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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뜰 Dec 19. 2018

임신8개월 그리고 퇴직생활


1983년 6월 11일 토요일


"신랑보구 맛있는 것 많이 사달라고 해. "

아줌마의 배웅을 받으며 

새로 맞춘 나의 예쁜 임부복을 입고 
머리도 예쁘게 빗고 화장도 정성껏 하고
기대에 부풀어 길을 떠났다. 


공군사관학교, 대방여자중학교 앞, 
삼성종합건설에서 짓는 
삼성아파트 모델하우스. 

뜻밖에도 동우와 상렬 씨를 만났다.  
너무나 말라있었다. 상렬 씨.  

"배가 많이 나왔군요. "

대학 때 방송국에서 지지고 볶고 하던
친구들을 배가 남산만큼 불러 마주치는
느낌은 참으로 묘하다. 

17평, 예뻤지만 공간이 좁고 
그리고 동네 공기가 맑지 못하다. 
주위가 지저분한 게 공장지대 같기도 하고 
영 마음이 내키질 않는다. 
1순위까지 충분히 내려올 수 
있을 것도 같다. 

1983년 6월 12일 일요일

우리나라가 축구의 왕인 우루과이를
2:1로 통쾌히 물리쳐 4강 진출에 나선다. 


그는 너무너무 좋아한다. 
스포츠란 그런 것이다.  
자기 일도 아닌데 저렇게 
좋아하니 말이다. 

1983년 6월 15일 수요일

천둥번개가 정신없다.  
전등불조차 나가려고 한다. 
무섭다.  

내일 한국과 브라질 축구가 있다. 
너무나들 우리가 브라질을 이길 듯이 
이야기하니까 꼭 질 것만 같아 불안하다. 
선수들이 얼마나 부담이 될까. 

1983년 6월 17일 금요일 

너무나 힘이 들다. 
아침에 일어나니 발이 온통 퉁퉁 부어있다. 
얼굴도 부었고, 불란서에서 수학했다는 
그 남자가 깎아준 머리임에도 불구하고 
머리와 얼굴은 조화를 못 이룬 채 흉해 보인다. 

1983년 6월 22일 수요일

이시형 박사의 '중년 여성' 칼럼 오늘 얘기는 
'독일 프로주부를 보라.'였다. 

청소기 부품, 하다못해 비누의 화학방정식까지 
알 정도로 완벽하게 자신의 영역을 
당당하게 지켜나간다는 것. 

요리와 정리정돈, 육아,
자녀교육, 돈 주고 할 수 없는 
그 귀한 것을 행하는 전문직의 주부. 

난 이렇게 책이나 봐서 될까?  
하는 쓸데없는 걱정만 하고 있었으니.
그래 적극성을 발휘할  곳은 
얼마든지 있다. 집에서 주부로서 말이다. 

1983년 6월 23일 목요일

새벽 6시도 안된 아주 이른 시각인데 
국민학생, 아주 쪼그만 학생들이 
아파트 단지 내의 휴지들을 주우며 다닌다. 
착한 학생들.

여름, 난 여름이 좋다. 
이렇게 느낄 수 있는 
맑은 새벽 공기가 있기 때문이다. 
일어나자마자 베란다 문을 열고 
맞이하는 신선한 공기. 좋아라. 

집에 있은지 여러 날, 
하루 종일 집에서 빨래와 청소, 
그리고 책을 읽는 것들과 씨름한다. 

직장인이던 내가 집에 있으니
낮에 영락교회에서 심방을 오셨다. 
직장 그만둔 것을 도리어 
그들이 아까와했다. 

그러면서도
'아가는 엄마가 키워야지. ' 
하는 데는 의견들이 변함이 없다. 

1983년 6월 25일 

안성 교육감까지 하셨던 그 멋쟁이 할아버지께서 
위암이시란다. 쎄브란스 병원에 입원 중이시다. 
모두들 위문을 가는데 난 배뽈똑이라고 제외되었다. 

1983년 6월 27일 월요일

엄마랑 병원에 갔다. 항상 OK.
너무 건강해하더니만 
내가 너무 나의 건강을 믿고 
책 읽고 왔다 갔다 하고 일을 많이 한 탓일까? 

"무슨 일을 이렇게 많이 했습니까? 
 아기가 많이 내려왔군요. "

그 못 참을 정도로 아팠던 것이 그래서였다. 
무거운 것도 얼마나 많이 들고, 
빨빨거리며 잘 돌아다니고 하였던가. 

눕는 것보다는 앉아있기를 더 좋아하던 나. 
타임지 영어단어를 찾고 
그렇게 난리를 피우더니 
결국 9개월에도 아기가 
유산될 수 있다 하지 않는가. 

이제 나의 실력은 
아가를 낳고 나서도 
얼마든지 발휘할 수 있다. 
몸을 너무 못살게 굴지 말자. 


아, 미성옥에서의 그 맛있는 설렁탕. 
엄마랑 아주 맛있게 먹었다. 

엄마도 암 검사를 하셨는데 금요일에 결과가 나온다. 
제발 아무 일 없으셨으면...

주위에서 많이들 신경 써주니 기분이 좋다. 
그도 너무나 놀란다. 
 
"누워있어. 누워있어."

바보, 항상 결의는 좋다만 
멍청하게 그렇게 의욕만 갖고 되나?
현명하게 앞뒤를 잘 살펴서 해야지. 
무어가 중요한가???
그래서 오늘도 와서 샤워하고 
많이 누워있었다. 

그리고 보니 정말이지 난 
너무나 나의 몸을 혹사했었다. 
아가 미안해. 

새언니도 엄마도 아빠도 놀라서들 
전화가 빗발치듯 하다. 
튼튼한 아가를 낳아야지. 

1983년 7월 1일 금요일

어느새 12시가 넘어가고 있다. 
설거지, 집안 청소, 목욕 밖에는 
한 것이 없는데 말이다. 
옛날엔 8시 9시면 모든 일이 
재빨리 끝났는데 그때처럼 
마음대로  못 움직이겠으니 
걸핏하면 우울해진다.

그땐 사타구니가 아픈 것 정도 
그냥 무시해버리고 마구 일을 해대었는데 
조산의 위험이 있다는 의사의 말 이후론 
함부로 행동할 수가 없다. 

신랑 일본 가는데 챙겨줄 것도 많은데.
일을 천천히 하려니 축축 쳐지는 게 
더 아픈 것만 같고 정말이지 미치겠다. 
내가 보기엔 정상인 것 같은데 
또 너무 운동을 않는 것은 아닐까? 

빨리 11일이 되어서 병원에 또 가봐야지. 
어찌 되었는가 검진을 해봐야지. 

오래 앉아있거나 빨래, 청소라도 하고 나면 
다리가 시작되는 부근, 
외음부의 뼈들이 빠개지는 듯 아프다.   
본래가 그런 것일까? 

조심을 해야 하는가? 
먹고 이렇게 운동을 아니하면 
그 에너지가 다 어디로 갈꼬? 
오동통, 그야말로 어떤 돼지가 되려는가? 
집에 안 있고 회사에 계속 나갔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임부용품 준비해얄 것도 많은데, 
이러고만 있느냐. 

자. 서두르자. 
우선 정신을 맑게 가다듬는 거야. 
자신 있게 이 생을 꾸려나가야지. 

그 환희에 찼던 삶이 
의사의 단 한마디에 이토록 
쭈그러들 필요까지는 없다. 

자, 건강하게!!! 
임신은 병이 아니니까. 

심한 무리만 하지 않고, 
깨끗이 치우고 열심히 사는 거야. 응. 
하나님 아버지 돌봐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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