전과 화평을 유지하려는 인간 본성에 반하려는 우스운 인간들의 안간힘... 건전하다는 건 무엇일까. 또한 건강하다는 건 누구의 기준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일까. 물음표가 남겨지는 횟수가 더해갈수록 반신욕을 하는 시간도 비례해서 길어진다. 



또한 비례하는 못된 욕망은 혼자 있고 싶다는 것. 미안함에 어쩔 줄 몰라 울어버리지만, 어쩔 수 없이 원하고 마는 것. 내 시간..



반쯤 잠긴 물속에서 몸을 웅크린 채 오른쪽 검지 손가락으로 발등을 매만져보았다. 

부드럽고 예뻐 보였다. 동시에 그래서 슬픔도 조금은 느꼈던 것 같다. 왜 슬펐을까. 왜 그랬을까. 지나가는, 흐르는, 조금씩 낡아지고 늙어가는 몸이라, 서서히 사라지는 생기에, 더 사라지기 전에 사랑하고 싶다는 우습고도 잔혹한 욕망 때문이었나. 생각쯤이야 아무렴 어때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의외로 무서운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걸 망각한 어리석은 인간의 뻔뻔한 초연함으로 무장한 채로, 그대로 몸을 일으켜 반신욕을 마치려 했다. 수건으로 몸의 물기를 닦아내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문득 향수를 뿌려 보고 싶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아니 어떤 이유로 인해. 다 제어해도 한 가지 정도는 내가 좋아하는 걸 남겨 둬도 괜찮겠지 싶었으니까. 정도는 괜찮을 거라고. 어느새 나는 편향적 인간이 되어 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끼던 샤넬의 향기가 입혀지던 순간, 제어는 중단되었다. 

잠시 동안이었지만 그 모습의 내가 다시 좋아지려 했다. 주체적으로 입으려 했던 향수... 그 플로럴 향기의 주인으로서의 거울 속에 비치던 짧은 시간 동안의 나로 인해서, 반대로 긴 시간의 엄마나 아내로서도 꽤 잘 살 수 있을 것도 같다는 모순적 생각에 다시 빠지려 했다. 아주 오래전 향수의 은은하면서도 꽤 진한 향기가 엄마들로부터 전달되면 나는 오만했고 편견적인 생각에 사로잡히기 일쑤였지만, 그러나 그것이 지극한 오만과 편견이었다는 것을 이제는 조금은 알 것 같기만 하다. 왜 그녀들이 향수를 뿌리는 지를. 알다가도 모를 제각각의 이유들이겠지만. 



누군가는 자신을 사랑하는 일종의 주체적인 결단이었고, 

제어하지 않고자 했던 단 하나의 욕망이었다는 것을 묘하게 실감한 채로. 



향수를 입고 책을 읽는 이유.. 시간과 생각을 뛰어넘는, '정확한 사랑의 실험' 이자, 구원의 마법... 나의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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