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글을 쓸 땐 노트북 보단 스마트폰을 애용한다. 아이폰 이전엔 PDA를 이용해 원고 작업을 했었다. 노트북 보단 성능이 떨어지지만 경박 단소한 작은 단말기에 접이식 키보드를 연결해서 쓰는 게 취향에 훨씬 맞았다. 키보드는 스토와웨이(Stowaway)사의 제품을 십 수년째 쓰고 있고 지금 쓰고 있는 것도 10년 전에 두 개를 사서 한 대가 고장 나서 버리고 이어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예전에는 문인들이 원고지와 만년필 특히 특정 브랜드를 선호하는 것을 이해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토지의 박경리 선생은 몽블랑 149를 애용하셨다고 한다. 유선형 몸체의 안정된 그립감과 18k 금과 이리듐으로 만들어진 더 닙(펜촉)의 부드러운 필기감을 좋아하셨다고 한다. 조지 루카스(George Lucas) 감독은 딕슨 타이콘데로가(DIXON TICONDEROGA) 연필로 스타워즈 에피소드 1의 시나리오 초고를 썼다는데 미국 드라마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노란색 몸체에 분홍색 지우개가 달린 그 연필이다. 조선시대 글 좀 쓴다 하는 양반들은 중국 저장성(浙江省)의 후저우(湖州)에서 만든 호필(湖筆)을 으뜸으로 쳤다. 당시에도 경남 밀양과 전남 광주지방에서 족제비 털과 노루 앞다리털로 만든 붓을 만들기도 했지만 사대부들은 중국 수입산 붓을 좋아했다. 이런 도구들의 모양, 재질, 만듦새, 가격 등등 모든 것을 떠나서 글을 쓰고자 하는 이들의 도구에 대한 모든 고집을 난 이해 한다. 아니 지지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생각한 것을 손가락으로 쓰고 눈으로 확인하고 다시 머리로 생각하는 순환 작업이다. 정신과 육체의 끊임없는 교감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글쓰기이기 때문에 육체와 연결된 도구 즉 만년필이나 키보드를 어떤 것을 쓰느냐도 컨디션과 연결이 된다. 나에게 블루투스 키보드와 스마트폰의 조합은 최적의 조합이다.
내가 스마트폰을 고집하는 이유는 화면이 작다는 단점이 장점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15인치 맥북 프로에서 원노트나 에버노트를 펼쳐 놓으면 그 광대함에 숨이 턱 막힌다. 이 넓은 화면을 텍스트로 다 채워놓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머리가 띵해진다. 서울-부산을 자가용 운전으로 당일 왕복하는 출장을 떠나야 할 때의 느낌이라고나 할까. 이제 시동을 걸었을 뿐인데 벌써부터 숨이 막힌다. 링에서 2미터가 넘는 서양 레슬러와 처음 마주쳤을 때처럼 막막하기도 하다. 체중이 150 kg이었는데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헤라클레스의 확장판 같았다. 하루 필요한 단백질 양이 kg당 2g이라고 하면 저 근육을 유지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소와 닭들을 도살장으로 보냈을까 계산하다가 한 대 맞고 링밖으로 떨어져 한참을 못 일어났던 기억이 나기도 한다. 하지만 스마트폰은 아이폰 7 플러스라고 해도 5.5인치 밖에 되지 않는다. 채워나가야 할 빈칸이 적기에 부담이 적다. 단어 몇 개, 문장 몇 줄을 툭툭 쳐나가다 보면 금세 화면 밑단까지 커서가 닫는다. 일종의 인지적 착시다. 동기화를 해서 노트북 원노트로 보면 작업한 분량이 많지 않다는 걸 알게 되지만 그래도 어쨌든 이런 경쾌함이 좋다. 이걸 반복하면 되니까.
글쓰기 생산공정에서 가장 중요한 입력과 출력을 위한 도구들을 이렇게 취향에 맞추어 갖추어 놓으면 하나 더 필요한 것이 있는데 음악이다. 음악이 참 신기한 것이 한 번에 한 곡만 들을 수 있다. 물론 스피커나 이어폰을 두 개를 준비하고 각각 다른 소스를 연결시키면 복수의 음악을 동시에 들을 수 있겠지만 음악은 다른 음악과 섞이는 즉시 잡음의 영역으로 추락한다. 미슐랭 가이드에 오른 레스토랑의 세프가 만든 요리라고 하더라도 다른 음식과 섞어버리면 그냥 못 먹을 음식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완벽하고 온전한 고결성이 음악을 지켜주는 최소한의 보증인 것이다. 그런데 음악은 신기하게도 듣는 이의 달팽이관을 점령했지만 그것 이상으로 침범하려고 하지 않는다. 음악을 들으면서 운동을 할 수도 있고 책을 읽을 수도 있으며 어디론가 차를 몰고 나갈 수도 있다. 요즘 자주 듣는 음악은 일본 전국시대를 그린 대하드라마 풍림화산(風林火山)의 사운드트랙이다. 센주 아키라(千住明)가 작곡한 연주곡들은 뱃속에 뜨거운 찻잔이 들어있는 듯한 배우들의 대사와도 잘 어울리고 그냥 들어도 그 묵직함이 살아있다. 특히 원고 작업을 하기 위해 바이크나 차를 타고 인근 카페로 나갈 때 이 음악들을 듣고 있으면 전쟁터로 나서는 타케다 신겐(武田信玄)의 무사가 된 것 같은 착각에 살짝 빠지곤 한다. 그리 어긋난 망상은 아니다. 5.5인치 화면도 나중에 지면으로 만날 독자와의 싸움을 준비하는 곳이라고 할 수도 있으니까. 일을 끝내고 돌아올 땐 스타워즈 스토리 로그원의 배경음악을 자주 듣는다. 스타워즈 하면 가장 먼저 슈퍼맨과 자주 헷갈리는 존 윌리엄스의 메인타이틀과 다스베이더의 테마로 잘 알려진 제국의 행진일 텐데 로그원의 음악은 매우 서정적이고 슬프기까지 하다. 스타워즈 신작이라는 이야기만 듣고 영화관에 갔다가 책 종이에 손을 베이듯 베이고 말았다. 특히 엔딩 장면에서 주인공들이 서로의 죽음을 직감한 채 부둥켜안고 있을 때 흘러나왔던 jyn erso & hope suite는 늦은 저녁 귀환과 너무나 잘 어울린다. 눈 앞에서 점멸하는 자동차들 미등과 브레이크등은 영화 속 별들처럼 느껴진다.
접이식 키보드, 스마트폰, 에어 팟, 보조배터리, 약간 식은 커피 그리고 한 가지 더 필요한 것이 있다. 바로 ‘자리’다. 낮동안 쏟아진 강렬한 일사광으로 여름의 기운이 느껴지는 창가가 좋다. 블라인드로 살짝 내리고 스마트폰 언저리와 키보드 언저리까지만 볕이 닫도록 하면 더욱 좋다. 내 생각에 맞추어 손가락이 이리저리 움직이다 보면 햇빛에 의해 피아니스트의 손가락처럼 하얗게 빛나 보인다. 링에서 얻었던 상처들은 보이지 않는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불행한 이유가 모두 제각각이다.”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첫 구절이다. 행복한 가정이란 가족 구성원 간의 사랑, 경제적 여유, 시간 배분, 사회적 위치 등에 대해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가정이다. 따라서 그 형태가 비슷할 수밖에 없다. 반면 불행한 가정은 각각의 요소가 하한선 이하로 내려가거나 또는 충족한다고 하더라도 상성이 맞지 않아 하나의 범주로 묶기 어려울 것이다. 이럴 때 흔히 ‘성격차이’란 말로 눙쳐서 말하곤 한다. 대문호의 이 문장은 글쓰기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내가 아무리 글을 쓰고 싶다고 하더라도 어젯밤 합정역 인근 이자카야에서 소맥을 연거푸 말았다면, 반실신 상태에서 카카오톡 택시를 타고 간신히 귀환에 성공했다면, 그런 컨디션으로 아침을 맞이한 상태에서 글을 쓸 수는 없다. 키보드 배터리가 없어도, 카페 옆자리에 할리데이비슨 1,745cc 로드킹 배기음을 뛰어넘는 음량으로 부부싸움 중인 사람들이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글쓰기는 그래서 나의 의지와 타인의 의지 그리고 주변 환경이 반클러치처럼 잘 맞아야 한다. 운전면허 1종 수동 시험 때 해봤던 반클러치 말이다. 왼발과 오른발을 모두 사용해 엔진 회전수를 공회전보다 살짝 올리고 거기에 맞추어 클러치 페달을 뗀다. 아주 약간의 기계적 충격음, 기억 박스 내 새끼손톱 한 개 마디 정도의 금속 톱니바퀴들이 부딪치며 1톤 가까운 쇳덩어리가 앞으로 나아간다.
차량이 앞으로 나아가면, 그때부턴 난 내 어깨 넓이에서 양 손을 살짝 키보드 쪽으로 뻗은 박스형 공간의 지배자가 된다. 이 소우주에서 난 창조주와 같은 지위를 얻는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기도 하고 공간을 뛰어넘기도 한다. 친구랑 같이 영웅본색을 보고 롱코트를 사러 고속버스를 타고 송탄에서 이태원까지 갔던 그 시절로 돌아가기도 하고 갑작스러운 이별통보에 울리지 않는 모터로라 삐삐를 붙잡고 컹컹 물개처럼 울었던 25살의 강남역 인근 공터로 가보기도 한다. 잡지 칼럼을 통해 장년층을 위한 스마트폰 사용방법을 알려주는 안내자가 되었다가 이번에 열릴 최홍만 선수의 경기 상대에 분석을 쓰는 해설자가 되기도 한다. 내 감각을 온전히 믿고 그걸 살려 내 생각을 화면 위에 스프레이로 뿌리듯 도포한다.
김동률이 기적을 노래하고 드렁큰 타이거가 너희들이 힙합을 아느냐고 소리칠 때 처음으로 내 책을 냈다. 이후로 에세이, 자기계발서, 청소년 등등 십 여권의 책을 세상에 내놨지만 서점의 베스트셀러 코너에 올려보진 못했다. ‘프로레슬러’가 책을 냈다는 이유로 즉 저자가 특이하다는 것 때문에 언론 인터뷰는 많이 했지만 그게 출판사와 나의 바람대로 흘러가진 않았다. 하지만 난 계속 키보드를 두드린다. 계속 글을 쓴다. 내 감각을 소중히 하고 싶기 때문이다. 글을 쓰지 않는다면 그 감각들은 무뎌지고 퇴화할 것이며 익월 말 통장 입금만 바라보며 될 것 같아 두렵다. 사실 내가 나 자신을 살아있다고 느끼게 해주는 여러 행위 중에 글쓰기는 그마나 가장 안전하고 온건한 취미다. 감각의 절대치는 프로레슬링과 모터사이클이 으뜸이다. 하지만 저 영어단어들에 대해 갖고 있는 여러분들의 스키마 그대로, 위험을 회피하기 위해선 꽤 만만치 않은 준비를 필요로 한다. 최소한 글쓰기는 어디 멍이 들거나 뼈가 부러질 염려는 없으니까 말이다.
작년 여름초 신촌역 인근 중고서점에서 내가 예전에 쓴 책을 발견했다. 표지 다음 페이지 속지에 내 싸인까지 있었다. 아마도 기억을 더듬어 보건대 독자라는 분이 메일을 보내 지하철역에서 만날 약속까지 해서 사인해드렸던 책이다. 사연 있는 책을 중고서점에서 보니 스피드스케이팅처럼 속도를 다투는 경기중에 상대방과 부딪쳐 넘어졌을 때의 느낌이 이러지 않았을까 싶었다. 하지만 이내 어떠냐 싶었다. 이런 느낌 또한 저자가 아니면 경험하기 힘든 것 아닌가. 체세포의 사멸이 생성보다 빨리 이루어지는 중년 남자 입장에선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경험을 하는 것이 더 이득이다. 헤밍웨이는 글이 잘 써지는 날엔 '연필 몇 자루가 닳아 없어진 날' 이런 식으로 집필 분량을 기록했다고 한다. 앞으로 난 내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몇 대의 스토와웨이 키보드를 사용하게 될까. 키보드를 뛰어넘는 새롭고 편리한 입력방법이 나온다고 하더라도 노안 때문에 작은 화면이 불편하다고 하더라도 깐깐하게 접이식 키보드와 작은 화면을 고집하는 그런 노인이 되고 싶다. 내 감각을 소중히 하고 싶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