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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리 Nov 21. 2023

남겨진 인숙을 찾아서

김승옥 소설 무진기행(1964)에서, ‘남자’는 일주일쯤 쉬고자 고향 무진으로 향했다가 초등학교 교사 인숙을 만나서 짧은 사랑에 빠진다. 둘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다. ‘남자’는 가정이 있고, 처가의 도움으로 출세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숙은 ‘남자’에게 말한다. 부디 서울로 데려가 달라고. ‘남자’는 그러겠다고 한다. 하지만 빨리 올라오라는 아내의 전보를 받고 서울로 향하면서 ‘남자’는 인숙에게 편지를 남긴다. 사랑한다고. 다시 데리러 오겠다고. 그리고 그 편지를 찢어버린다. 지킬 수 없는 약속이길 알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아내가 보낸 ‘전보’를 바라보면서 '남자'는 이렇게 중얼거린다. (무진기행의 최고 명문장으로 꼽히는 바로 그 문장)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이 무진을, 안개를, 외롭게 미쳐가는 것을, 유행가를, 술집 여자의 자살을, 배반을, 무책임을 긍정하기로 하자. 마지막으로 한번만이다. 꼭 한번만. 그리고 내게 주어진 한정된 책임 속에서만 살기로 약속한다. 전보여, 새끼손가락을 내밀어라. 나는 내 새끼손가락을 걸어 약속한다. 우리는 약속했다.”

이렇게 ‘남자’는 죄책감 없이 서울로 올라와버리지만, 무진(순천만)에는 인숙이 남아있는 것이다. 그녀의 눈물과 기다림, 끝없이 공허한 한숨. 그리고 또 한숨.

그리하여 무진기행을 읽고 가는 순천만은 언제나 쓸쓸하다. 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푸른 바다와도 제주의 억새와도 비할 수 없이, 끝도 없이 펼쳐진 순천만의 갈대는 눈이 시리게 찬란하고 그만큼 서럽다. 그 늪을 겨우 헤쳐나와 땀을 흘려 작은 동산인 용산을 올라가서 순천만의 낙조를 내려다볼 때엔, 뭉크의 절규처럼 아찔해진다.  

하여 나는 다시는 혼자 순천만에 오지 않기로 굳게 약속했고 수 년 만에 그 약속을 지켰다. 뜻이 맞은 독서모임 사람들과 무진기행을 읽고 함께 무진을 향한 것이다.

누군가는 무진기행을 20대 때 읽고 20여년 만에 다시 읽는데, 책을 펼치는 순간 그 유려한 문장들이 통째로 떠올라서 울었다고 고백했다. 우리는 저마다의 ‘남자’가 되어 남겨진 인숙을 만나러 다시 무진으로 향했다. 긴 말은 하지 않았지만 저마다의 ‘인숙’이 누구인지 무엇인지 감히 짐작할 수 있었다.

순천만을 장악한 수 천 마리의 두루미떼가 끼익끼익 울어대는 울음소리와 푸드득 푸드득 날라가는 소리가 기괴하기 짝이 없었지만,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서 견디어낼 수 있었다. (정말 혼자가 아닐까? 비록 내일이면 다시 혼자일 지라도. 적어도 이 순간은)

우리는 비현실적으로 노을지는 순천만을 배경으로 비현실적인 사진을 찍었다. 누군가는 결핍이 사라진 얼굴로, 누군가는 감기를 숨긴, 누군가는 여섯 자매 중 막내가 지어야 하는 표정을 숨기고, 누군가는 어깨에 올려진 장녀의 무게를 숨긴 채로, 누군가는 아침의 교통사고로 인한 그림자를 얼굴에서 채 지우지 못한 채로.

용산에서 내려오는데, 채 저녁 여섯 시가 되기 전에 순천만의 사위는 극장의 암전처럼 깜깜해졌다. 우리는 서로를 분간하지 못했다.

순간
갈대들이, 수 천 수 만의 갈대들이, 보이지 않으나 분명히 존재하는, 무섭게 존재하는 거센 바람에 흔들리며 부딪치며 서걱 서걱대며 서럽게 울어댔다.







인숙의 통곡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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