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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단비 Nov 27. 2022

운동화 제대로 신기를 포기하다.

엄마 성장기

어느벌써 1년, 아기는 돌쟁이가 되었다.

돌쟁이 아기를 기르는 동안 우리 부부는 삶의 많은 변화들을 겪고 있는 중이다.

처음 마주하는 상황들을 받아들이고 적응하기까지는 참 고되지 않을 수 없었다.


아기가 없는 일상이었다면 쉬는 날엔 원 없이 자는 일상을 살고 있었을 것이고, 외식은 숯불고기로, 드라마는 정주행, 화장은 풀메이크업을 하고 세상에 하나뿐인 주인공이 되어 계절마다 인생 샷을 찍는 여행을 즐겼을 것이다.

! 작년까지만 해도 이런 삶이 일상이었건만 몇 년을 흘려보내야 다시금 이 삶을 찾을 수 있을지 눈앞이 캄캄하기만 하다.


생후 백일 동안은 새벽마다 배앓이를 하는 아기를 달래느라 잠을 잔 건지 안 잔 건지 모를 만큼 좀비모드로 백일을 살았더랬다.

산후풍인지 온 몸의 관절은 아파오고 귀에서는 심장의 맥박소리가 들리는 이명이 생겼

아기를 낳을 때 쨌던 상처는 여전히 아려온다.

백일만 지나면 아기가 통잠을 자기 시작한다고 하던데, 우리 아가는 계속해서 앵~하고 울며 뒤척이는데 이번에는 성장통인지, 이앓이인지 알 수 없지만 밤중 수유까지 챙기느라 나야말로 도대체 언제쯤 통잠을 잘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그리고 다음 달 복직으로 인해 드디어 아기를 어린이집에 맡기는 삶이 시작되었다.

첫 주엔 오전 10시부터 12시, 그다음 주엔 10시부터 2시까지 어린이집 적응기 동안,

나의 자유시간도 2시간 그 이후엔 4시간도 생기다니!!

아기가 잘 적응할 수 있을까 싶은 염려도 있지만, 그보다는 매일 주어지는 나의 자유시간에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설레기만 한다.

하지만 그 설렘도 잠시뿐,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하면 1년 내내 감기, 장염, 수족구로 돌아가며 아프다고 하던데 1년 동안 감기 한번 걸리지 않았던 아기가 첫 주를 보내고 오더니 기어코 코에서 콧물이 줄줄 흐른다. 코감기라 우습게 봤지만 1주일, 2주일, 3주일이 지나도 차도가 없자, 슬슬 어린이집 감기는 스케일이 다른 감기 바이러스임을 깨닫게 다.


 4주 차가 되어 드디어 코가 마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같은 반 친구가 일주일째 오지를 않는다. 여행이 아니라면 뭔가 크게 아픈 게 분명한데 서서히 불길한 예감이 든다. 그리고 드디어 우리 아기에게도 무시무시한 열감기가 시작되고야 말았다.

그래도 4개월 신생아 때 코로나를 겪어서인지 다행히도 이번에는 그저  감기가 찾아온 모양이다.

전염병이 아닌 이상 감기 정도는 약과 함께 아기를 어린이집에 보낼 수 있지만,  한 몸 편하자고 열이 나는 아가를 어린이집에 보낼 수는 없었다.  

아픈 아가와 함께 치열한 일주일을 보내고 열이 내릴 즈음이었다.


 콧물이 마르고 기침과 가래가 나오면 머지않아 감기가 나을 거라 했는데 문제는 돌아기는 스스로 가래를 뱉지 못한다는 것이다.

혹여나 분유를 먹을 때 가래가 나오게 되면 숨 쉴 구멍이 사라져 여지없이 분수토를 해댔다.


감기가 시작된 지 5주 차, 여전히 가래 낀 숨소리에 깊은 잠을 못 자는 아가가 안쓰러워 큰 병원으로 향했다.

아기도 나도 만신창이가 된 채 료를 받고 입원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폐의 상태를 보려고 생애 첫 엑스레이를 찍게 되었다.

아기를 안고 두 팔을 올려 붙잡은 채 엑스레이를 찍는 순간 모니터에 아기의 갈비뼈가 보였다. 

순간 아기의 엑스레이 사진이 너무나 귀여운 게 아닌가!! 아기의 팔을 억지로 붙들며 엑스레이를 찍어대느라 아기는 괴성을 지르며 울고 있지만 나는 우리 아기의 귀여운 엑스레이 갈비뼈 사진 한 장에 웃음이 나더니 또다시 기운이 난다!

우리 아기가 이제 돌 지난 형아가 되었구나!

귀여운 아기 엑스레이 사진 한 장에 고갈된 에너지가 재충전이 되다니! 정말 신기한 일이다.


한바탕 진료 전쟁을 마치고 입원 치료까지는 필요하지 않다고 해서 다행히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아기는 고단했던지 내 품에 기대어 곤히 잠이 들었다. 그리고 나도 이제한숨을 돌리며 찬찬히 나를 둘러본다.

오늘 세수를 했던가? 양치는 했었나? 속옷은 갈아입었던가? 머리는 또 왜 이렇게 산발인 것일까!


출산을 하고 나서 남편은 예쁘고 편한 운동화를 선물해주었다. 너무 맘에 드는 운동화였는데 운동화 뒷굽이 주름이 가 있는 걸 보니 그동안 손가락을 넣어 잘 펴서 제대로 신었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두 손으로 아기를 안고 오직 발로만 운동화를 신어야 하는 치열한 일상을 살다 보니 어느새 각 잡힌 예쁜 운동화는 사라져 버리고 운동화는 해지고 얼룩 투성이다.

엊그제 직장 선배와 아가들을 데리고 아쿠아리움을 다녀오는 길에 선배가 말했다. 

"혜영아, 운동화 제대로 신어!!." 그제야 운동화를 보니 운동화 끈 사이로 발등이 보이는데, 난 이제껏 내가 운동화를 제대로 신고 있다고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단 5초! 아기를 바닥에 잠시 내려놓고 운동화를 잘 신을 수 있는 5초면 될 일상을 그동안 나는 포기하고 살아가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 5초의 시간 동안 아기는 현관 앞에 있는 단비의 배변판 위에 앉아 놀거나 단비의 물그릇을 엎을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운동화를 제대로 신을 수 있는 5초뿐만 아니다.

선크림과 비비크림을 제대로 바를 수 있는 2분, 눈 화장 2분, 헤어 드라이 5분, 앉아서 제대로 밥을 먹는 시간 10분, 세탁기에서 옷을 차곡히 꺼내 건조기로 이동시키는 몇 분, 편안하게 화장실을 다녀올 수 있는 단 몇 분... 이 모든 걸 누리기로 작정한다면 너무 큰 욕심일 게다.

우유병 하나를 제대로 씻는 그 순간에도 아기는 코알라처럼 내 다리를 붙들며 안아달라고 떼를 쓰고 있으니 말이다.


아기를 울릴 것인가! 달랠 것인가! 를 선택해야만 하는 순간순간마다 나는 또 나의 몇 초들을 포기하고 기어코 아기를 안아주고야 만다.


그래, 아가.. 엄마 운동화는 해지고 구겨져도 괜찮아. 엄마가 곁에서 응원해줄 테니 아프지 않고 잘 크면 엄마는 바랄 게 없단다.


누군가를 위해 나의 작고 사소한 부분들을 기꺼이 포기하고 살아갈 수 있는 현실이 새삼 너무나 대견하게 느껴진다. 나름대로 손익을 어 보고 계산하며 살아오던 내가, 나의 삶을 통째로 아기에게 내어주는 삶을 살아보니 조금은 더 큰 사람이 된 듯도 싶다.


아가, 엄마는 운동화를 제대로 신지 않아도 괜찮아. 엄마를 위한 시간들이 다 채워지지 않아도 상관없어.  사소한 시간들이 차곡히 모이고 모여서 우리 아가에게 엄마의 사랑이 조금이라도 더 가득 채워지길 바랄 뿐이야.  


_봄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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