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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힘을 생각하다

번아웃 증후군이라는 말

by OHNUS




7평짜리 방에 화분을 놓겠다고 다짐했던 이유는 다른게 아니었다. 부모님 집떠나 산지 10년이 넘었지만, 빛이 잘 드는 집은 이 집이 처음이기 때문이다. 더 큰방에서도 살아봤지만, 창문 열면 앞집 벽돌벽이 보인다거나 괴상한 구조 탓에 빛이 방안까지 들어오질 않는 집들이었다. 그런 집에서 식물을 키운다는 것은 식물에게도 못할 짓이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 비싼 전세금과 좁은 평수 대신 채광을 얻었달까. 어찌되었든 집구석에 자리잡은 초록색이 썩 마음에 드니 다행이다.


그런데 사실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집에 화분을 놓겠다는 생각을 이전부터 하고 있었던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잡다한 살림이 많은 내 생활패턴에 7평 오피스텔은 좁았다. 그런 집에 화분을 들이는게 맞을까? 라는 생각을 꽤 오래 했다. 사실, 그 '진짜 이유'라는게 없었으면 화분을 끝까지 들여놓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친한 동생이 발령을 이유로 생애 처음으로 독립을 했다. 평소에 취향ㅡ약간의 허세와 약간의 심미안이 묘하게 뒤섞인ㅡ과 성향ㅡ이것저것 모으기 좋아하고 쟁여놓고 싶어하는ㅡ이 비슷한 동생이었기에 집을 구하는 과정부터 집을 꾸미는 과정까지 이런저런 대화가 자연스럽게 많이 오고 갔다. 그날의 화제는 '맥시멀리스트'였다. 애초에 우리 성격이 '미니멀'하고 '킨포크'스러운건 못할게 뻔하니, 좋아하는 것들 예쁘게 보기좋게 쌓아놓고 사는게 우리 나름의 멋이 아니겠냐는 뭐 그런 이야기. 그러다가 그 친구가 '나는 넓은 집이 좋아. 화분은 꼭 놓고 싶거든'이라고 말했고, 나는 '좁은 집에도 화분 잘만 놓으면 충분히 들어가. 안그래도 하나 사려고 생각중이야' 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렇게 말을 꺼낸 순간에 나는 결심을 했다. 그리고 예전부터 눈여겨보기만 하던 화분을 주문했다.


말에는 묘한 힘이 있다. 어떤 방식으로든 내 입, 혹은 내 손가락을 통해 밖으로 꺼내놓는 순간 그것은 실체가 되어 되려 나에게 영향을 끼친다. 결심보다, 결심했다는 말이 앞설 수도 있는 것이다. 감정보다, 그걸 느꼈다는 말이 앞설 수도 있다.


어떤 여자에 대한, 남에게 말못할 감정 때문에 끙끙 앓다가 친한 친구에게 그것을 처음 털어놓았을 때, 그 친구의 첫 반응은 '이제부터는 진짜네'였다. 사람이 자기 감정, 자기 생각, 자기 고민에 대해 확신을 가지기란 어렵다. 그러나 확신만 없을 뿐 어느정도는 알고 있다. '내가 요새 이래' 혹은 '나는 이렇게 생각해'라고 소리내어 말하는 순간 그 '어느정도의' 것은 진짜가 된다. 그렇더라.


하루하루가 힘들다. 새 버릇이 생겼다. 출근길에서 스마트폰을 만지작 거리며, 자주 들락거리는 커뮤니티나 인스타에 '번아웃 증후군'을 검색한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올린 각양각색의 글이지만 그 안에서 나는 지금의 나를 애써 뒤적거려 찾아낸다. 위로도, 해결책도 되지 못하는 글들이지만 최소한 나만 이런것은 아니라는 것, 그리고 이게 비정상적인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게 된다.


그런 퇴근길 끝에 집에 들어와 화분을 보는데, 문득 의심스러워졌다. '번아웃'이라는 것도 결국 나도 모르게 나에게 내린 나이롱 진단은 아닐까하는. 어디선가 주워들은 단어로, 형체없는 그 단어를 내 스스로 조형해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조금 더 세심하게, 진지하게, 하지만 우울하지는 않게 스스로를 다시 한번 돌아볼 시점에 나는 번아웃이라는 말과 단어로 스스로를 규정해버리고 마음껏 지쳐버린건 아닐까하는.


이대로이긴 싫은데 이대로일 수 밖에 없다고, 일기 한편, 공부 한글자 할 의욕도 없다고, 생각을 안하는건지 못하는건지, 헷갈린다. 이 글은 그러니까, 그 무신경한 말과 단어에 대한 내 나름의 반항이자 극복의 노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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