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다른 사람에게 좀처럼 책을 빌려주지 않는다. 그건 다른 사람에게 일기장을 빌려주는 것과 똑같은 행위이기 때문이다. 책을 읽다보면 그날 그날 내게 있었던 일이, 느꼈던 감정이 매직아이처럼 문장으로 도드라져 올라온다. 그러면 만년필로 그 문장에 곱게 줄만 그으면 된다. 때로 연관되어 쓰고싶은 말이 있으면 밑줄 옆에 휘갈기면 된다. 그리고 그 옆에 그 날 날짜를 적으면 영락없는 일기가 된다.
심리학 용어로 낙인 효과라고 한다지. 거리의 차들을 봐도 유난히 관심있는 차종만 눈에 들어오는거. 그러니 읽으며 밑줄치는 행위는 오늘의 내 맘 상태를 표현하는 너무나 쉽고 간단하며 정확한 일기다.
또 그 책을 읽는 동안 갔던 영화관의 영화표나 연극티켓, 전시회 책자, 특별한 이와 먹었던 음식 영수증을 책갈피로 사용하다가 책에 꽂아 영구보관한다. (최근에 박수근 관련 책을 두어권 읽었는데, 한 권엔 양구 박수근 미술관 티켓을, 다른 한 권엔 함께 간 사람이 선물한 그림 엽서를 꽂아두었다)
따라서 내 책장에 책을 꽂는 순서는 가나다 순도 아니고, 한국 문학 해외 문학 등의 국가별도, 장르별도, 책 색깔 별도 아니고 책을 읽은 순서대로이다. 그래야 책장 전체가 커다란 일기장이 되고, 내 삶의 연대기가 되니까.
간혹 과거의 책을 다시 꺼내어 읽을 때엔 무척이나 설렌다. 밑줄로 메모로 잉크자국으로 눈물방울로 생생하게 냉장 보관된 그때의 순간과 감정들을, 갑자기 다시 만나게되니까. 그것들을 읽는 동안은 나는 여러 생을 동시에 사는 것 같다. 그 책 속 안에서 나는, 지금의 나보단 조금 덜 비겁한 채로, 조금 더 엉뚱한 채로, 조금 더 솔직하고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