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헤븐 May 07. 2021

아껴줘

소년은 나무를 무척이나 사랑했습니다. 나무는 소년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주었고, 소년이 청년이 되고, 노인이 될 때까지 

나무는 여전히 그곳에서 아낌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주었습니다...


- 아낌없이 주는 나무 - 




기침이 줄어들었다. 아이는 분명 나아지고 있었다.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마음에서는 씻기지 않는 어떤 장면들이 흔적이 되어 뒤숭숭한 기분을 자극하고 있었다. 버럭 해버리고 말았던 미안한 장면이나, 아이나 집안일은 기어코 밀어내버리고 생각의 앞자리를 차지하고 마는 생각에 대한 생각마저도. 그러나 '그런' 기분에 마냥 의지하며 살아가기에는 나의 심신은 꽤 단련되어 있었다. 그것 조차 다행이라 생각했다. 현실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지극히 근면 성실한 프로테스탄티즘적인 태도. 전략적이고 이성적인, 합리적이라 착각하기 쉬운 강건하게 똘똘 뭉쳐진 행동강령들... 



어린이집에 가고 싶어 했던 아이를 데려다주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 엄마, 이제 곧 겨울이야?

- 아니. 이제 곧 여름일걸. 아직은 봄이고. 

- 그래? 



아이의 생각이 좀 더 궁금해진 나는 계속 말을 이어나가려 했다. 

그러나 사실 어느 순간부터 아이와 대화를 계속해서 이어가고 싶다는 생각은, 아이를 위한 문장력이나 어떤 국어적 육아적인 것을 위함의 범위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것은 지극히 이기적인 속셈이 담긴, 그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싶은, 한 '여자'의 마음에서 솟구쳐 나오는 연속되는 대화였다는 걸 다행히 아이는 몰라 주었다. 몰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 왜 겨울이라고 생각했어?

- 하늘이 흐려서. 겨울은 춥고 흐리잖아. 

- 그러게. 봄이어도 겨울일 수 있고 겨울이어도 여름일 수도 있네. 훌륭한 생각이다. 민이가 옳아. 정말 그래... 

- 엄마는 무슨 계절 좋아해 

- 다 좋은데. 여름은 왠지 별로야.

- 왜?

- 자비롭지 않아서. 여름의 햇볕은 자비롭지 않게 뜨거워. 뜨거우면 금방 지치니까. 지치면 안 되니까.



아이들과의 이 삶은, 빛이 사라지지 않도록 강약세기를 잘 조절해야 하는 전구와 닮았다... 



아이는 '자비로움' 이 뭔지 물었다.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잠시 망설이다가 나는 대답했다. 넉넉하고 아낌없이 줄 수 있는 마음이라고. 그 마음을 품어야 사랑을 온전히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 따위는 덧붙이지 않은 채로. 실로 자비롭지 않았던, 여전히 어느 마음 한편에서는 스스로에게도 아이들에게도 자비롭지 않은 채 매몰차게 다그치기 일쑤인 나를 반성한 채로. 스스로에게도 그다지 너그럽지 않은 나는 엄마가 된 이후에 좌절과 실망을 반복하곤 한다. 이런 성정의 사람이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 싶어서... 



집으로 돌아와 다 된 빨래를 널었다. 청소를 끝내고 몇 주 전부터 시작한 SW 코딩 수업을 듣기 위해 식탁 위의 노트북을 켰다. 아직 시작되려면 30분 정도가 남겨져 있었다. 문득 화장대로 가서 잠시 거울을 쳐다보고 싶어 졌다. 거울 안에 비친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이 한 문장을 떠올렸다. 



'아껴줘' 



사라지지 않게 아끼고 마는 어떤 것들. 



어린이집에 보내기 전 아이에게 했던 말이었다. 

자주 아이들에게 건네는 그 말을. 그러나 내게는 해 주지 못하고 마는 그 문장을. 여전히 어리석고 어린면이 가득해서 도무지 어른으로 살아가기에는 여러모로 곤란하고 당혹스러움에 눈물을 자주 흘리고 마는 나는. 온전히 누군가에게 듣고만 싶어 지는 그 문장을. 아이에게 대신 건넸다. 아껴줘야 한다고. 자신을 누구보다도 열심히. 그래야 누군가를 아낌없이 사랑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그러면서도 속된 나는 다른 생각을 하고도 말았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정말 행복했을까를. 자신의 모든 것을 잘라내어 나이테가 보이고 토막 난 몸이 되어서도 그 자신의 남은 그루터기마저도 주다가 늙어갔던 그 나무의 사랑은 도대체 어떻게 정의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 나무는 소년 이외에 다른 것들을 사랑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을까. 가령 자신의 무성하고 푸른 잎사귀나 자신에게 다가오는, 기어코 보드랍게 감싸주고 마는 바람이나 공기, 하늘에서 내리는 빗방울이나 햇볕과 같은 것들... 그것들도 사랑했을까. 그러나 그 사랑이 소년을 위함을 뛰어넘진 못했던 걸까. 기타 등등의 허무맹랑한 생각들의 끝에서 어떤 단호한 마음이 다시 다가오려 했다. 



서로 아껴주는 시절이 상실해간다는 생각을 기억하자고. 

그래야 더 아껴줄 수 있을 것이라고. 아껴주다 보면 아낌을 받을 날도 있을까를 잠시 동안 생각하면서 사랑 앞에서는 한참 모자라지 싶었다. 아끼는 마음은 함부로 원하면 안 되는 것임에도. 다만 아끼고 싶은 어떤 것들을 떠올린다. 



아이의 목소리와 다가오는 볼의 입맞춤. 잠든 모습과 숨소리, 아직 포동포동한 손마디의 살들.

혼자 있는 시간, 거실에 흐르는 음악들, 재생되기 시작한 플레이리스트

그리고 아끼기 시작한 샤넬의 샹스... 그런 것들을. 



아끼는 것들이 있어야 아낄 수 있는 힘도 생긴다. 얼그레이 차, 책, 음악, 그리고 꽃 향기의 향수... 이젠 내게 그런 것들. 



#아침단상 


작가의 이전글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