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7월 23일 토요일
밤에 몇 번씩이나 화장실에 들락날락한다. 어제의 쇼핑 때문인지 몸은 천근만근이요 나의 허벅지는 말도 못 하게 부풀어있고 손과 발 또한 굽혀지지도 않을 정도로 퉁퉁 부어있다. 그가 내일을 위해 잠을 자야 했기에 맘대로 그의 곁으로 파고들어가 껴안고 할 수가 없다. 그래도 난 아프고 그에게 꼭 안기고 싶다. 그래도 참는다. 그냥 얌전히 옆에서 잠만 잔다. 어느새 날이 밝고 7시가 다 되어간다. 빨리 일어나 그의 출근 준비를 해주어야 할 텐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힘들게 일어나 앉아 멍하니 그의 자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아니, 내가 여보~ 했는가 보다. 여하튼, 피곤해서인지 잠이 모자라서인지, 그는 에 - 잌 하며 이불을 훽 머리 위로 덮어버리는 게 아닌가.
세상에. 이게 모야? 이게 웬 모욕이란 말인가? 아니? 앗? 난 왈칵 눈물이 솟는다. 그는 금방 그러나 잠결 목소리로
혜영아, 그러지 마. 착하지. 이리 와. 내가 안아줄게.
하며 자신의 화냄을 미안해하지만 나의 눈물은 그쳐주질 않는다. 마루로 나온다. 하염없이 눈물이 나온다. 온갖 서러움이 복받쳐 올라온다.
엄마, 아빠, 오빠, 남동생, 그리운 친정식구 생각이 난다. 나만 홀로 여기서 모하고 있는 거지? 엉엉 으앙 엉엉 난 그의 식사를 준비하면서 울고 또 운다. 정각 7시. 그래도 그를 지각시킬 수는 없으므로
조용히 안방으로 들어가 그를 깨우기 위해 TV 스위치를 누른다.
여보야...... 혜영아......
그가 일어난다. 부엌에서 햄을 굽고 빵을 굽고 사라다를 만드는 내게 마구 포옹해온다.
혜영아,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데...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나 아침잠엔 무지 약하잖아.
출근하는데 그렇게 안 좋은 얼굴 하지 않기.
그래도 난 속으로 눈물만 삼킬 뿐 아무 말하지 않는다. 그가 꼭 안아주자 눈물은 더욱더 퐁퐁 쏟아진다. 난 안 먹고 그 혼자만 아침식사를 하게 할까도 생각했지만 그러면 그가 식사를 안 할 것이다. 정말 엉망진창의 출근시간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함께 먹는다.
혜영아, 식사기도 해줘.
그래도 난 그저 침묵만을 지킨다. 빵만 먹는다. 그는 중간에도 여러 번 말을 걸지만 난 대꾸 안 한다.
자, 과연 나갈 것인가, 말 것인가? 매일 배웅해주던 것을 하느냐 마느냐? 그에게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의 출근길을 이렇게 망치게 해서는 안된다. 야구복 등을 챙겨주고, 어제 산 하늘색 티셔츠에 바지, 양말까지도 모두 챙겨준다. 나도 옷을 갈아입는다. 그의 아침 배웅을 그렇다고 마다할 수는 없지 않은가. 우리의 아침 데이트 길에 오른다.
나, 꼭 잡아, 혜영아.
계단에서 그는 마치 중환자를 모시고 가듯 배가 남산만 한 나를 부축한다. 밖에 나와 맑은 하늘, 맑은 공기를 쐬니, 그래, 아침의 나의 슬픔 따위는 모두 모두 사라져 가 버린다.
우리는 손을 꼭 잡는다. 아주 천천히, 천천히, 더욱더 천천히 통근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간다.
아구, 코피도 났어? 이를 어째.
그는 나의 얼굴을 이리저리 마구 쓰다듬어준다. 어제 퍼포먼스가 끝났다고 회사 이야기도 신나게 한다. 오래 씸통만을 부려댈 수 없는 나의 그이. 그는 선량하고 좋은 남자임에 틀림이 없다. 그렇게 울던 나는 너무나 밝게 웃으며 그의 배웅을 마친다.
우리 혜영이, 집에서 근무 잘하고 있기~
얼굴도 만지고 목도 쓰다듬어 주고 손도 어루만지며 그는 아주 아쉽게 작별을 한다.
전화할게!
화해의 악수도 신나게 한다. 몇 시간 후면 다시 만날 부부의 모습으로 보이지 않았으리라. 마치 영영 생이별이라도 하는 듯한 뜨거운 작별이다.
자, 어서 다녀와. 우리의 주말을 멋지게 보내자. 응?
1983년 7월 24일 일요일
비가 하루 종일 주룩주룩 내리고 있다. 나, 살이 더 쪄서는 안 되겠다. 정신을 차리자.
정말로 후진 중년 부인, 축 쳐져버린 중년 여성이 되어선 아니 되겠지 않느냐 하는 얘기다. 요즘 나의 폼, 아무리 아가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정말로 뒤뚱뒤뚱 걷는 모습은 도날드요, 씨암탉 걸어가는 폼이고 팔다리로는 여기 삐죽, 저기 삐죽, 살이 삐져나와 영~ 폼이 정말 말쌈이 아니다. 누가 나를 스물일곱 살로 볼까. 40대, 아니 50대로 볼지도 몰라. 허벅지는 부어서 그런 걸까. 살이 쪄서 그런 건가. 이제 아가 낳고 나면 수영을 다니며 살을 빼겠다고 내 나름으로 벼르고 있지만, 글쎄, 과연... 나의 좋은 신랑, 멋쟁이 신랑 그이는 회사 출장 리포트 작성하기에 여념이 없다.
좋은 밤, 싸이먼 & 가펑클의 노래도 아주 좋다. 저녁, 샤워까지 모두 끝내고 그이는 책상에, 나 그 옆 쏘파에 앉아, 그는 회사 것을, 난, 이렇게 일기를 쓰고 있다. 시간이 많아 글을 쓸 수 있겠다더니
정말 커녕이다. 회사에 사표를 낸 지 어느새 한 달이란 기간이 지나가 버렸다. 뚱뚱해진 것, 그렇게 비관할 것도 아니야. 배가 뮈어 지도록 주책맞게 너무 많이 먹는 것을 피하고, 자, 건전하게 생활을 해나가는 게야.
1983년 8월 1일 월요일
아줌마가 왔다. 신나게 일을 해치웠다. 집안을 온통 뒤집어 업고 난리를 치며 일을 해대었다. 책장을 모두 마루로 옮기고 공부방을 널찍하고 시원하게 만들었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비 오듯 흐르는 더운 날씨. 아~ 피곤한 하루 그래도 집이 깨끗이 정돈되니 정말이지 기분이 좋~ 다. 배불뚝이가 장을 들어내고, 무거운 쏘파도 들어내고, 난리 법석을 떨었다.
1983년 8월 2일 화요일
병원에 갔다가 엄마랑 점심도 먹고 이 얘기 저 얘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엄마 결혼할 때며
엄마가 나 낳을 때며... 한창 회사에서 일하고 있거나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었을 이런 평일 대낮에
엄마랑 보내는 한가한 데이트 시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미성옥 설렁탕을 땀을 뻘뻘 흘려가며 너무 맛있게 먹었다. 남대문 시장, 도깨비 시장, 시장조사랍시고 돌아다니고 또 돌아다니고, 이 무더운 날씨에 말이다.
아~ 정말이지 마지막 집에 올 때는 죽는 줄만 알았다. 무척 피곤하여 우리 여보야가 밥상을 차렸다. 아주 맛있게 먹은~ 김치와 멸치만의 반찬.
1983년 8월 3일 수요일
너무나 너무나 덥고 또 덥다. 엄마랑 감자를 삶아 먹었다. 매우 맛있게 삶아졌다. 아, 푹푹 찌는 이 무더위여, 대구가 39도를 기록했다. 서울도 내리 35도 이상이다. 엄마랑 더위에 지쳐 제대로 아가 계획도 못 짰다. 너무 더워서 시장 가는 것을 미루다 미루다 저녁 늦게야 갔다 왔다. 그래서 더위에도 지치고, 장보는 데도 지치고. 난 우리 신랑에게 너무나 피곤에 지친 모습을 보여주었다. 땀을 그야말로 비 오듯이 뻘뻘 흘리며 들어오는 그에게 말이다.
설거지도 못하고, 샤워만 하다가 결국 난 뻗어버렸다. 나 때문에 그의 생활리듬이 깨졌을 것 같아 미안하다.낮에 많이 힘들어도 그가 올 즈음에는 쌩쌩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주부의 생명 이리라. 아, 더운 날씨는 정말이지 나를 지치게 만든다. 회사에서 정 차장에게 싫은 소리를 들었는가 보다.
에잇, 담배. 홧김에 끊어봐-?
그렇게 두 시간을 버티더니 결국 두 대를 피워 물기에 이르렀다. 너무 덥다.
1983년 8월 4일 목요일
더위 속에 흐느적거리다 지나가 버린 하루. 너무 더위에 지쳐서 그의 뒷정리도 못해주었다.
일이나 공부에 빠져야 한다. 자~ 이겨내자.
1983년 8월 5일 금요일
공부를 열심히 하자꾸나. 훗날 후진 여성으로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난 이 나의 삶에 자신이 있다.
누가 무어라 해도 흔들리지 않고 우리 착한 그이랑 멋지게 꾸며볼 자신이 말이다.
너무나 더운 하루. 오전 중에 끝내고 타임지를 읽기 시작하려 했으나 주부생활 요런 잡지가 더 끌려
뒹굴뒹굴 읽다 보니 어느새 그가 온다. 무언가 공부를 했을 땐 기분이 상쾌한데 이런 잡지를 하루 종일
뒤적였을 땐 영 아니다. 쓸모없는 인간이 된듯한 요 찜찜한 감정. 그의 뒷정리를 다 해준다. 알차게 공부하는 생활. 책을 읽는 여자. 그것이 중요하지 뭐.
1983년 8월 6일 토요일
여전히 푹푹 찌는 더위. 지구가 뜨거워지고 있는가 보다. 찬물에 쫙쫙 샤워를 하고 나도 어느새 금방,
방과 마루는 열기에 뜨뜻해져 있고 몸도 어새 또다시 뜨거워진다. 부쩍부쩍 나는 땀이여. 시어머님과 아버님께서 아가 이불과 기저귀, 배냇저고리, 방수요 등을 사 갖고 올라오셨다.
아들을 꼭 낳아야 한다.
많은 부담을 주고들 가신다. 이상한 생각을 더 이상 진전시키지 말자. 그래, 난 좋은 우리 그이 옆에서
훌륭한 내조자의 꿈을 안고 한 발짝 한 발짝 나의 이 삶에 힘차게 도전해가리라. 공부하는 집, 책이 끊이지 않는 집. 그래, 그거면 됐어. 우리 그이가 날 많이 사랑하잖아?
1983년 8월 8일 월요일
엄마가 오셔서 옷장을 말끔히 정리해주셨다. 책만 보지 말고 이런 것들 잘 정리해놓으라고 야단도 맞았다. 너무나 더운 때에 너무나 많은 일을 했다. 김치도 담갔다. 너무 더워서 현관문을 열어놓고 현관에 물을 끼얹어가며 맛있게 저녁식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