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부터 '미'에 관심이 많은 나였다. 자연스레 화장품에 관심이 많아졌다. 화장품이 많아질수록 텔레비전 속 예쁜 주인공 언니들처럼 멋진 화장대가 갖고 싶었다. 하지만 부모님께서는 어린 나이에 무슨 화장대냐며 화장대를 사주지 않으셨다.
"화장 안 해도 예쁜 나이다."
"화장은 커서 해도 늦지 않다."
그 당시에 어른들의 말씀은 나에게 화장품과 화장대의 로망을 더 키워줄뿐이었다. 사춘기가 되고 더욱 '미'에 관심이 많아지면서 학생의 신분인 나는 저렴한 화장품들을 사모으기 시작했다.친구들과 시내로 쇼핑을 가면 화장품 구경을 하고, 모아 둔 용돈으로 하나씩 사서모았다. 모두 다 사용하지는 않지만, 책상 서랍 안의 가지런히 놓여있는 틴트들을 보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여자라면 '같은 하늘 아래 똑같은 색깔의 립스틱은 없다.'라는 얘기에 공감할 것이다. 같은 하늘 아래 똑같은 화장품은 없다고 믿던 시절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화장품은 많았는데,끝끝내 화장대는 없었다.이렇게 나만의 화장대를 갖는 게 로망이었던 시절이내 욕망과 함께커가고 있었다.
내 첫 화장대는 결혼할 때 혼수로 고른 아담하지만 화장품이 많이들어가는 화장대였다. 정면으로 보면 거울이지만 거울을 양쪽으로 열고 닫을 수 있어 그 안에 수납을 할 수 있는 구조로 꽤 많은 화장품들이 들어갔다. 그리고 거울 양 옆으로 칸막이가 있어서 화장품들을 보관하기에 효율적인 화장대였다. 화장품 욕심이 많은 나에게 딱인 화장대였다.신혼 초 1년까지만 해도 화장을 할 때면 곧잘 화장대에 잘 앉아서 화장도 하고 머리도 했다. 화장대는 언제나 화장품들로 꽉 차 있었다. 드디어 내 로망을 이룬것이다.
하지만,
내 로망이었던 화장대는 2년이 채 안되어 홀대받았다. 화장대에 앉아서 화장을 하는데 익숙지 않아서인지 어느 날부터인가 거울 앞에 서서 재빠르게 화장하는 게 편했고, 아이가 생기고나서부터 화장대는 먼지가 쌓여갔다. 화장대는 화장을 하는 공간이라기보다 그저 부피가 큰 화장품 보관함이 되어있었다. 아이가 점점 커가고 걷기 시작할 때쯤 화장대는 애물단지가 되었다. 한 번은 아이가 호기심이 발동해 화장대 서랍을 열고 닫다가 손이 낀 적도 있고, 화장대 모서리에 얼굴을 긁힌 적도 있었다. 아이가 서랍을 못 열게 하기 위해 서랍 안 화장품들을 다 꺼내고 안전장치를 해놓기도 했었다. 모서리에는 모서리 방지 스티커도 붙였다. 우리 집에서화장대는 더 이상 화장대의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당시 우리 집은 점차 아이에게 맞춰 변하고 있었다. 위험한 물건들은 아이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보관하고 항상 집이 더럽지 않도록 청결을 유지했다. 그렇게 의도치 않던 미니멀 라이프가 아이 덕분에 빠르게 진행될 수 있었다.
나는 고민 끝에 화장대를 비웠다. 덕분에 화장품도 줄었다. 내 맘에 쏙 드는 화장품은 몇 개씩 쟁여놓는 버릇이 있는데 그 버릇도 버렸다. 화장대는 화장품을 비우고 깨끗하게 닦아지역 중고장터에 올렸는데, 생각보다 상태가 좋아서 바로 팔렸다. 그렇게 내 로망이었던 화장대는 나와 약 2년을 함께하고 좋은 추억과기억을 남긴 채 미련 없이 떠났다.
그리고 화장대를 비우고 난 공간은 나에게 새로운 기쁨을 주었다. 화장대가 있던 안방 공간은 꽤 넓어졌고, 화장대 위의 먼지를 청소할 필요도 없다.
지금은 화장대 없이 지낸 지 3년 차다. 내 화장품은 이제 열 손가락으로 셀 수 있는 만큼 있다. 예전의 나라면 상상할 수도 없는 화장품의 갯수였을 것이다. 쟁여놓지도 않고, 예전처럼 충동적으로 립스틱을 사지도 않는다. 로션은 다쓰면 다시 사고, 광고에 현혹되는 일도 줄었다. 화장대가 없고, 화장품을 보관할 곳이 없어지니 가능한 일이었다.
화장품은 바구니 하나에 남편 화장품과 함께 보관한다.화장은 거울 앞으로 바구니를 가져와서 앉아서 한다. 남편도 그렇게 하고 있다. 우리는 화장대가 없어도 큰 불편함을 못 느꼈으며, 앞으로도 우리 집에 화장대를 다시 들일 일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