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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뜰 Dec 27. 2019

마냥 수다

백화점에서 비싸게 구입한 르베이지 새카만 원피스, 새카만 코트. 비록 몇 년째 입고 있지만 언제나 이 옷을 입으면 내가 아주 멋진 여자가 된 느낌이다. 연말 송년회가 있을 때 그리고 교회 갈 때 난 이 옷을 꺼내 입는다. 새카만 니트 원피스 위에 옛날 스위스 여행 갔을 때 스와로브스키에서 구입한 하얀 브로치도 단다. 새카만 원피스 위에서 하얀 브로치는 더욱 반짝반짝 빛난다. 하하 난 이거 잃어버릴까 봐 잘 달지 못했었다. 푸하하하. 그리고 안에 털이 달린 앵클 부츠. 그렇게 얌전히 옷을 거실에 준비해놓았다. 난 새벽에 떠나야 하니까. 호텔 레스토랑에서 시작되는 우리의 배화여중 친구들 송년회 모임을 위하여. 그러다 반짝 드는 생각. 맞아. 옷을 바꿔야 해. 여긴 시작만 호텔이지 그러고 나서는 주야장천 한 아이 가게에 모여 마냥 수다를 떠는 모임인데 말이다. 친구들은 어떻게 입고 올까? 그래 밤늦게까지 이어질 그 모임에 이 정장은 어울리지 않아. 시작엔 맞겠지만 오랜 시간 뒹굴다 보면 옷도 망가질 것이고 나도 편치 않을 것이다. 그래서 부랴부랴 꺼내 놓은 옷들을 옷장 안으로 다시 다 들여놓고 그리고 담이 들어간 두툼한 바지에 따뜻한 스웨터 어그 부츠 패딩 잠바 등을 챙긴다. 아, 얼마나 편한 복장인가. 맘껏 뒹굴 수 있겠다. 호홋


팔순이 되어가는 남편 직장 모임의 한 분이 말씀하셨다. 책에 보니 나이 들어갈수록 모임을 정리하라는 내용이 있어 많은 모임을 없애고 우리의 그 모임 한 개만 딱 남겨두셨다고. 그럴까? 난 의문이 들었다. 나이가 들 수록 그 나이에 어디 새로 모임에 들어갈 수는 없을 테니까 해오던 모임을 자연스레 깨질 때까지 놓아두어야지 일부러 그만 둘 필요가 있을까? 함께 한 많은 세월을 어찌할 것인가? 난 모든 모임을 꽤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이고 그래서 오늘 중학교 친구들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열차를 탄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다. 제주도에서도 오고 강릉에서도 온다. 제주 친구는 7시에 나와 비행기를 탔다 하고 나는 6시 50분에 나와 열차를 탔고 강릉에서도 열차를 탔다한다. 눈이 온다며 강릉 아이는 하얀 눈 쌓인 모습을 올린다. 흑백사진으로 만들고 멋져! 우리의 감탄에 흑백으로 일부러 만든 게 아니라 하얀 눈이 소복소복 쌓이면서 자연적으로 연출된 모습이란다. 와우 레알? 하하 하얗게 뒤덮여 흑백사진 모양으로 보이는 강릉발 열차 밖 풍경. 


서울역에 내린 나는 전철을 마다하고 친구가 알려준 길로 나선다. 옛날 서울역을 바로 보고 오른쪽에 엘리베이터가 있는데 그리 올라가면 우리 모임 장소까지 연결된 멋진 길이 있다는 것이다. 비가 부슬부슬 아니 보슬보슬 우산을 쓸까 말까? 비 내리는 서울역. 하하 이 얼마나 낭만적인 분위기란 말이냐. 그 옛날 새마을호 타고 드나들던 서울역 모습이 고대로 있다. 그래 여기서 우측을 보라? 엘리베이터가 있다. 그 옆으로 둥글둥글 계단이 있다. 그렇지. 나는 당근 걷는 길을 택해 빙글빙글 돌아 위로 안착. 뉴욕 스카이라인인가? 뉴욕 여행 갔을 때 이런 길을 걸었다. 도시 위 옛날 철교를 공원으로 복원 한 곳. 그때도 비가 올 때 걸었는데 이제 또 비가 온다. 우산을 써야 할까? 아직 망설일 정도로 부슬부슬 아니 보슬보슬 내리는 듯 안 내리는 듯 오고 있다. 여기서 신세계를 향해 쭉쭉 걸어오라 했지. 오호 나무들은 모두 짚에 싸여 겨울 옷을 입고 있다. 초등학교 때부터 중학교 고둥학교 대학교 회사. 서울 한복판에서 주름잡던 내가 웬 울산행이더냐. 울산에서 몇 년이냐. 문득 서울이 많이 그리워진다. 신랑 공장 발령날 때 남들처럼 남편만 내려가게 했으면 어땠을까. 하하 역사에 이프란 없다는데 마냥 하하 이상한 생각을 해본다. 에잇 쓸데없는 생각들.


고가를 걸어가니 끝나는 곳에 남대문 시장이 나온다. 걷고 걸어 우리의 수다가 한판 벌어질 호텔 뷔페식당으로 들어간다. 아주 일찍 만나는 우리를 선두로 사람들이 많이 모여든다. Y는 지방녀들까지 몽땅 올라오는 특별한 날이라고 자리배치에 여념이 없다. 모두 회장님 말 따라야 해. Y가 앉으라는 자리에 가서 앉는다. 12명 모두 모였다. 본격 수다 돌입이다. 하하 너희들 말 듣고 안 시키니까 정말 아무것도 안 해. 안 되겠어. 하는 H 말에 모두들 안돼 안돼. 내버려 둬. 이제 네 며느리가 아니야. 네 아드님의 아내야. 더 이상 네 아들이 아니라고. 네 며느님의 남편이라고! 하하 우린 여전히 아들 사랑에 폭 빠져있는 H에게 쿨한 시어머니 되는 법을 전수한다. 네 아들이 밥을 굶건 어쩌건 내버려 둬. 그런대로 다들 살아가. 더 이상 관여해선 안돼.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조언들을 아낌없이 해준다. 아니야 내버려 두니 안 되겠어. 아니야 내버려 둬야 해. 신경 끊으라고. 네 멋대로 해. 너 내키는 대로 해. 그야말로 양쪽 진영으로 나뉘어 설전이 오간다. 인간은 변하지 않아. 변해. 가르쳐야 한다고. 친정에서 못 배워왔으려니 해. 그냥 내버려두어. 하하 아 끝없는 며느리와의 관계 이야기. 


결국 밤 10시가 되어서야 헤어진다. 아침 11시 반에 만나 밤 10시라니. 그리고도 못다 한 이야기는 나중에 박을 하면서 하자~ 끝나고 나니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 하나도 안 나는 그야말로 쓸데없는 수다. 하하 수다의 진수는 바로바로 그렇게 쓸데없는 이야기라 하지 않던가. 며느리 이야기를 나눈다고 조언대로 따를까. 남편 이야기를 나눈다고 또 조언대로 남편 대하기에 적용할까. 자식 이야기에 적용할까. 아니다. 아닐 것이다 그러나 앞다투어 내놓는 자신들의 고민거리가 십여 명이 귀를 쫑긋하고 듣는 새에 사르르 녹아 버린다 할까 말하는 중에 해결점도 나오고 줄줄이 터져 나오는 문제만큼이나 그냥 답 되어 줄쥴줄줄 갑갑한 모든 것이 풀어진다. 누가 내 이야기를 이렇게 경청하고 훈계하고 조언하고 그럴까. 눈치껏 돌아가면서 이야기가 한 보따리씩 쏟아진다. 듣고 또 듣고 말하고 답하고 참견하고 그러면서 저녁도 먹고 풍성한 선물도 나누고 그렇게 속시원히 마냥 수다를 끝내고 헤어진다. 참으로 편안한 특별한 모임. 수다로 에너지 충전이 이토록 가능하다니. 푸하하하 수다 그것도 쓸데없는 수다 예찬론이라도 펼치고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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