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그를 왜 생각하냐고! 나도 몰라. 그가 왜 꿈에 나오는지! 잠들기 전 왜 그를 생각하냐고! 나도 몰라. 그가 자꾸 생각 나! 나중에 사귀게 되면 이야기할 거야. 밤마다 생각했다고.
영국 대사관에서 하는 정식 모임에 들어가기 위해 무조건 네 번 참석해야 하는 준비 과정. 명동 YWCA 회관이다. 소규모의 사람들이 모여 영어로 말하기 연습을 한다. 여기서 마지막 네 번째 되는 날 오분 스피치까지 마쳐야 드디어 정회원이 되어 영국 대사관에 입성할 수 있다.
오늘은 내가 이 곳에 오기 시작한 지 네 번째 날로 오분 스피치를 하는 날이다. 이따 오분 스피치 해야 할 걸 생각하니 시작부터 많이 떨린다. 시작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남자 둘이 들어온다. 정식 모임의 회장과 총무란다. 한 명은 하얀 ROTC 복장에 아주 짧은 군인 머리다. 그리고 한 명은 케쥬얼 복장이다. 하얀 와이셔츠 군복의 주름들이 칼날처럼 각이 서 있다. 헉. 멋지다. 게다가 실실 눈웃음이다. 오메. 정식 모임에 앞서 가끔 회장 총무가 이렇게 예비 모임에 들르는가 본데 마침 내가 5분 스피치를 하는 날에 이들의 방문이다. 더 떨리게 생겼다. 에구.
하얀 제복이 참으로 잘 어울리는 그가 나의 오분 스피치를 꽤 귀담아듣는다. 회장이라는 그가. 내가 왜 이곳에 왔는지, 나의 목표가 무엇인지, 나는 왜 영어를 잘해야만 하는지, 정성껏 준비한 나의 5분 스피치에 그는 유난히 공감하는 듯한 제스처를 한다. 기분이 좋다. 무언가 통하는 느낌이다.
그리고 떨리는 첫 정규 모임 참석이다. 부들부들이다 못해 오달 다달이다. 영국 대사관이기에 마구 들어가지 못한다. 문 앞에서 기다려 모두 함께 들어간다. 쎄실 극장 앞에서 다들 모이기를 기다린다. 일단 대사관에 들어가면 한국어는 안된다. 영국인 부부가 리더인 이 모임 룰이 그렇단다.
에잇 이런 건 아무것도 아냐. 난 영어를 해야 하니까. 그래 난 영어를 해야 한다. 내가 살 길은 영어뿐이기 때문이다. 영어를 잘하기 위해선 듣기, 쓰기, 읽기, 말하기를 병행해야 한다. 듣기로는 AFKN을 계속 들을 것이며,쓰기를 위해서는 영어 일기를 쓸 것이고, 읽기로는 Good News Bible을 읽을 것이다. 동그라미 얼굴에 팔다리 배 모두 선으로 된 귀여운 삽화가 있는 이 영어성경은 참 재미있다. 영어도 익히고, 성경도 읽고, 그야말로 일거양득이다. 그런데 말하기는 어디서 할 것인가? 누가 소개해준다. 영국대사관에 좋은 프로그램이 있다고. 그래서 무조건 도전한 거다. 기다리라는 쎄실 극장 앞에 서 있으니 회장이라던 그가 온다. 오늘은 내가 좋아하는 그 제복이 아니고 사복이다. 양복을 입고 있다.
"축하합니다."
그날 예비반에서 봤기 때문일까, 회장이라서일까, 반갑게 인사한다. 여기 정규 모임에 오게 됨을 축하한단다.
그 예비반 출석 네 번을 못해 오분 스피치를 못해 떨어지는 사람도 종종 있다며. 하하 나 합격? 떨리지만 소신 있게 크게 발표하리라. 나를 소개하는 5분 스피치. 무척 큰 홀에 사람들이 한가득이다. 나처럼 주로 학생들이지만 간간이 직장인의 모습도 보인다.
오늘의 뉴커머는 세명. 예비반 네 번 참석과 5분 스피치로 정규반에 합격한 신입회원은 여기서 다시 자기소개를 하는 것으로 정식 회원이 되는 것이다. 드디어 내 차례다. 부들부들 떨리는 맘. 어쩌나. 어디 한 곳에 눈을 고정해야 한다. 그래. 회장이라는 그가 나의 눈 편안한 곳에 보인다. 그도 나를 뚫어져라 보고 나도 그를 뚫어져라 본다. 라면 좋겠지만 하하 그가 나를 뚫어져라 보는지는 알 수 없다. 그냥 내가 그렇게 느끼는 거다. 나도 그를 뚫어져라 보는 게 아니다. 보는 듯 안 보는 듯 그러나 나의 목표는 그다. 목표가 있어야 대중 앞에서의 발표는 편안해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