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중고등학교 다닐 땐 TV 채널이 3개밖에 없었어. 교육방송을 넣고 미군부대가 있는 곳에서만 볼 수 있었던 주한미군을 위한 방송인 AFKN(American Forces Korean Network)까지 해봐야 다섯 개였지. 그나마 낮 12시부터 저녁 5시까지는 방송이 없었어. 또 밤 12사가 되면 전파가 끊겼어. 야간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니 에너지 절약 그리고 일찍 자라고 그리고 일찍 일어나서 일하라고 말이지. 그 시절에 방송을 탄 다는 것은 정말 엄청난 일이었어. 어쩌다가 TV 뉴스에 얼굴이 살짝 나오거나 인터뷰라도 나오면 그 사람 집 전화통은 불이 날 정도였어. 하도 전화가 많이 와서. 그때나 지금이나 끼있는 친구들은 연예인 같은 걸 꿈꿨지. 하지만 난 방송에 대한 선망이나 동경은 없었어. 나 같은 사람에게 그런 기회가 올 일이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별다른 재주가 없고 집안이 특출 난 것도 아니고 서울도 아닌 지방 도시에 살고 있는 반에 30등 하는 내가 방송에 나갈 방법은 전무했어. 그러니 관심이 없었지.
세상일은 참 모르는 거야. 참 불확실해. 그래서 의미가 있지. 20대 중반에 서울에 올라와 별에 별 일-주로 서비스업-을 다하다가 아는 형의 추천으로 인터넷 콘텐츠를 제작하는 회사에 입사했고 그곳에서 뭔가 참신한 아이디어를 제안하면 방송을 만들 수 있도록 해준다는 거야. 그래서 일본어를 조금 재밌게 공부하는 방법이 없을까 해서 엽기적이고 자극적인 상황을 소재로 하는 일본어 강좌 영상을 만들어보자고 했고 그게 덜컥 통과가 됐어. 그리고 그것뿐만이 아냐. 재밌다고 신기하다고 이런 평가를 받으면서 당신의 인터넷 방송 열풍을 타고 엄청난 시너지 효과가 일어났어. 단숨에 방송 특히 TV가 주목하기 시작했어. 어떤 때는 한 방송사의 아침, 점심, 저녁에 각각 다른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했어. 매거진성 프로그램에 출연했다가 토론 프로그램에 나오고 다시 뉴스에서 코너로 다뤄지는 거였지. 액션영화에서 주인공을 괴롭히는 3번째로 등장하는 악당 같은 외모와 그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달변. 이게 좀 먹혔나봐. 이 일이 계기가 뵈어 방송과 인연이 생겼고 MBC 라디오에서 10분짜리 코너를 진행하게 됐어. 한 주간 인터넷에서 가장 화끈했던 검색어를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보는 코너였어. 방송은 그전도에도 여러 번 나갔지만 주로 '세상에 이런 일이 처럼' 신기한 사람(방송국 용어로 사례자)김남훈으로 나가는 거였고 무슨 리포터처럼 출연하는 건 이때가 처음이었어. 우리 집에서는 당연히 난리가 났지. 부모님은 가게에서 일하다 말고 이 시간만 되면 라디오 볼륨을 아주 크게 정말 아주 크게 틀어났어. 동네 사람들 다 들으라고.
이게 끝이 아니었어.
나를 눈여겨본 어떤 방송국 간부 피디가 개편을 즈음해서 나를 진행자로 추천을 한 거야. 그리고 오디션을 봤는데, 세상에나 내가 됐어. 내가 라디오 방송국 디제이가 됐다고. 이게 말이 돼? 믿기지가 않았지만 방송국 홈페이지엔 내 사진이 걸렸고 방송국 정문을 통과할 때도 방문 서류를 작성하는 것이 아니라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면서 넘어가는 즉 '연예인' 대우를 받게 됐어. 야 이런 날이 오는구나. 지하철 5호선 여의도역에서 내려서 방송국으로 일하러 가는, 그런 신해철의 도시인 (N.E.X.T - City people) 노래 같은 순간이 오는구나.
자 솔직히 말할게. 방송은 돈이 돼. 그것도 아주 많이. 자본주의는 모든 걸 돈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그런 무도함이 때론 아주 엄청 큰 매력이 된단다. 게스트와 진행자는 차이가 많이 나. 아주 많이. 난 요즘 라디오에 게스트로 출연하는데 1시간짜리 방송용 기본 원고까지 내가 준비하는데도 6만 1천원을 받어. 하지만 19년전인 저 당시엔 스튜디오에서 하루 30분 방송하는데 15만 원을 받았어, 주말엔 17만 원이래. 왜냐하면 진행자니까.
불과 몇 년 전에 식당에서 일하면서 하루 10시간 일하고 5만 원 벌까 말까 했는데 더 많이 벌어. 심지어 손님들이 버린 이쑤시걔에 손가락을 찔릴 일도 없어.
일주일에 92만 원, 한 달에 368 만원. 통장 보고 믿어지지가 않더라. 이렇게 큰돈을 내가 벌어본 적이 있던가. 지금으로부터 19년 전 이야기야. 그땐 회사도 다니고 있었어. 투 잡이었지. 여기서 120 만원 정도 받았어. 그리고 다른 방송도 종종 출연했고 여기저기에 기고도 했어. 그러다 보니 월 수입이 600 에서 많게는 700 만원 을 찍기도 했어.
남자 나이 28살. 월 수입 700. 지금보다 물가도 쌌던 2001년의 일이야.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이 상황에 딱 들어맞는 말이었어. 돈을 펑펑 썼어. 가계부를 쓰는 건 물론 카세트 플레이어(자성을 띤 테이프를 소형 모터로 돌려서 음악을 재생하는 장치) 배터리가 닳면 깨물어서 몇십 분이라도 더 써보고 그래도 돈 쓰기 싫어서 안 사고 버티는 짠돌이 김남훈은 사라졌어. 사람 봐가며 카드를 발급한다는 신용카드회사에서 연락이 왔지. 결혼정보회사 매니저가 방송국으로 찾아왔어. 남부터미널에서 송탄으로가는 저녁 9시 40분 막차를 놓치면 택시비는 물론 피씨방 가서 시간 때우는 돈도 아까워서 그냥 공터 벤치에서 날밤을 새우던 나였는데 모범 택시를 탔지. 가족은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에게 통 큰 선물을 했어. 딱히 친분이 없는 이들에게도 술과 음식을 샀지. 한 달에 천만 원을 벌을 때도 있었는데 항상 적자였어. 왜냐하면 번 것 이상으로 썼기 때문이지. 수입은 전년에 비해 다섯 배 이상 늘었는데 매달 적자가 났어. 하지만 신경 쓰지 않았어. 잘 나가는 김남훈에게 그깟 돈은 들어왔다가 다시 나가는 것일 뿐. 어차피 다시 채워질 텐데 뭐하러 쪼잔하게 붙잡고 있을 필요가 있나. 지금 생각해보면 난 거물 흉내를 냈던거야. 진짜 실력있는 거물들은 그 자체로 존재김이 있으니까 돈을 써가며 자신을 증명할 필요가 없지. 하지만 난 돈을 쓰면서 그런 '척'을 하고 있었던거야. 그리고 그게 계속 먹혔던거지. 하지만 인생에 좋은 일만 계속 있는 것은 아니잖아? 그러면 인생이 아니겠지.
개편을 맞이했고 난 방송국에서 잘렸어. 아니 짤렸어. 속이 쓰렸지. 그 쓰라림에서 벗어나려고 더더욱 돈을 썼어. 유명가수 공연, 야구 축구 빅매치를 암표로 웃돈을 주고 샀어. 비싼 오토바이도 샀어. 그래서 어떻게 됐게? 카드는 연체됐고 캐피털회사에서 재촉 전화가 왔어. 돈이 떨어진 것을 알자 사람들은 빠르게 떨어져 나갔고 난 다시 서울에 처음 혈혈단신 혼자 올라왔을 때로 리셋이 되었지. 아니 더 나빴지. 빚이 수천 만원 생겼거든. 서울 처음 올라왔을 때 아는 형들 집을 전전했고 돈을 벌면서 조그만 원 룸을 얻었다가 나중엔 강남역 제일생명사거리(요즘은 신논현역사거리)에 그럴듯한 원 룸까지 얻었는데 갈 데가 없어졌어. 어쨋든 서울에 있어야 했기에 염치불구하고 이제 막 신혼집을 차린 여동생네 집에 얹혀살기로 했어.
꾸역꾸역 살았어. 꾸역꾸역. 정말 이 말 외엔 떠오르지 않아. 그 빚 갚고 다시 삶의 일상성과 평화로움을 되찾기 위해서 몇 년간 뭘 하고 살았는지 기억도 잘 안 나. 말 그대로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꾸역꾸역 살았어. 평일 낮엔 직장에서 회사원으로 일하고 저녁과 주말엔 조금이라도 더 벌겠다고 시합을 뛰었어. 상대 선수 발에 밟혀서 손가락이 부러지고 쇠기둥에 부딪쳐 이가 부러졌어. 목구멍 안으로 이조각이 들어가는 걸 느꼈지. 시합장에서 바로 응급실로 실려가기도 했고 운이 좋은 날은 그저 욱씬거리는 고통과 젖산 가득한 피곤함만 가득한 채 후배가 모는 낡은 봉고차 뒷자리에 퍼진 채 여동생네 집으로 돌아오곤 했지.
서스펜션이 맛이 가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그 차 안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군만두가 생각났어.내가 군만두 같다고 생각했어.
“내 인생 군만두 같구나. 지지리도 실력 없는 요리사가 만든 군만두. 한쪽은 새까맣게 타고 한쪽은 아예 안 익은. 도저히 먹을 수 없는 군만두”
삶은 불확실해. 내일 어떤 일이 일어날지 어떻게 알겠고 계획대로 되는 일이 어디 있겠어. 내가 생각한대로 삶이 간다면 그 삶은 의미가 있을까. 영화를 볼 때 스포일러 한 줄을 피해갈려고 인터넷 댓글을 안 읽으려고 하고 페이스북을 조심조심 스크롤하는데 삶이 그러면 재미가 있을까? 아니 아예 의미가 없겠지. 자 이제 그 진짜 의미에 대해서 알아보자. 군만두 같은 인생에 대해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