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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닮다.

평생 나는 아버지와 다르다고 생각했었다.

by OHNUS


철들고 나서부터는 아버지와 공통점이 거의 없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아버지는 굉장히 담백하신 분이시다. 남들 눈에 어떻게 보이는지, 어떻게하면 좀더 ‘나아’ 보일 수 있는지 끊임없이 전전긍긍하다가, 이내 그 초조함을 감추려 허세를 부려 내 자신을 둘러치곤 하는 나로서는 아버지의 그 진한 담백함이 부러울 때도 많았다. 아버지는 본인이 좋고 편한게 가장 우선이신 분이고, 그에 대한 남들의 평가 따위는 필요없으신 분이다.


아버지는 또한 굉장히 이성적인 분이시다. 그것을 가장 강하게 느낄 때는, 감성적인걸 좋아하는 어머니와 아버지와 함께 영화를 볼때다. 아버지는 영화의 기본 설정에 공감하지 못하시면 그 영화 자체를 즐기지 못하시곤 한다. 일테면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는’ 설정의 무모함이나, <뷰티 인사이드>에서 ‘자고 일어나면 얼굴이 바뀌는’ 남자의 황당함에 대해 영화 초반에 납득하지 못하시면, 영화가 끝날 때까지 그 영화에 대해서 아주 약간의 공감이나 재미도 느끼지 못하시는 것이다. 컨텐츠를 즐김에 있어 아버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이 ‘합리적인가’, ‘설명이 가능한가’의 여부다. 쉽게 감동하고 쉽게 공감하는 나에게, 아버지의 그런 면은 심심하고 답답하게 느껴진 적이 많았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나에게서 아버지의 얼굴을 느끼는 어른들이 점점 많아진다. 서른살 넘어 안경을 쓰기 시작하자 내가 봐도 아버지와 나는 많이 닮았다. 가끔 아버지 사진을 본 친구들이 푸하하 웃을 정도이니, 피는 못 속인다는 말만큼 맞는 말도 없나보다.


그런데 사회생활을 하고부터는, 단순히 얼굴만 아버지를 닮은건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곧 3년차에 접어드는 회사생활 중에, 나는 ‘합리적이지 않고’, 내가 믿어온 상식선에서는 ’설명이 불가능한’ 일들을 드물지 않게 보았다. 사실 누구 하나 회사생활이 안힘든 사람이 있겠는가. 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의 우리 세대는 그런 괴리감에서 오는 힘듬을 더 많이, 더 자주 느끼는 것 같다.


나의 문제는, 그 ‘합리적이지 않은, 설명이 불가능한’ 일들을 일단은 덮어두고 그 이후의 일들에 집중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내 생각과 기준에 납득되지 않는 결정이 내려졌을 때, 나는 사실상 그것을 바꾸거나 조정할 수 있는 능력이 아직 없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고민하고, 기분나빠하고, 스트레스를 받는다. 조금 무던한 동기들이 ‘아 오늘 하루 진짜 줫같았다’ 하고 욕한번 내뱉으며 맥주 한잔에 털어버릴 일을 나는 다음날 출근할 때까지, 그리고 그 다음날 출근할 때도 끌어안고 있다. 애초에 날 설득하지 못했던 것, 그러나 내가 바꿀 수 없는 것에 대해, 그 뿌리를 찾으려하고 그것을 캐내어 근원부터 없앨 방법을 고민한다. 두시간의 런닝타임 동안 영화의 기본 설정에 끊임없이 의문을 던지는 아버지처럼.


아버지가 <미드나잇 인 파리>의 아름다운 화면과 위트있는 대사를 즐기시지 못하듯, 나도 사회생활의 소소한 재미와 작은 성취감들을 너무 많이 놓치고 있다. 아버지의 담백함은 아버지의 심심함을 잘 메꿔줄 수 있도록 당신께서 나름대로 찾아내신 사는 지혜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나의 담백함은 무엇일까.


동생이 예전에 찍어뒀다며 아버지와 어머니의 뒷모습을 보냈다. 요즘 날서있던 마음이 왠지 조금은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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