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토 공항 터미널 구석 벤치에 앉아 썼던 글.
에콰도르 수도 키토의 공항은 지어진지 얼마 되지 않은 새 공항이다. 키토 시내에서 새 공항으로 가는 공항셔틀버스 터미널은 예전 구공항 부지에 위치하고 있다.
키토를 떠나는 날, 버스 터미널은 조용했다. 구공항부지는 아직 개발이 채 시작되지 않았다. 활주로 위에 비행기들이 가득했을 거대한 땅은 조명하나 없이 광막하게 널브러져 있고 오직 버스 터미널로 쓰이는 작은 탑승동 하나만이 그 어둠 속에서 홀로 빛났다. 수도다운 활기로 가득했던 키토에서의 일정이 왠지 먼 일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조용함이었다.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몇명 되지 않았다. 유니폼을 차려입은 것으로 보아 공항 직원들인 듯 했다. 어느 도시를 가나 여행자를 쉽게 볼 수 있는 남미였는데,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리는 그 곳에 큰 배낭을 둘러멘 사람은 나뿐이다. 왠지모를 적막감이 더욱 짙어졌다.
따지고 보면 긴 여행이었다. 미국에서의 생활을 여행이라고 할 수는 없을거다. 약간의 익숙함이 고개를 들고 현재를 물들이기 시작하는 순간, 낯섬과 설렘은 끝나고 무덤덤한 일상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미국에서의 생활들을 긴 여행이라고 생각하기엔 생활인으로서 하루하루를 '살았던' 날들이 너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으로의 긴 비행을 앞둔 지금, 나는 한달 반짜리가 아닌 일년 짜리의 아쉬움과 피로와 허탈함과 걱정을 느낀다.
한국으로 돌아갈 마음의 준비가 되었냐고 묻는다면 대답할 말이 쉬이 떠오르지 않는다. 여행의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하루에서 여러번씩, 다가오는 귀국을 대하는 내 자신의 태도와 기분이 달라졌다. 가고싶었다가, 다시 가기 싫었다가, 또 가고싶었다가. 인생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땅이다. 한줌 밖에 안되지만 그래도 힘겹게 쌓아올린 것들이 있는 곳이다. 내가, 나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다. 그렇기에 돌아가는 것 또한 자연스럽고 설레는 일이기만 했으면 싶지만, 돌아가면 또다시 새롭게 준비하고 시작해야한다는ㅡ그리고 조금 늦은만큼 더 잘해야 한다는ㅡ부담감이 생각보다 크게 느껴질 때가 있다.
미국으로 떠나올 때 기분이 어땠더라? 남미여행을 시작할 때는 기분이 어땠지? 새로운 시작은 항상 설레고 그 설렘은 가치있다. 그리고 그러면서 내가 보고 듣고 느낀 모든 것들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변화시켰음이 분명하다. 불과 몇년전에는 감히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내 능력을 벗어나는 커다란 일들에 긴장에 떨리는 손을 가져다대면서 나는 그래도 많이 봐줄만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아직도, 인생의 변곡점들을 대할때, 설렘보다는 불안이 더 크다.
불안은 변화를 실감하지 못하는데서 온다. 내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고 이 변화를 지속할 힘이 나에게 있다고 믿지 못하는데에서. 그렇다면 변화는 언제 실감되는가. 변화의 과정이 끝나고, 다시 삶의 루틴이 시작될 때 그것을 실감한다. 시간 낭비, 혹은 헛수고가 아니었던가 싶었던 시간들조차도 뒤돌아보면 그 나름의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좋아하는 소설가의 인터뷰에 이런 말이 있었다. 자신은 워드프로세서의 하얀 바탕에 홀로 깜빡이는 커서마크만큼 무서운게 없다고. 인생이 책이라면 아직 내 책은 기승전결의 승까지도 오지 못한 것 같다. 독자가 아니라 작가로서, 나는 아직도 써내려가야할 수많은 페이지와 그 공백의 흰 빛에 부담을 느낀다. 그럴 땐 어떻게 하시나요, 라는 기자의 질문에 소설가는 말했다. 그냥 제가 만든 등장인물들을 믿어주면서 그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기록한다는 마음으로 써내려갑니다. 나는 이제 돌아갈 한국에서의 나를 조금 더 믿고 기대해보기로 한다.
그리고 2년여가 지났다. 나는 여전히 애쓰며 살고 있다. 그 때의 믿음과 기대만 조금 빛이 바랜 느낌이다. 서른이 지났다. 나를 조금 더 믿고 기대해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