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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Jun 23. 2021

무지개는 용서할까

어떤 소원을...

당신은 생각이 너무 많다. 인간의 범주는 영원이나 영성 혹은 지성만이 아니다

우리는 태초부터 짐승이었다. 


- 조르주 바타유 - 




언젠가부터의 일상은 아이들의 일상에 맞춰 흐르기 시작했다. 철저하고도 적확하게. 아이의 안전과 건강, 그리고 그들의 생명권과 행복권을 보호하기 위한 일상은 긴장의 연속이다. 돌발적이고 예측하지 못하는 것들의 대응이 필요하니까. 잔병치레라든지 의도치 않게 다가오는 아이들의 성난 감정을 잘 다독이며 사랑으로 감싸야한다. 때때로 그들이 원하는 요구사항에 맞춰 순순히 움직이지만 그러면서도 동시에 세상을 살아가는 기준점이나 약속들에 대해서도 알려줘야 한다. 그래야먄 그들이 '사회적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기에. 또한 그렇지 않으면 서로 상처를 주고받기 일쑤이니까. 주어진 의무이자 책임은 내 몫이라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내 것이 아니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말면 거기서부터는 감정이 꼬여 버리기 시작하니 곤란한 것이다. 



어쩌다 그렇게 되어 버린 것인지라는 생각을 하다 보면 끝없는 상념으로 인해 고통스러워지곤 했었다. 사실 '했었다'라는 과거형이 아니라 자주 현재 진행형이기도 하며 아마 미래형이기도 할 테지만 조금씩 개선되는 점은 있다. 시간이 흘러감과 동시에 스스로도 어느 정도 체념과 포기의 미학을 펼칠 줄 알게 되었다는 것. 그리하여 누군가의 돌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어떤 아픔에서도 조금씩 마비되어 간다는 것. 스스로 마취를 할 수 있게 되었다고나 할까. 이것은 아프지 않고 이 아픔은 당연하다는, 어른스럽게 굴어야만 살아지는 어떤 의지는 가끔 개인적 인간에게는 비릿한 아픔으로 다가오곤 하지만. 



사랑은 맹목적이다. 주변에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게 되고 마는 게 사랑이라는 걸 아이들 덕분에 확실히 깨닫게 되고 말았다. 그들과 주고받는 사랑의 형태는 꽤나 그것에 가까우니까. 삶의 그 어떤 것도 결국 그들을 뛰어넘지 못하게 되고 만다. 간혹 그렇지 않고 싶다해도, 그럴 수가 없게 되는 것도 있다는 걸 아프게 알게 되었다. 정말이지 어떤 텍스트로도 절대 설명될 수 없을 정도의 '많은 것' 들을 배우게 되고 말게 되니까. 다만 문제는 이것이다. 능동태가 아니라 가끔 수동태라는 것. 스스로 '한다'가 아니라 어쩌다 그렇게 '된다'라는 것... 에너지의 최선이 원하는 방향이 가끔 변하게 되지만 관성처럼 되돌아가게 '되는' 것을 거역할 수는 없는 노릇인 것이다. 



Robert Doisneau, The kiss at city hall  (그러나 사실 사랑은 원래 그렇게 되고 마는 것이다. 어쩔 도리 없이 맹목적인 것.)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아도 그렇게 되고 마는 것들이 생겼다. 특히 '시간' 이 그렇다. 언제나 시간에 집착하고 마는 나는 그로 인해 피어나는 번뇌로 인해 자주 울고 만다. 가령 평일 저녁 7시부터는 도저히 내 시간이라 말할 수 없는 시간에 가깝지만 평일 오후 12시는 상상했던 사치를 부릴 수 있는 시간이 되기도 한다는 것. 마음만 먹는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시간에도 마음을 '제대로' 먹어야 할 수 있는 것들을 떠올리고 만다. 예컨대 잘 숙성된 포도주 몇 잔을 마시며 기어코 풀려버린 마음에 새어나가는 웃음을 감추지 못하게 되고 만다든지. 혹은 잘 구워진 차돌박이와 치즈를 밥 위에 올려놓아 입 속으로 넣고 말았을 때 눈물이 날 정도의 어떤 북받치는 감정이라든지. 



당연한 것인데도 마음이 무너질 때가 있다. 이중적인 인간에게는 너무 좋아서 마음이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당연한 것인데도, 그것이 당연하지가 않아서. 당연히 좋아야 하는데 당연히 좋아하면 안 될 것도 같아서. 삶은 그런 것일까. 누군가에게 지극히 쉽고 평범한 순간들이 누군가에게는 몹시도 얻기 힘든 것이라는 것. 시간은 물리적으로 공평하게 주어진다고 생각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런 시간에 만약 자율도를 생각하자면 절대 공평하다고 말할 수 없을지 모른다. 누군가의 인생에 맞춰서 흐르는 시간은, 다른 누군가에게는 절대 자비롭지 못한 법이다. 



언젠가부터는 중요한 일과나 약속이 있기 며칠 아니 몇 주 전부터 아이들의 비위를 열심히 맞춰주는 습관이 생겼다. 돌발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무사히 아무 일 없이 순순하게 예전처럼 일상이 흘러가 주기를. 그래서 아무것도 흐트러지지 않기를. 겨우 만든 '나의 시간'에 어긋나는 변수가 없기를. 부디. 제발... 이렇게 빌고도 마는 인간의 삶은 과연 진정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 그런 인간의 행복의 척도는 애초에 기준점이 다른 건 아닌지. 시작점이 있기나 한 것일까. 



살다보면 마냥 기다리게 되는 것들이 생긴다. 그런 것들은 보통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생기게 되고 만다. 



아이를 데리러 가는 길에는 언제나 도서관에 들른다. 빌린 책들을 반납하며 다시 대출을 하려 할 때, 서가에서 비교적 원하는 책들을 모두 찾게 되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런 날의 하원은 한결 발걸음이 가볍다. 오늘이 그랬다. 니체가 유일하게 결혼하고 싶어 했던, 당대 최고 지성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만인의 뮤즈였던 살로메. 그러나 그녀와 심신의 합일을 할 수 없던 니체가 그녀와 헤어지고 몇 주 만에 미친 듯이 썼다던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빌렸다. 창문을 바라보니 어느새 소나기가 시원하게 내리고 있었다. 비 오는 날의 도보라는 환경설정은 아이들을 케어해야 하는 인간에게는 몸에서부터 긴장을 할 수밖에 없게 되면서도 그래도 뭔가 위로를 받는 기분 덕에 걱정은 되지 않았다. 책과 내리는 비 덕분이었을까. 비는 이제 그런 것이 되어 버렸다. 마음껏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이 어떤 생기를 갈망하게 되고 마는 날. 무지개를 볼 수 있을까 잠시 생각했다. 만약 본다면 꼭 '어떤 소원'을 빌어야겠다고도 다짐해보면서... 



우산을 쓴 아이를 시종일관 지켜보면서 천천히 조심해서 집으로 돌아오던 길.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러 버렸다. 무지개였다. 시야에 무지개가 보였다. 보고 싶었던 무지개가 보였을 때 생각하고 말았다. 인간은 결국 보고 싶은 무언가와 마주하고 말았을 때 그렇게 탄성을 지르듯 마음의 빗장을 열어 경계를 허물게 되고 마는 것일까. 일상이라는 경계에서 이탈해서 나도 모르는 내가, 그러나 바라던 내가 되어 버리고도 마는 것. 



- 아...! 

- 엄마 왜?

- 저기 봐. 무지개! 무지개가 떴어. 우리 소원 빌자.

- 소원 빌면 이뤄져?

- 안 이루어져도 그냥 기다려보는 거야. 이뤄질 때까지. 기억하고 바라면 돼. 

- 엄마가 아이스크림을 바로 주게 해 주세요 

- 이뤄졌네. 축하해. 거봐. 가끔 이뤄지기도 한다니까...

- 엄마는 뭐 빌었어?

- 비밀이야. 알면 네가 슬퍼할 소원

- 아이스크림 안 줄 거지

- 그럴 리가. 



무지개- 



그럴 리가 없는 터무니없는 소원을 빌어버리고 말았다. 아이들이 알면 슬퍼할 소원이었다. 그들에게 마냥 나의 시간과 에너지와 일상을 모두 맞춰나가보고 있는, 언젠가는 그리워할 한 철에 불과한 시절이지만, 그 시절조차도 '나' 에게 맞춰진 어떤 욕심이 생겨버리고 말았던 건지 무지개를 보고 바로 떠오른 어떤 소원은 자꾸만 길티 플레저를 연상케 하고 말았다. 아이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지만 가끔 그 사랑의 궤도에서 확실하고 편안하게 이탈할 시간이 주어지기를. 그리고 마음껏 사랑받기를. 주고 주고 또 주는 데 지쳐버린 인간은 가소롭지만 그렇게 받기를 바라고 만다. 얻기 힘든 것을 사랑하게 된다는 말이 진실이라면, 부디 얻기 힘든 시간과 얻기 힘든 사랑을 열렬하게 얻을 수 있기를. 격렬하게 받을 수 있기를... 가당찮고 이뤄질 수 없을, 금기와도 같은 소원이 떠올랐던 건 왜였을까. 금기가 없다면 위반의 욕망도 없는 걸 알면서도.  



무지개는 용서할까. 부끄럽고 가소로운, 다소 생각 없이 본능적으로 빌고 말았던 어떤 소원을. 니체는 자기 자신을 극복하려면 우선 자신에게서 가장 경멸스러운 것이 무엇인지 물을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경멸할 줄 모르는 사람은 경멸스럽기 짝이 없다'라고,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사람만큼 부끄러운 것도 없다'는 그의 말이 사실 폐부를 찌르는 아픔과 동시에 어떤 커다란 위안이 되고 말았던 건, 그는 미칠 줄 아는 어떤 인간의 광기를 결코 부정적으로 보지 않은 것 같았기 때문일지 모른다. 우리는 때로는 미칠 줄 알아야 하니까... 얻기 힘든 희소한 낭만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다면.



무지개는 결국 사라지고 다시 기약 없는 기다림이 있을 테지만 

무지개는 그래서 더 소중한 것일지 모른다... 마냥 기다리게 될 만큼. 

나도 모르게 어떤 행운과 소원을 빌어버린 만큼. 그만큼. 




지나간 시간은 흘려야 하지만, 가끔 좋은 순간은 그만큼 갇혀버린다. 기다림이 큰 만큼, 좋았던 만큼.. 




#1분 1초는 그래서 소중하다...매 순간은 무지개와 같다. 영원하지 않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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