쏴아 쏴아 무지막지 쏟아지던 비가 그친다. 갑자기 빗줄기가 가늘어지더니 부슬부슬 이슬 같다. 백화점에서 큰 맘먹고 산 우산을 접는다. 나무 손잡이와 꼭지가 매력적인 세련된 우산이다. 접어서 한 손에 드니 그 끝이 땅에 닿으며 자태가 우아하다. 역시 우산 하나에도 공을 들일 필요가 있다.
무교동 월드컵 클럽앞 버스정류장이다. 나는 집에 타고 갈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목을 쭉 빼고 버스가 오나 안 오나 무심코 보는데 저 멀리 걸어오는 여자와 남자. 헉. 그다! 척 봐도 알겠는 그의 모습. 새하얀 ROTC 와이셔츠. 군복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딱 균형 잡힌 몸매. 어색한 포즈로 무교동 그 부슬부슬 비 내리는 널찍한 인도를
여자와 걷고 있다.
흥! 상관없다. 에잇 비라도 쏴아 쏴아 시원하게 쏟아질 일이지. 왜 벌써 멈춘단 말이냐. 주룩주룩 내려라. 나의 맘 깊은 곳 후련히 씻어주렴. 비야 쏟아져라. 밤새도록 퍼부어라. 그에게 어울리지 않아.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여자야. 흥. 저런 여자를 좋아한다고? 무언가 어색한 모습 첫 만남일까? 소개팅? 미팅? 흥 아무렴 어때. 상관없어. 그렇게 여자나 만나고 다닌단 말이지? 그래 난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 집에 타고 갈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재빨리 나의 모습을 점검한다. 허리가 날씬해 보이는 파란 티셔츠와 긴치마. 매력적 우산에 기대어 서 있는 나의 모습. 흠 괜찮아. 흥. 나를 보았을까? 봤을 리 없어. 나를 보았다한들 알아보기나 하겠냐. 괜히 차분해진다. 흥. 모야. 저런 스타일의 여자랑? 흥. 전혀 어울리지 않아. 치렁치렁 저 긴 머리는 뭐야. 옷은 또 왜 저렇게 헤벌레~ 단정치 못해. 흥. 흥. 그래 그러라지. 나 또한 너에게 관심 전혀 없다고. 흥! 난 지금 남자를 만나고 그럴 때가 아니거든.
아, 그러나 그거 아니다. 난 며칠 째 그의 생각을 하고 있다. 엉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