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꽃뜰 Dec 20. 2018

임신 9개월 그리고 집에 갇히다



1983년 7월 4일 월요일

아가를 배어 몸이 무거운 자의 특권일까...
너무나 그야말로 팔자 좋은 하루를 보냈다. 

누워 뒹굴뒹굴 책만 읽으며 보낸  하루. 

박기원 씨가 쓴 자기 신랑 이진섭에 대한 이야기는 

감동적이었다. 신랑을 먼저 하늘나라에 보내고, 

여기저기 묻어나는 신랑의 체취를 호흡해가며 

부부간의 사랑이 물씬 풍기는 흐뭇한 글이었다. 



1983년 7월 11일 월요일

더 이상의 천국이 어디 있을까. 
왜 이리 한동안 우울했을까? 나는?

청소와 빨래를 10시까지 

아주 서둘러서 해치우고 

엄마랑 병원에 갔다.  


아가가 좀 내려왔지만 

조산의 염려도 없고 

아가가 좀 작지만 괜찮단다.  


움직여도 좋지만 

너무 많이 움직이지는 말란다. 

종종 길거리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은 전혀 예쁜 데가 없다. 

배가 불룩하니 아줌마 폼 그대로다. 

1983년 7월 12일 화요일

김동인 작 '운현궁의 봄'을 조금 읽었을 뿐인데, 

어느새 시간이 후딱 지나가 버렸다. 


아프지만 않으면 좋겠는데  

다리 있는 부분이 정말 많이 아프다. 


여고시절 함께 노래하던 친구들

에코우가 모인단다. 

이제는 모임에 나갈 수가 없다. 

몸도 그렇고 아프기도 하고.


장갑을 안 끼고 했더니 

손에 물집이 생기고 아프다. 

내일은 빨래를 해야지. 

무언가 대청소를 해야 할 텐데. 


이광수가 지은

 '문학에 뜻을 둔 젊은이들에게'

 라는 책을 사야겠다. 

'우신사' 책이었다. 3,000원. 

조금 깎아 달라고 해야지. 
부지런히 책을 읽어야지. 

그리고 또 써야 할 텐데. 

회사에서 함께 일하던 최정혜를 

슈퍼에서 만났다. 무엇 맛있는 것을 

좀 사주고 싶었지만 


어느새 나는 100원 200원에 

발발 떠는 짠순이 아줌마가 

되어있었다. 고마운 아이인데. 


1983년 7월 13일 수요일

주룩주룩 비가 내리고 있다. 

지금 이 시각 10시 18분이다. 
청소도 설거지도 모두 끝났고 

요리프로까지도 다 본 상태.

어제 책방에서 사 온 이광수의 

'문학에 뜻을 둔 젊은이에게'

라는 책을 봐야겠다. 

책을 아주 빨리빨리 읽어 내려가야지. 

언제 또 이렇게 한가하고 좋은 시간이 

오게 될지 모르니까 말이다.  

장마가 다시 시작이란다. 

쫙쫙 쏟아지는 빗소리는 

나의 마음도 우리 이 조그마한 집도 

온통 깨끗하게 하여 주는 것 같다. 

1983년 7월 14일 목요일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데 난 또

아픈 다리를 이끌고 고층아파트까지 걸었다. 

무드도 좋지만 너무나 먼 거리였다. 

정말 힘들었다. 비는 여전히 쏟아졌다. 

그이 올 때 피곤하지 말아야 하는데. 

1983년 7월 15일 금요일

12시 반!

타임지를 받으러 1층으로 내려간다. 
분실이 심해서 배달될 시간에 

직접 가져오려는 것이다. 



있다! 이번 주 타임지가 우리 집 우편함에

잘 모셔져 있다. 즉각 다른 일 제쳐놓고

Cover Story 번역에 들어간다. 

2시간이면 끝날 줄 알았는데 

시간이 꽤 걸린다. 

'김수미의 요리' 하기까지 

일을 다 마치려 했지만 밀린 빨래까지 

하려니 그게 쉽지 않다. 


11시, 12시 다 되어서야 

끝이 난다. 그런데 배가 남산만 하니

청소하려 해도 움직이기가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그래도 하루하루, 

보람차게 살려고 애쓰고 있다. 

1983년 7월 15일 금요일

도파 친구들이 몰려왔다. 
대학 4학년 때였다. 
도서관에 가면 언제나 

남학생들만 한가득.

여학생은 가뭄에 콩 나듯 

한 둘. 그러다 보니
점심시간에 함께 근처 식당 가고
그렇게 저렇게 서로 눈이 맞고
가끔 미네르바 동산에서 

이야기 나누고 하다 10명이 모였다. 


서로 도서관 자리도 잡아주고
밥도 함께 먹고 힘들면 함께 

미네르바 동산에 가 앉았다 오고


급기야 나중엔 강촌으로 

여행까지 가게 되었으니
이름하여 도파 도서관파. 

묘경이, 영란 언니, 정희, 

경배, 정임 씨, 인원이....


우리 집에서 저녁도 먹고 

과일도 먹고 아이스크림도 먹고 

우리 신랑이랑 이야기도 했다.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는 친구들. 


우리 신랑을 보고는 

너무들 웃음보를 터뜨려댔다.  

아주 멋있게 우리 신랑은 

그 애들을 맞아주었다. 

다리가 많이 아프다. 

아니 다리와 배가 연결되는 곳, 

외음부가 무척 아프다. 

자주 일어났다 앉았다 해서 

그런가 보다. 

아가는 여전히 뱃속에서 

이리 쿵쿵 저리 쿵쿵 

신나게 뛰어놀고 있다. 

밤 12시가 되어서 샤워, 

아주 찬물에 샤워를 쫙쫙하고, 

큼지막한 요에 돗자리 깔고 

시원하게 누워 이불을 푹 덮고 

이것저것 재밌는 이야기를 하다 

잠이 들었다.  


신랑과의 대화의 시간이 

너무 짧다. 


아, 그래도 보람찬 하루하루, 

공부를 해서일까?  


아기 낳을 일에 대해서도 

두렵지 않다. 

1983년 7월 16일 토요일

"혜영아, 차 타느라고 지쳐버렸어. "

우쒸, 토요일인데 

6시가 다 되어서야 전화.

 

"어디야?"

"여기 잠실. 통닭 먹을래?
통닭 사다 줄까? 수박? 

켄터키 치킨? 빵은?"



버스정류장에서 내렸다는 그는 

이것저것 주워댄다. 난 계단을 

오르내리려면 다리가 많이 아프지만 

그를 1분이라도 빨리 만나기 위해 

집을 나선다. 
  
웬걸, 걸어도 걸어도, 

한 손에는 수박, 한 손에는 가방, 

통닭 등을 들고 덜렁덜렁 걸어와야 할 

우리 그이가 안 보이는 것이다. 

결국 OB광장, 지하도까지 건너 

정류장까지 갔건만 보이지 않는다. 

아, 다리도 아프고 실망도 되고, 

터벅터벅 돌아오고 있는데

저기 우리 집 쪽에서 누가 손을 

흔들어대며 온다. 그다. 


아, 모야?

우린 텔레파시가 이렇게

안 통하는가? 마중 나올 때마다

길이 어긋난다. 


벌써 집에 들어갔다 나오는 길이라며

그 배를 가지고 조심하지 않고 

나왔다고 도리어 막 모라 한다. 


맛있는 수박이다. 그가 TV를 본다. 

난 책을 읽고 공부를 할 때만 

기쁨을 느낄 수 있다. 


그에게 TV를 끄고 

책을 읽자고 한다.  


나의 집에서의 생활도 

점차 리듬을 잡아가고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