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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의 동력

<개인주의자 선언>

by OHN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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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세지에 대해 도저히 반박할 수 없을 때, 사람들은 보통 메신저를 공격하곤 한다. 정말로 지기는 싫거나, 혹은 져서는 안되는 논쟁이 벌어질 때 가장 흔히 벌어지는 일이다. 단순하고 추하지만 놀라울 정도로 효과가 있어서, 논쟁의 끝에 다다르면 메세지의 본질은 없어지고 메신저에 대한 인상만 남는다. 선거때만 되면 벌어지는 네거티브 논쟁이 그 효과를 입증한다.

그렇다면 반대로, 메세지가 메신저의 덕을 보는 경우는 어떨까? 그것은 바람직한 일일까?

몇년전에 한창 강연열풍이 불었었다. 강연 서비스를 주요 수익으로 하는 스타트업들이 생겨나고, 마이크를 든 스타강사들이 여기저기 범람했다. 당시에 나는 두가지가 불편했다.

하나는 ‘말을 잘하기 때문에’ 강연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전문분야도 모호하고, 분야가 있다한들 그 성취가 모호한 사람들이 말을 잘한다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광범위하게 메세지를 던질 수 있다는 것이 싫었다. 그것은 내가말은 휘발되는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때나 지금이나 강연 한번, 말 몇마디로 지속가능한 변화를 일으킬 수는 없다고 믿는다.

두번째는 ‘성공했기 때문에’ 강연하는 사람들이었다. 전문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사람들에게 감정적 메세지, 힐링, 용기 등등을 주는 강연을 하는 것이 싫었다. 어쩌면 그때부터 이미 사람은 노력만으로 성공할 수 없다는 냉소로 그들을 보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100프로 자신의 공도 아닌 성공을 구실로 삼아 꿈과 희망을 전하려는 것에 대한 냉소. 이제와 돌아보면 그 냉소가 옳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들의 선의도 무시하지 않는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런 코드를 가진 강연 열풍은 오래가지 못하고 사그러들었다.

<개인주의자 선언>을 읽으며 그 때를 떠올렸다. 정확히 말하면 책의 중반부를 넘어가면서부터였다. 초반부는 공감하기 바빴다. 아 역시 나만 그런게아니었구나 안도하게 되었다. ‘사회적으로 이렇게 성공한’ 사람도 나와 비슷하게 느끼고 생각하고 있다고 안심하게 되었다. 어느덧 접어든 사회생활 3년차, 내가 과연 이렇게 평생 살 수 있을까 고민하던 시점이기에 더욱 그랬을지도 모른다. 괜찮다, 개인주의자여도 괜찮다, 다만 합리적인 개인주의자여야 한다는 확고한 메세지가 있었다. 그 명징한 메세지가 그 어떤 부드러운 말보다 더 강한 위로가 되었다.

그러나 중반부에 이르렀을 때는 메세지가 아니라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판사님이라 그런지 글을 명료하게 잘 쓰신다’ 거나 ‘역시 글쓰고 말하는 일을 꾸준히 해야 생각을 글로 이렇게 잘 정리할 수 있구나’ 하고 느끼기 시작하자, 공감은 없어지고 감탄만 남았다. 글쓴이가 ‘판사’이기 때문에, 혹은 ‘사회적으로 성공했기 때문에’ 가치가 있어지는 글이었다.

뒷부분 반절의 아쉬움이 나머지 반절의 가치를 해치지는 않았다. 투자한 돈과 시간이 아까웠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다만 많이 아쉬울 뿐이다.

평론가 이동진이 말하기도 하고 쓰기도 한 자신의 독서법에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책을 사기전에 4분의 3 지점을 열고 읽어보라는 것이다. 바로 그 지점이 작가가 힘을 잃기 가장 쉬운 부분이기 때문에, 그 부분의 퀄리티 여부가 책 전체의 만족도를 평가하는데 지표가 되어줄 수 있다는 이야기다.

거기에 덧붙여, 나는 짧은 글들을 엮은 에세이집이라는 것은 결국 전반부에서 독자에게 심어준 기대를 후반부에서 어떻게 채워주느냐의 문제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그것이 결국 에세이의 미덕이자 동력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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