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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뜰 Dec 18. 2018

임신 6개월 그리고 퇴사 결정

1983년 4월 14일 목요일


봄비가 하루 종일 촉촉이 대지를 적시고 있다.
두 근에 1,000원을 주고 남대문 시장에서 사 와
우리 둘의 디저트로 닦아서 설탕에 재 놓는다.
꼭지를 따면서 집어먹다가 이상한 지푸라기를
고만 꿀꺽 삼켜버렸다.

아니, 혀가 골라내어 끄집어내려는데
식도의 연동 작용 때문인지 그대로 넘어가버렸다.

급성 맹장염이 걸리면 어쩌나 해서 걱정이 된다.
아기에게 많이 안 좋을 텐데 말이다. 어쩌나?

문정이가 수술을 했단다.
"얘, 아기가 늙는가 봐. 안 나와."
하더니만 월요일에 수술을 해서 낳았단다.
병원에서 일주일은 더 있어야 할 것 같단다.

아까 넘어간 그 지푸라기가 계속 걸린다.
맹장에 무언가가 쌓이면 안 될 텐데......
그러면 우리 아가한테 큰 타격일 텐데......

이제부턴 절대 일하면서 집어먹지 말아야지.
아가야, 미안해.

1983년 4월 18일 월요일

삼성 요리 전집 33권짜리에 그가 아주

멋진 말들을 적어서 나의 생일선물로 주었다.



정말 꼭 갖고 싶었던 요리책이다.

음식 만들면서 부담 없이 맘대로 꺼내

볼 수 있는 아주 작은 책들이다.  


부엌에 쏙 들어가게 작은 철제 랙까지
함께 딸려왔다. 참 예쁘고 보기 좋다.  

김수현 '유혹' 소설이 너무 재밌다.

1983년 4월 19일 목요일

아, 피곤하여라.
이번 주에도 목요일까지 스케줄이 꽉 짜여있다.
숙경이가 자기 결혼식에 오라 한다.
그러나 그 시간에 은경이 결혼식에서  
노래선교단 친구들이 축가를 하기로 했다.
배불뚝이인 나도 말이다.

"나.. 후지지?"
하릴없이 그를 볶는다.

1983년 4월 20일 수요일

연희가 너 정말 생각 한번 잘~ 했다고 좋아한다.
아가를 위하여 직장을 그만두기로 결정했다.
지금부터라도 집에 있는 듯 마음이 편하고 아주 좋다.


28일에 함께 병원에 갈 예정이다.
고지식하게 난 의사가 방문하라고 한

28일을 꼭 지키려 하고 그는

하루 이틀 아니 일주일까지의 오차는

괜찮다 한다. 그래도 난 28일을 주장한다.
나는 정말 고지식한 것 같다.  

어제 그 불란서에서 수학했다는
이상일이라는 남자 미용사에게서
다시 머리를 잘랐다.


너무나 쌍둥 잘라버렸다.
꼭 그야말로 선머슴 같다.

'내가 직장도 안 다니고 과연

살림만을 잘해나갈 수 있을까? '


살짝 드는 불안감.  
그래도 자신감과 흥분이 뒤섞여
기대 속에 내가 직장 생활을 그만두게 되는
5월 말을 기다리고 있다.

행복과 사랑과 건강이 넘치는 가정을
꼭 이루어보리라. 육아도 잘할 수 있을거야.


1983년 6월 7일 목요일

오늘은 하루 종일 많이 슬픈 날이다.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막연한 불안 같은 것이
마음을 깊게 무겁게 내리누르고 있다.


직장에서 물러난다는 데 대한,
그 미묘한 감정.



아무리 아가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그렇게 자꾸 합리화시키려 하지만,


그러나 무언가 일이 없는 자로,
돈을 아니 버는 자로 전락한다는 것에 대해서
무한한 회의와 슬픔이 깃든다.

안경이도 시댁이 잘 살고,
또 신랑이 돈 잘 버는 의사이니까
걱정 없이 들어앉아도 될 터이고,

인원이도 신랑이 의사요,
시댁 또한 괜찮게 사니
편안히 들어앉아도 되고,

혜경이도 정숙이도
모두 모두 그러하건만
난 편안히 들어앉을 처지가
아닌 것만 같아 마음이 무겁다.


'우리는 돈이 똑 떨어지면
그 누구에게서 도움을 받을까?'

덜렁덜렁 그저 기분 좋은 우리 신랑.
앞으로 돈이 많이 필요할 텐데
아가를 키우고 알뜰살뜰 집에서
살림을 하는 것이 더욱더
이득이 될 것이라는 우리의 결론에
왜 이다지도 회의가 생기는가.

기분 좋게 맞으려던 우리 신랑에게
그러나 난  또 얼굴을 파묻으며
"여보, 나 슬퍼."  한다.

그는 깜짝 놀라며 나를 달래주기에
여념이 없다. 참 좋은 나의 신랑.

"본래부터 집안에 들어앉은
여자는 그럼 어떻게 되는 거야?"

그는 그런 식으로,
집에서의 일이 더더욱 중요하다고
나를 달래준다.   

"혜영이가 벌어서 부자였나?"

그렇게 그는 나의 수입을

무시하는 말을 하기도 한다.
나의 마음이 편하라고.


그러나 어쨌든 맞벌이를 하니

신입사원이면서도 그의 월급은

이사님 월급보다도 많은 결과를

낳곤 했다.  

콩나물을 한 시간에 걸쳐
한 개 한 개 다듬으며
생각을 정리해보지만
그러나 마음은 그리 쉽게
달래지지 않는다.

"여보~ 내일 국거리는 내가 다 마련했어."

쏘파에 앉아 발바닥 굳은 살을 뜯어내어
책위에 모아놓으며 고깃국을 만들
재료라고 허허 좋아한다.

자, 나도 이제 활짝 웃음을 웃고
이 불안을 떨쳐버리자. 바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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