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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Jun 15. 2021

결혼하면 사랑일까

사랑은 고독한 두 존재가 서로 보호하고 느끼고 맞이하는 것에 존재한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도 모르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기를 반복했다. 가지고 있던 몇 가지의 생각에 지각변동이 생기고 말았기에 절로 나온 반응이었을까. 어찌할 수 없이, 막을 도리 없이. 드라마나 영화, 문학이나 예술, 무엇보다 일상에서 우리가 흔히 마주하는 결혼과 사랑, 그리고 외도와 같은 화두들을 생각할 때면 나름의 가지고 있던 기준들을 떠올리게 되곤 했는데, 그런데 그 경계와 좌표점들이 와르르 뒤틀어지듯 움직여져서 급기야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층이 다시 쌓이는 기분이랄까. '결혼하면 사랑일까'라는 책은 그리하여 상당수 신선한 아찔함으로 다가오고 말았다. 마치 갑자기 만나버린, 피하지 못하고 마는 '길티 플레저'처럼. 



불륜은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되는 지극히 개인적인 의도에서 비롯되는 그런 하찮은 영역의 것이 아니라고. '유책배우자'라든지 '피해자' 혹은 '가해자'를 만들며 파국으로 치닫는 형태의 그것은 그 시장의 참가자들의 깊이 숙고하지 못한 채 통제되지 않은 행위의 결과일 수도 있겠으나 동시에 사랑의 종말에서 탄생되는 또 다른 서사가 촘촘히 쌓아진 상태의 누군가들의 그것은 꽤나 진지하게 고려돼야 할 영역이라고. 물론 애초에 개인들의 사랑을 이해할 타자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도 할 테지만... 아무튼 이처럼 사회 통념적으로 금기를 향한 발칙하고 오만방자하고 파괴적일 수 있는 생각의 기준에 대해서, 이 우주에 한 명 정도는 이런 생각에 '완전히 틀리지는 않았다'는 일종의 시원하지만 굉장히 따끔하고 파괴적인 화답을 받은 기분에 휩싸였다. 그리하여 뭔가 계속 쓰고만 싶어 졌던 것이다. 지금처럼. 놓지 못하고 마는 감정으로부터의 해방을 갈구하듯이. 고작 책 한 권에 불과한데, 이 철학자의 책 한 권이 도대체 어째서 무엇이라고.  



책은 말한다. '결혼 생활은 지속적인 사랑과 헌신을 바탕으로 지속된다'라고. 또한 '서로에게 지속적으로 온 마음을 다하도록 해주는 것은 바로 두 사람이 사랑으로 이어진 강한 유대 관계'라고. 중요한 것은 바로 '지속' 그리고 '유대 관계'라 했다. 그리하여 기혼자들의 행동에 대한 도덕과 부덕을 판단할 수 있는 근거도 '오직' 그뿐이라고 책은 말한다. 오랜 시간 변치 않은 무언가를 유지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물며 수십 년 이상 노동을 한다든가 함께 생활하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란 말인가. 나아가 함께 사는 것'만'에 그치는 게 아니라 함께 '사랑' 한다는 것이 죽은 결혼이 아니라는 것... 저자는 그 포인트에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불륜에 대한 '윤리적 요소'를 차근차근 해체하여 급기야 생각을 파괴시켜 버린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따끔하게 반문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당신의 결혼 생활이 지금 진정으로 행복하다고 그렇게나 확실히 말할 수 있는가. 지극히 진실되다고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고 마니까. 적어도 위선을 떨지 않고 싶은 인간이라면. 대놓고 솔직한 악당보다 은밀하게 가려진 위선자가 원래 더 지독하게 사악한 법이니까. 




사랑이 끝나고 더 이상 헌신하는 마음도 없다면 진정한 결혼과 관련되는 윤리적 요소를 논할 수 없다. 당신의 결혼이 끝났다면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져 그 사랑이 이끄는 대로 행동하더라도 관련법의 조항과 관계없이 당신은 간통을 저지른 게 아니다. 윤리적 관점에서 당신은 관계가 멀어진 배우자에게 정조를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사랑의 유대 관계를 나누면서 지속적으로 헌신하는 사람에게 정조를 지켜야 한다.  


- 결혼하면 사랑일까, p. 37 결혼의 의미 -  



Vilhelm Hammershøi. In the Bedroom, 1896. 



물리적인 횟수를 따지자면 6개월도 채 되지 않아 우리는 결혼했다. 서로 잘 몰라서, 그리고 공동체를 만들어 나간다는 기혼자들의 생활에 대해 막연히 '예상'만 하고 있었기에 감히 돌진할 수도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서로를 '그 당시' 에는 놓치고 싶지 않아 그렇게 '매듭' 짓고 싶어 하는 인간의 본성적 욕망의 결과였을지도 모를 일이고. 그의 온화함이 그녀의 불안한 어리숙함을 채워줄 수 있을 것이라고. 반대로 그의 지루하고 퍽퍽하기만 한 생활에 그녀의 찰랑거리는 활기와 재기 발랄한 설렘과 명랑함이 더해져 삶은 그렇게 더 만족스러워질 것이라고. 어디까지나 독자적인 두 사람의 '예상' 은 그들의 확신으로 변한다. 우리의 '현재'는 '미래' 에도 변함없을 것이라고. 



그이와 내가 착각했던 포인트는 어쩌면 거기에 있었던 것일지 모른다. 변수를 생각하지 못한 채로. 나로서는 '아이'라든지 '양육'이라는 변수가, 그에게는 '필수' 적으로 필요했던 그 '4인 가족'이라는 환경설정이. 그 변수를 지키기 위해 특히 한 사람의 심신을 지겹게 마비시키켜 절망과 환멸을 반복하게 되다 보니 결국 있던 사랑을 없애버린다든가 어긋나게 변화시킨다는 것을, 아마 그이는 잘 몰랐기에, 나도 감히 거기까지는 예상할 수조차 없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고 만다. 그 '결혼'이라는 것을. 마치 한 사람을 향한 사랑의 결과론적 명분을 찾듯이. 배타적 독점관계를 바라게 되는 인간의 슬픔은 서로를 어디까지 침범하고 어디까지 허용할 수 있을까...



- 아이들이 없었다면 내가 당신을 좀 더 사랑할 수 있었을 거 같아. 그러니 나는 부모 자격 상실...

- 무슨 소리심 

- 등가교환의 법칙. 아이들을 얻었으니 대신 우리는 서로를 포기하게 되고 마는 느낌이라는 헛소리심.  

- 또 시작하셨고만. 말꼬리가 늘어지신다. 힘드시면 매실주를 드시라. 

- 마실 수 없다. 마시면 더 속상해질 거야. 뭔가 아무튼 가끔 엄청 억울한데 속상해. 더위 타나 봐. 

- 그러니 드시라 

- 그러니 안 드신다. 더 더워질까 봐... 술은 그래서 안 돼... 



지난 주말, 오랜만에 그이에게 민망한 투정을 부려 보았다. 간접적으로 고백하는 마음에 대해서 그이는 반복되는 패턴에 익숙하다는 듯이 웃으면서 유머러스하게 맞장구를 쳐 주었다. 문득 결혼 10년 차의 편안함을 느끼고 말았고 아울러 일종의 깊은 안도를 느끼기도 했다. '아직' 우리 사이의 유머와 다정함과 친밀함과 어떤 온기가 이렇게 남아 있다는 것에 대해서. 서로 제법 편안한 상태가 되었다는 것. 이제는 서로의 불편함을 건드리지 않는 '돈독한 관계'가 되었다는 것. 그러나 한편 그 편안함이라든가 친밀함이라든가 돈독함이라고 하는 '가족' 으로서의 '부부'의 것들이, 그렇다고 '사랑'이라고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수많은 점들만 찍히는 상태에 조용히 머무르고 만다. 주고받는 대화 속 행간에 숨겨진 마음을 그는 좀처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다는 걸 이해 한다. 언제나 삶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이기에. 그 사적인 영역에 대해서는 가족이어도 완전히 이해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자신이 아니고서야. 사랑을 이루거나 잃거나 하거나 박탈할 자격도 오직 '자신' 에게 나오는 것이기에... 



많은 결혼 생활이 이런 조건 아래 유지된다. 이 조건에는 신체적 안정 잘 연출된 판에 박힌 애정, 사회적 지위, 재산, 자녀 및 자녀들의 간절한 소망에 대한 깊은 관심, 본질적으로 열정 없는 삶 등이 포함된다. 이런 삶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많지만 아마 애처롭다 는 말보다 더 어울리는 단어는 없을 것이다. p. 208 


아무리 아내로서 의무에 충실하고 어떤 잘못도 저지르지 않으며 가정을 꾸리는 데 요구되는 모든 능력이 완벽하더라도 아내의 마음속에 열정이 없으면 진정한 의미에서 볼 때 그녀는 남편이 없는 여자이다. 아니 적어도 남편 입장에서는 아내가 없는 셈이다. 마찬가지로 남편이 자기 안에 파묻혀 일에만 몰두하고 아내의 욕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며 아내의 허영심에 완전히 무감각하고 중요한 거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아내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재능을 당연시하며 마치 아내가 없는 것처럼 자기 일로 분주하다면 그는 명목상의 의미 말고는 남편으로서 의미가 없다. p. 264 



공간은 그래서 중요하다. 이야기와 사람이 채워져야 비로소 의미가 빛나는 '공간'이라. 



IRP와 보유주식의 수익률, 납부된 보험의 잔여 일시나 해지 시 예상 환급금의 꼼꼼한 현황 체크, 한 달의 소비 지출 투자의 상세적 항목과 기타 모든 자산 현황과 노후라든지 교육비 라든지와 같은 향후 예상되는 필요금액의 목표와 출처, 그 모든 것들이 촘촘히 기록된 가계부를 그이에게 보여주었을 때. 그는  '고마워 고생했어'라는 짧지만 확실하고도 명료한 멘트로 비교적 잘 관리되고 있는 건강한 가정경제의 관리자로서의 공로 치하와 마음을 건넨다. 나 또한 매 달 시기에 맞춰 월급을 이체하고 주말이면 아이들과 몸으로 놀아주며 약봉투와 물리치료를 달고 살기 시작한, 부쩍 몸의 고장남이 보이기 시작한 그에게, 도시락의 포스티잇에 '아프지 마 속상해 오늘도 좋은 하루'라는 문장을 적으며 사사로운 마음을 주고받는다. 이게 무엇이 나쁜가. 이게 무엇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리처드 테일러는 그 모든 것들이 '의미가 없다'라고 말했지만.... 나는 정말이지 괜한 약 오름에 약간의 반기를 들어버리고 말았다. 당신이 말하는 '죽은 결혼'에 심폐소생술을 시켜버릴 수 있는 '끈' 은 분명 있을 것이라고. 다름 아닌 한쪽이 끈질기게 놓치지 않으려는 쓸모없이 보이는 고뇌와 어떤 애씀과 애달픈 연정, 그럼에도 이어지는 두 사람의 서로를 향하는 생활적 연민, 거기에서 나오는 기적도 있지 않나요 라고. 그러나 한편 부끄럽지만 종국에 아무 말할 수 없게 되고도 마는 것은, 무리하게 애써 자신의 명분을 주장하고 마는 어린아이의 억지스러움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 것도 같았기 때문이다.



죽은 결혼이란 어떤 것일까. 간단하게 말하면 어느 한쪽 또는 양쪽 모두에게 더 이상 사랑이 남아 있지 않은 결혼이다. 이런 가정에 대해 다르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혼인 관계 당사자들이 겉으로 변함없는 생활을 하면서 모든 관습적인 기준을 확실하게 지키며 어디에서나 존중되는 가치를 지키는 것이 세상 사람에게 좋은 모습으로 비치는 경우도 있다. (중략) 그러나 이 모든 것과 관계없이 결혼한 당사자들 마음에 사랑이 가득하지 않다면 이 결혼생활은 이미 실패한 것이다.  p. 264 



The lady at the house. 오늘의 감자볶음도, 두부부침도, 아직 실패하지 않았어.



겉치레에 시시하고 밋밋하고 사실상 무의미한 문장의 주고받음이 연속되는 관계에서 사랑의 종말과 동시에 새로운 사랑이 탄생되는 게 인생의 역설로 보이지만, 말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진실이 있다면 이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사랑을 삶에서 가장 소중한 가치로 생각하며 사는 인간에게는, 그런 모순으로 가득 찬 인생을 사랑하지 않으려 해도 피할 도리가 없다고. 책과 글과 투게더 아이스크림과 향수와 음악과 맥주와 매실주와 아이들의 순정한 문장들과 그를 생각하며 흘리고 마는 눈물들과, 먼 바다를.... 사랑하고 마는 것처럼. 그것들이 설령 나로 하여금 등을 돌리며 사랑하지 않다 하더라도. 



'견딜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세상에서 그래도 우리를 견디게 하는 것은 예술' 뿐이라고 니체는 말했다지만 그 예술 중에 가장 큰 예술이 만약 '사랑'이라면, '결혼하면 사랑일까'라는 이 저자분께 나는 감히 묻고 싶었다. 우리가 가장 얻기 힘든 예술이, 그래서 가장 지속적으로 깊이 이해하고 다가가야 하는 부분이 바로 '결혼 이후의 사랑'이라는 것. 그것이 매듭으로 시작된 관계에서든, 길티 플레저처럼 피하지 못한 채 연결되고 마는 관계에서 피어나는 것이든. 사랑은 밥을 먹여주지 않지만, 밥을 만드는 생활을 견디게 만들어 주는 유일한 것을 우리는 기억하며 살아야 한다고. 



논리의 이해가 아니라 무턱대고 느껴지는 게 '사랑' 이니까. 

그리하여 혼신을 다해, 모든 힘을 다해, 우리는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결혼 한 이후에는 더더욱. 닫혀 있지 않으면 사랑은 '다시' 든 '새로' 든 그렇게 생기는 것일 테니까. 



William henry Margetson, On the Sands 1900. 그러니 모두 각자의 '바다' 가 필요한 법이다.  견디게 만드는 자신의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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