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를 보지 않는 사람들, 이 영화를 봐야한다고 외치는 사람들
공교롭게도 나는 두 영화를 모두 심야에 보았다. 개봉하는 날에 맞춰 보겠다는 고집을 부리다보니 퇴근 후에 볼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평론가나 시사회 평이 워낙 좋았고, 믿을만한 감독들이라고 생각했기에 영화의 질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았다. 걱정된 것은 내 체력이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블레이드 러너 2049>에서 약간의 위기를 겪긴 했지만 나는 두 영화를 아주 즐겁게 보았다. 영화가 끝난 새벽에 집까지 걸어오면서 혼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기가 참 좋은 영화들이었다.
그런데 그 첫날의 즐거움이 무색하게, 두 영화는 모두 흥행에 실패했다. 작품성 있다고 인정받은 영화가 흥행에 실패하는 것은 사실 흔히 있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그 이후다. 두 영화가 특별했던 것은, ‘다시 찍어도 아마 이렇게 찍을 것이다’라고 덤덤하게 말한 감독들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이 영화만은 망해서는 안된다’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스노비즘을 혐오한다. 스노비즘은 다양하게 규정될 수 있다. 긍정적으로 해석할 여지도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일단 내 머릿속의 스노비즘은 현학적이고, 위선적이고, 선민적인 것이다. 더 간단히 판단할 수도 있다. 스노비즘이란 문장(혹은 말)을 길게, 어렵게 엮는 것이다ㅡ<왓챠>는 글자수를 제한할 때가 훨씬 더 좋았다ㅡ. 그래서 나는 문장을 짧게 쓰려고 노력하고, 정말 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면 영화 이야기를 길게 하지 않으려 애쓴다. 남들과 조금 다르게 영화를 보는 것 같고, 사실 다르게 보려고 노력하지만, 그게 더 맞는 방식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남들보다 더 좋은 영화를 본다고 믿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이번만큼은 동조하게 된다. 나는 <블레이드러너 2049>와 <남한산성>이 망해서는 안되는 영화였다고 굳게 믿는다. 이 영화들이 2차 시장에서 돈을 많이많이 벌어서, 어찌됐든 손익분기점은 넘기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 영화들의 성공 여부가 할리우드와 충무로의 앞으로의 판도를 결정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기 때문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이나 리들리 스콧, 한국의 봉준호 같은 거대한 감독들을 제외하면, 언젠가부터 ‘좋은 영화’에서 ‘돈을 덜 쓴 영화’가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커지지 않나 생각한다. 그간 봐온 영화들을 돌이켜봐도, 정말 큰 감동을 받은 영화들은 돈보다는 노력을 많이 쓴 영화들이다. <위플래시>는 <라라랜드> 제작비의 10분의 1밖에 쓰지 않았지만, 나는 <위플래시>가 영화적으로는 더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보이후드>도, <문라이트>도 그렇다.
<블레이드러너 2049>가 내게 소중한 것은 그런 감정의 파도나 카타르시스 외에, 감독이 무한한 역량으로 창조해낸 ‘세계’ 그 자체가 감동적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일깨워줬기 때문이다. <남한산성>이 내게 소중한 것은 집요하고 세심한 고증과 절제된 연출로 만들어낸 사극이 얼마나 우아한지 일깨워줬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계를 만들고 세심한 고증을 하려면 돈이 든다. ‘작품성 있는 영화’와 ‘블록버스터’가 언젠가부터 완전히 다른 용어로 쓰인다는 것은, 생각보다 섬짓한 일이다. 세상엔 천재들이 많고, 그들에겐 돈이 필요하다.
통닭집은 동네 골목마다 있는데 백숙집은 찾기 힘들다. 통닭은 왠만하면 기본적으로 맛있다. 국뽕, 신파, 자극적인 묘사가 들어간 영화는 기본적으로 돈값은 한다고 느끼게 된다. 백숙을 맛있게 하는 집을 찾기는 그냥 백숙집 찾기보다도 몇배는 더 힘들다. 검증된 클리셰 없이 사람을 감동시키는 영화를 만드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욕심이요 오지랖일지도 모르겠지만, 백숙의 담백한 맛을, 오래 끓여내는 노력과 진지함을 좋아하는 사람이 더 많아졌으면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