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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ven헤븐 Sep 15. 2023

아이가 아플 땐 닭죽이지

평생을 그렇게나 골골대고 저질체력인 나와는 달리, 다행히 아이는 넘어지고 까져서 아픈 것 외에는 건강하다.

집에 그 흔한 소화제나 두통약도 없다. 손쉽게 신선한 약을 구매할 수 있기도 하지만, 아이가 좀 아픈 것 같아도 한숨 자면 금방 낫기 때문이다.


아이가 초등학교 4학년 때쯤인가, 잘 놀다가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한다.


"엄마, 배가 아프다는 건 어떤 느낌이야?"


배 아픈 데에는 나름 전문가이므로 증상별, 부위별로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아이가 귀 기울여 듣더니 이렇게 말한다.


"나 그러면 체했나 봐."


헉.

당황스럽다.


골골 100세라는 말이 있다.

아마도 평소 자신의 몸이 제 기능을 못하니 자세히 관찰하고 관리를 잘해주기 때문에 오래 산다는 의미인 것 같다.

그래서 평소 건강하다고 과신하면 안 되는데, 과신했다.

밤에 아이가 생전 처음 체한 것 같다고 말을 하니 이 밤에 문을 연 약국이 없고(이 외국 시골 동네에는 모든 상점이 오후 5시쯤이면 문을 닫는다), 비상약 상자에는 빨간약과 후시딘, 반창고가 박스채로 있을 뿐이었다.


급한 대로 민간요법(그렇다. 엄지 손가락을 땄다.)을 실행했고, 콩콩 뛰게도 했고, 엄마손은 약손도 했다.

갑자기 바보, 멍청이 엄마가 된 기분이었다.


다행히 아이는 생전 처음 느껴본 신기한 '경험'을 하고 잘 잤다.


그로부터 수년이 지난 며칠 전, '먹을 때가 가장 행복하기 때문에 열심히 운동한다'는 아이가 또 배가 아프단다.

이번엔 그 좋아하는 햄버거를 상상만 해도 속이 안 좋다는 것이다.

이건 정말 엄청난 사건이다!

아이가 백신을 맞아 몸이 안 좋기도 했지만, 이번에도 역시 건강을 과신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더니.

아무튼 속이 안좋다며 닭죽이 먹고 싶단다.


햄버거를 마다한 아이가 닭죽이 먹고 싶다면 닭을 잡아와서라도 끓여줘야지.

마트로 향한다.

실한 놈으로 한 마리 사 온다. 외국 마트에는 백숙용 한방재료 키트가 없기 때문에 한인마트도 따로 다녀온다.

간 김에 대추와 대파, 통마늘도 사 온다.

한 번 펄펄 끓는 물에 데치듯 불순물을 씻어내고, 본격적으로 모든 재료를 넣어 푹 고아낸다.


다 익은 닭은 내 손에 의해 처참히 뜯긴다.

발골을 너무 좋아해서 요리 배울 때 반에서 닭 발골 1등을 했던 TMI를 해본다.

잘 발라낸 살코기는 가슴살과 날개살, 다리살, 껍질로 대략 나누어 통에 담는다.

혹시나 속이 안 좋은데 기름기가 많은 부위를 넣으면 더 안 좋아질까 봐서이다,라고 쓰고 맛있는 부분은 내가 먹기 위해서가 진짜 속마음이긴 하다.


이제 잘 불린 쌀을 참기름 조금 넣고 투명해질 때까지 다글다글 볶아준다.

어느 정도 쌀이 익었을 때쯤 닭 육수를 쌀의 두 배 이상 부어 가끔 저으며 끓여준다.

다져놓은 당근, 호박, 감자를 넣어준다.

농도를 보아 죽 같아지면 조금 뜸을 들인 뒤 참깨와 소금을 뿌려 마무리한다.


다행히 아이가 맛있다며 한 그릇을 뚝딱 먹는다.

이번엔 삼일 내내 닭죽만 먹었다.


일상생활에는 큰 지장이 없었지만 하룻밤에 에너자이저로 돌아오던 아이가 삼일이나 죽만 먹고 싶다니까 내심 걱정이 되었다.


"속 좀 어때?"

"어, 이제 많이 좋아졌어. 그렇게 극진한 보살핌을 받았는데 어떻게 안 나을 수 있겠어."


헉.

'극진한 보살핌'이라니 너무 웃겨서 깔깔대고 웃었다.

아이는 자신이 잘못된 단어를 말했나 싶어 어리둥절해한다.


다행이다.

다 큰 너에게 이 어미가 해줄 수 있는 건 아플 때 끓여줄 수 있는 '닭죽'과 '극진한 보살핌'이다.

욕심이겠지만 늘 건강하길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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