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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뜰 Dec 21. 2018

임신 10개월 드디어 자궁문이



1983년 8월 9일 목요일

비가 주룩주룩 내린다. 머리 파마를 하러 갔다. 몸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앉아있기가 너무나 힘이 들다. 그래도 우리 아가와의 첫 대면을 멋있게 하려고 참았다. 그런데 멋있기는커녕 뽁씰뽁씰 정말 아줌마가 되어버렸다.


옛날 동네 미용실 출처: http://m.news1.kr/photos/view/?1514870


1983년 8월 10일 수요일

조선호텔 스타 서비스 센터에서의 전화. 좋은 직장 있으면 연락 주겠단다. 전화번호 확인차 걸었다고. 외국인상사를 연결해주는 그 곳에 일단 신청해놓고 오길 잘 했다. 무언가 아가를 낳고도 내가 하려고만 하면 이 곳을 통해 일할 수 있겠다 싶으니 기분이 좋다. 


빨리, 엄마가 되는 신기한 기쁨을 맛보고 싶다. 우리 아가와 만날 날이 일주일 내지 이주일 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 모든 일을 그것이 힘든 일일지라도 짜증이 아니라 기쁨으로 받아들이리라. 

 

80년대 잠실주공아파트모습  출처:http://blog.daum.net/80150256


복숭아를 천 원에 13개 받아오고, 알이 너무 작고 맛이 없어 다시 봉투에 싸들고 나갔다. 앗, 그런데 그 복숭아를 팔던 사람들 아파트 경비들과 문제가 생겨 파출소까지 끌려갔단다. 경찰과 함께 나오는 그들을 보니 


아저씨, 이것 너무 작고 맛이 없어요.

할 수가 없다. 

1983년 8월 11일 목요일

병원에 갔다. 자궁문이 조금 열렸단다. 이제 정말이지 오늘, 내일이다. 예정일도 열흘 밖에는 안 남았고, 몸무게가 지난 주보다 줄었다. 65kg이었다. 혈압도 정상. 모든 게 정상. 아가도 이미 쑥 내려와 있고, 나 같은 사람은 아주 쉽게 애기가 나온다고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신다. 

두렵지 않다. 나의 아가라는 새로운 생명과의 만남인데 고통 정도는 참을 수 있다. 그럼, 참을 수 있고말고. 죽는 것도 아닌데 뭐. 

햐, 고놈,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싶은걸. 

오늘따라 싱글거리며 아가가 정말 나오는 거냐고 내 배를 만져보며 신기해한다.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단다. 신랑의 역할에 대해서. 기저귀 가방을 들고 졸졸 따라다니기만 하면 된다 그랬단다.  


80년대 목욕탕모습  출처:s314.egloos.com/1307196 


우리 아가와 첫 대면을 잘 해얄텐데......


하더니 그 역시 목욕도 하고 이발도 하고 아기와의 만남을 열심히 준비한다. 내가 책을 보고 아기와의 첫 대면 그 중요성을 강조하면 


에이 그런 게 어딨어. 아무 것도 모르는 간난쟁이랑 첫대면 할 준비라니... 


안 듣는 척 하더니 그래도 아기와의 첫 대면이 떨리나 보다. 온갖 준비를 다 한다. 정말 신기하다. 한 생명이 태어나려 하고 있고 내가 그 역할을 맡아하고 있다니. 롯데백화점에서 어느 잘 차려입은 마나님, 아들은 절대 귀하게 키워서는 안 된다고. 자기 아들 속 썩인 이야기를 배부른 나를 보며 열변을 토했다.엄마랑 나는 재밌게 들었다. 


1983년 8월 12일 금요일

어젯밤 꿈속에서 아주 예쁘고 하얀 나비를 보았다. 그렇게 노란 나비며 하얀 나비 꿈을 꾸는 것 보아
딸인가 보다. 난 꼭 아들을 낳고 싶은데...... 아니야, 아들이건 딸이건, 잘 키우면 된다.  


1983년 8월 13일 토요일

의료보험 카드, 주민증, 산모 카드, 진찰권이 항상 준비되어있어야 한다. 



1983년 8월 14일 일요일

일요일. 어느새 해가 중천에 떴고 10시 반이다. 새벽부터 일어나 설친 나는 아침 식사 준비를 말끔히 해놓았다. 그는 아직도 쿨쿨 자는 중이다. 언제까지 잘까? 깨우지 말고 어디 일어날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보자. 

1983년 8월 15일 월요일

뱃속이 꾸물꾸물~ 오줌을 누어도 금방 또 마렵고 똥도 마렵다. 특히 앉았다 일어났다 하기가 너무너무 힘들다.   

1983년 8월 17일 수요일

남편 회사 동료 와이프를 은행가는 길에 만났다. 아주 활동적인 차림으로 아가랑 함께 나와 있다. 반가워하며 자기 집으로 잡아끈다.  배가 남산만 한 내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남편은 그렇게 
공부를 많이 한단다. 잠만 쿨쿨 자는 울 신랑이 걱정된다. 오줌 누러 가기가, 일어나기가 정말 힘이 들다. 

1983년 8월 18일 목요일

아가가 엄마를 많이 봐주어 무더위를 피하려 그러는가. 아직 소식이 없다. 배는 아주 많이 불렀고
아가는 그리 심하게 움직이지 않는다. 나 자신 움직이기가 심히 불편하다. 뒤뚱뒤뚱. 

1983년 8월 19일 금요일

엄마가 수제비도 해놓고 옥수수도 삶아놓으셨다는데, 청소와 빨래를 모두 끝내고 커튼까지 빨고 난 지금 난 살짝 잠이 들어버리고 말았다. 

걷기가 많이 힘들다. 게다가 버스까지 타려면......


그래서 친정에 안 가겠다고 했다. 그렇게 얘기한 지금 엄마가 많이 섭섭해하시는 것 같아 머리도 아프고 마음도 아프다. 가면 그대로 나의 모든 시간이 달아나버리는 것이 아깝다.  

뱃속의 아기가 꼭 딸 같은 기분이 든다. 많이 섭섭할 것 같다. 난 꼭 아들을 낳고 싶은데. 뒤뚱거리며 11시 반, 12시가 다 되어야 일을 끝내는 내가 우습기도 하지만, 이 리듬 잡힌 생활이 좋다. 집을 깨끗이 치워놓고 책을 읽는 그 맛이라니...... 이제 우리 아가가 나오면 이 리듬이 깨어질까? 다 주부 하기 나름이리라. 

1983년 8월 20일 토요일


반상회를 모처럼 다녀왔다. 야외에서 돗자리를 펴놓고 했다. 


그 옛날 반상회는 맛있는 다과를 준비해 한 달에 한 번씩 신랑들 집에 두고 엄마들이 모여 한밤중에 실컷 수다떠는 장이기도 했다. 출처: 경향신문 1976.6.1. 첫 반상회장면


나의 아가는 언제쯤 이 세상에 나오려는가? 훌륭한 엄마가 되어야지. 정말 얼마나 아플까? 
한 생명을 태어나게 하려면  어떤 고통이 따르는가 내 철저히 느껴보리라. 우리 아가도 그 깜깜하고 
좁은 길을 통해 세상에 나오려면 고생이 심할 것이다. 


자, 이제 엄마가 된다. 벼락부자를 꿈꾸는 것도 아니요, 너무 무리할 필요 없이 우리 그이 월급 내에서
책과 함께 하는 알찬 하루하루를 엮어가리라.


1983년 8월 21일 일요일

그랑 집에서 뒹굴뒹굴하다가 5시부터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바캉스 가는 것 같아. 

이것저것 필요한 걸 꺼내니 어느새 우리 신랑이 모두 가방으로 싸놓는다. 정말 어디 이사라도 가는 사람들처럼 우리 둘의 짐은 많다. 책도 많다. 혼자 가려던 것보다 얼마나 좋은가. 둘이서 함께 짐을 싸니 
참 좋다. 셋방살이를 사는 것 같다. 친정 조그마한 방 하나에 우리의 살림을 차렸다. 자, 이제 정말로 아가 엄마가 되려는 순간. 주님, 도와주십시오. 훌륭한 엄마가 될 수 있을까. 노력해야지.

1983년 8월 22일 월요일

오늘이 바로 나의 아가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로 한 예정일이다. 

웬일?

난 하나 아프지도 않고 아무 소식이 없다. 병원에 갔다. 의사 선생님께서 증발. 2시에야 다시 가서 
진찰을 받아야 했다. 덕분에 엄마랑 신나게 데이트했다.  병원 주위 명동거리를.


83년 명동 신세계 백화점앞  분수 출처:https://www.uuoobe.kr/amina/print.php?bo_table=free&wr_id=392752


12-3kg 늘은 것 같다. 자궁문은 지난주와 똑같이 조금밖에 안 열렸단다. 2주일까지는 기다려봐야 한단다. 이제는 줄넘기라도 하든가, 마구 돌아다녀야겠다. 더위의 고비도 지났고 아주 춥다시피 선선하다.
효자, 효녀가 나오려는가. 아주 엄마가 좋을 때에 나와주다니.


명동 새초롱미용실의 남자미용사 이상일 지금보니 꽤 유명한 분이시다  출처:김완선만드는사람들 https://m.blog.naver.com/joopid/221180740604


새초롱에 가서 그 남자 미용사, 이상일 미용사에게 아주 시원할 정도로 머리를 쌍둥 쌍둥 다 잘라 버렸다. 동네에서 파마해서 꼭 아줌마 같던 머리를 정말이지 아주 시원하게, 그리고 아주 세련되게 만들어주었다. 돌아다녀도 된다는 의사 말에, 아니 이제는 아가가 나와도 되겠다 싶어 정말 많이 아픔에도 불구하고 신세계로 남대문 시장으로 도깨비시장으로 아주 많이 많이 돌아다녔다. 

큰 신우가 나폴레옹 침대를 사주시겠단다. 신세계 앞 벤치에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엄마랑 지난 얘기들을 하였다. 아주 기분 좋게 부는 바람에 정말 좋은 시간이었다. 좋은 하루, 편안하다. 속도 시원하다. 엄마가 새언니의 인간됨을 자주 많이 칭찬하신다. 배가 종종 떙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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