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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남훈 해설위원 Jun 07. 2017

사채업자 R과 나 -1편

모든 것이 소진됐고 불운만 남았다. 그러나 행복하다.

 솔직하게 고백할 것이 있다. 말하자니 창피하고 그냥 넘어가자니 께름칙하여 안절부절못하는 것보단 시원하게 털고 가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내 가슴 왼편 심장이 있는 위치에서 살짝 윗 편엔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흉터가 있다. 난 지금까지 이 흉터를 이용해 내 남성성을 과시하는 용도로 이용했다. 때론 링 밖 장외난투를 벌이다가 외국 선수가 휘두른 흉기에 맞아 찢어졌다거나 어떤 때는 주점에서 시비가 붙은 건달들이 품에서 꺼낸 과도에 찔린 것이라 했다. 20대 후반에 생긴 이 흉터는 약 십여 년간 내 폭력성과 용맹함의 증거로 많이 활용되었다. 그런데 솔직해지자. 이건 나의 의도된 거짓 증언이었다. 지금부터 이 흉터에 대해서 사실을 밝히 코자 한다.


 흔히 말하는 청춘이 갖고 있는, 그 영역이 갖고 있는 못된 속성은 매우 지루하다는 것이다. 꿈, 희망, 열정으로 가득 찬 시기, 역경을 뛰어넘고 자기 자신과 싸우며 운명을 개척하는 이야기는 이미 성공한 고액 자기 계발 강사가 자신의 청춘을 윤색해서 이야기할 때나 나올 법한 것들이다. 또는 어쭙잖은 TV광고 같은 것이다. 이미 노년의 시기에 다다른 임원들의 결재를 맡기 위해 중년에서 더 이상 썩지 않기 위해서 고군분투하는 과장급들이 낸 아이디어로 기반으로 만든 '기업 광고' 같은 것이다. 즉 그런 청춘은 존재하지 않을뿐더러 있더라도 매우 소수에게만 국한되어 있다. 청춘이 지루한 이유는 상대적으로 건강한 육체에 비하여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기회는 돈과 시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돈만 있어도 안 되고 시간만 있어도 안 된다. 또한 각각 두 개의 수소 분자와 하나의 산소 분자가 결합해 물이 되는 것처럼 적절한 비율이 맞아야 한다. 나의 청춘도 지루했다. 비율을 따질 것도 없었다. 부모에게 큰소리치고 서울로 올라왔으나 돈이 없었다. 돈이 없으니 일을 해야 했는데 특별한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인맥이 있던 것도 아니었으니 취업이 될 리가 만무했다. 아직 비정규직 이란 말이 생기기 전이었다. 지금처럼 구직 시장이 최악은 아니었지만 나처럼 전혀 준비 안된 사람을 받아줄 '번듯한 직장'이 있을 리 만무했다. 자존심을 구겨가며 아버지의 소개장을 듣고 몇 군데인가 회사를 찾아갔지만 등 뒤로 쏟아지는 냉대와 비웃음만 느꼈을 뿐이었다. 돈이 없으니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만 했다. 주로 새벽까지 영업하는 대형 순댓국집 같은 곳이었다. 노래방에서도 잠깐 일을 했었다. 밤엔 일하고 낮엔 자다 깨다를 반복하면서 PC통신에 접속해 채팅으로 여자를 꼬셔보겠다며 대화창으로 말을 걸다가 해가 떨어지면 다시 가게로 나갔다. 지루했다. 


"따르릉" 신세를 지고 있던 아는 형네 창문 너머로 어두움이 쏟아져 내렸다. 심야로 가는 어느 날 저녁이었다. 전화벨이 울려 받았더니 대학동창 G였다. 엄밀히 말하면 G는 나랑 같이 입학은 했지만 한 학기만에 편입에 성공해서 다른 대학으로 갔고 얼마 전 증권회사에 취직을 했다며 술 한 잔은 얻어먹은 적이 있었다. 알코올에 뇌세포와 함께 혀 마저 잔뜩 취한 G는 단란 주점에서 양주 한 병 정도만 동료들과 마셨을 뿐인데 계산서가 너무 세게 나왔다며 좀 와달라는 것이었다. 마침 내가 있는 곳에서 걸어서도 10 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였다. 일단 거부했다. 내가 가봤자 딱히 어떤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협의를 보거나 경찰에 신고를 하라고 했다. 하지만 G는 계속 나에게 읍소를 했고 마침 그땐 난 정말 '지루한 상태' 였기 때문에 나가보기로 마음먹었다. 살짝 비가 내렸고 주변 술집 간판 네온사인 불빛들이 찰랑 거리는 노면 위로도 흘러내리고 있었다. 담뱃갑을 보니 두 가치가 있길래 하나를 입에 물었다. 구멍가게에서 하나 새로 살까 하나가 일을 끝내고 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기면 구겨질 수도 있으니까. 새로 산 담배가 꼬깃꼬깃 해지는 건 정말 질색이었다.


 협상은, 협의는 큰 무력충돌 없이 평화적으로 끝났다. 물론 시키지도 않은 양주-그것도 가짜 임에 틀림없는- 너 댓 병에 자기들이 휴게실에서 먹다 남은 것을 내어 놓은 것 같은 탕수육과 떡볶이 안주까지 300만 원이라는 금액은 매우 정교한 설득의 기술이 필요한 상황이긴 했다. 무리에서 떨어져 나간 야생동물처럼 공포에 질려있는 G와 G의 동료들을 진정시키고 양심과 교양이라는 단어를 살면서 단 한 번도 말하거나 읽어보지 못한 단란주점 측 인물들 사이에서 대화를 이어 나가는 건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물론 우리 쪽 반대편 인물들은 욕도 하고 맥줏병도 깨서 허공에 휘두르기도 했지만 큰 효용은 없었다. 나도 작년까지 온천으로 유명한 모 지역 관광도시 단란주점에서 부지배인-실질적으론 웨이터-으로 일한 경험이 있기에 저런 행동은 그저 겁을 주기 위한 것일 뿐 실제로 우릴 때릴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정말 폭력이 발생하면 공권력의 정당한 개입 요건이 성립되고 그 상황은 저들이 제일 귀찮아하는 것이다. 이런 구석 술집에서 바가지로 돈을 버는 치들은 족보 있는 건달이라고 볼 수도 없다. 진짜 크게 현찰을 거머쥐는 이들은 건설, 증권, 카지노 같은 곳으로 영역으로 다 가버렸다. 위협이 먹히지 않자 그들은 한 발자국 물러났다. 시간이 훌쩍 지났다. 서로 룸과 카운터 쪽에서 너 댓 명씩 모여 앉아서 고착 상태로 담배만 피울 뿐이었다. 조금 있으면 지하철 첫 차가 다닐 시간이다. 저들의 끓어오른 분노가 피로 때문에 식어가는 것을 눈치챈 나는 조금 더 구체적이고 상냥하게 말을 건넸다. 


 여기 보아하니 어젠 이 가게나 우리나 운이 없었던 것 같다. 몇 시간 동안 이러고 있었는데 들어오는 손님도 없고 우리밖에 없지 않으냐, 원래 공치는 날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쯤에서 서로 정리를 하자. 그들도 지쳤는지 누군가에게 전화를 했고 잠시 후 대형마트 냉동만두처럼 단단한 몸매의 중년 사내가 건물 지하 가게로 내려왔다. 그는 현재 상황을 잠깐 브리핑받더니 귀찮다는 듯 손을 공중에 휘저으면서 나갔다. 계단을 오르기 전 나와 눈이 맞았다. 상어 같은 눈이었다. 안구 주변도 근육인 것 같았다.  그는 J부장이라고 불리는 사람이었다. 부장이지만 실제로는 사장이라고 할 수도 있다. 아무튼 J부장의 승인을 통해 실제 실비와 영업 손해 비용으로 몇십 만원 얹어주는 수준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모터사이클을 타고 동쪽으로 갔다. 붉은 드레스를 입은 해의 여신이 산 중턱 너머로 사라졌고 드레스 끝자락에 산이 불타오르듯 석양 속에 잠겼다. 타이어 공기압이 빠진 것 같아 갓길에 세우고 점검을 하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익숙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J부장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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