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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뜰 Dec 26. 2018

57년생 한화그룹 근무 일기

1980년 3월 대기업 취직하다

1980년 3월 5일 수요일


두근두근 쿵쿵 쾅쾅 나의 가슴은 그야말로 요동을 치고 있다. 진정하자 진정해.  한국화약 그룹 종합기획실 홍보팀!  오늘 그 첫 출근이다.  어제 설명들은 대로 우리 아파트 앞 지정한 곳에 서 있으니 초원관광 통근버스가 온다. 당당하게 버스를 탄다. 두근두근  절로 얼굴이 빨개진다. 후다닥 빈자리를 찾아가 앉는다.  계속 세우고 사람들을 태우며 최종 목적지 서소문 서린호텔 앞까지 온다. 버스에 탄 모든 사람이 내린다. 나도 내린다. 대형 관광버스가 계속 도착하고 거기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온다. 거대한 출근 물결. 아, 내가 이 대열에 끼다니. 나도 이제 어엿한 사회의 일원이 되었구나.


77년 남대문 부근 출근길 풍경  사진출처:에펨네이션...서소문 출근풍경은 여기랑은 좀 달랐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이 물결처럼 움직였다.


초원관광에서 내린 사람들은 서소문에 흩어져있는 한국화약 그룹 회사들로 들어간다. 플라자 호텔로, 제일화재 빌딩으로,  그리고 내가 가는 하얀 타일 빌딩으로. 밑에 한일은행이 있는 하얗고 깨끗한 높은 건물. 지나다니며 저런 깨끗한 빌딩에 근무하면 참 좋겠다 했는데 오늘 내가 바로 그곳으로 출근한다.  


안에 들어가니  엘리베이터 앞에 쭈욱 길게 늘어선 줄. 드디어 올라갔던 엘리베이터가 내려오고 문이 열리며  단정한 제복의 곱게 화장한 아가씨가 인사하며 줄 서있는 사람들을 태운다.  몇 층 몇 층 안에 탄 사람이 말하는 대로 엘리베이터 단추를 눌러준다.  10층요~  두근두근 쿵쿵 쾅쾅


엘리베이터걸이 그 때는 회사의 엘리베이터마다 있었다. 사진출처: 신세계백화점


10층에서 내리니 오른쪽에 종합기획실, 왼쪽엔 경영관리실.  '나는 종합기획실로 오라 했겠다~' 안으로 들어간다. 넓은 곳에 맨 앞에는 여사원 그 뒤로 남자사원 또 남자 그 맨 끝에는  커다란 책상, 커다란 의자, 그리고 좀 나이 드신 분들이 계시다. 앞의 여사원에게 묻는다. 홍보팀이 어디예요? 저기 칸막이 뒤로 가란다.  가리켜주는 대로 안으로 들어가니 왼쪽으로 맨 앞에 빈 책상, 뒤에 남자사원 그 뒤에 남자사원 그런 줄이 또 네 줄인가 줄줄이 있는데 여긴 여사원이 한 명도 없다. 오른쪽에는 책상이 서로 붙어 있다.  


"아, OOO씨? 이리 오세요. "


빈자리 뒤에 앉아있던 예술가처럼 장발에 키가 크고 까칠하게 생긴 분이 나를 불러 그분 뒤에 앉은 배차장이라는 분께 인사시킨다.  배차장님은 나를 데리고 커다란 본부장님 방으로 들어간다.  아, 홍보팀 신입사원? 하시더니 앉혀놓고 이것저것 물으신다.  온 정신을 집중하여 듣고 자신 있는 목소리로 정성껏 대답한다. 많이 웃으신다.  잘했다. 배차장님은 그 방에서 나를 데리고 나와 그 종합기획실의 의자들 맨 끝에 있는 각 부장님들께 일일이 인사를 시키신다. OOO입니다. 크게 이름을 복창하며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나의 자리는 남자들만 있는 칸막이 쪽으로 들어 가 맨 앞자리. 내 뒤의 이대리님이 나를 데리고 회의실로 들어가 우리 팀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을 해주신다. '다이나마이트'라는 그룹 사보와 달력 카탈로그 등을 만드는데 18개의 그룹사가 있고 각 그룹사에는 주재기자가 한 명씩 있단다. 난 그분들과 접촉하여 원고를 요청하고 그 회사들의 기사를 받고 잘 검토하여 인쇄소에 넘기고 사진식자를 교정하고 책이 다 만들어지면 수령하여 각 계열사에 가져가서 주재기자를 통해 나누어주는 것 까지가 나의 업무란다.


우선 내가 해야 할 일을 가르쳐주시는데 너무 단순하고 시시하다. 그러나 최선을 다하여 아주 열심히 만든다. 무엇이냐?  스카치테이프의 가운데를 먼저 책상 모서리에 쫙 길게 붙인다.  그리고 위에서 아래로 또 아래서 위로 접어 넣어주어 아주 가늘게 양면테이프를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길게 좁혀 말아 둔 것을 가위로 잘게 잘라 편집할 때 사진 식자를 편의대로 잘라 붙이기 위한 것이란다. 열심히 테이프를 말아 여러 개 만들어 놓는다. 나의 직속 상사 이대리님께서 작업할 때 잘게 잘라 쓰실 수 있도록.  


그뿐인가. 놓여있는 책상 모습 그대로 그려진 조직도를 주며 그곳 사람들 직함과 이름을 빨리 외우라 하신다. 재밌게도 이름 밑에 출신 고등학교와 대학교가 적혀있다. 이대리님은 알고 보니 나의 대학 선배님이시다. 누가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가 한눈에 쫙 들어온다.


 1980년 4월 27일 일요일


주말이고, 또 여지없이 비가 내린다. 무슨 핑계가 필요할까. 나태와 권태를 부르면 그대로 오고 마는 것을. 이렇게 책상 앞에 앉기만 하면 되는데 그걸 못하고 누워버릴까? 무언가 추운 듯싶어 자리에 눕고 그리고는 지리멸렬하고 음탕한 생각 속에 빠지다 그대로 잠으로 떨어진다. 그런 잠의 결과는, 아침에도 마찬가지로 개운치가 않다는 것이다.


몰랐다. 이렇게 비가 오는 줄. 어제는 미도파에서 혼자 쇼핑을 했다. 친구들과 함께 가면 내가 보고 싶은 것 맘대로 실컷 못 보고 친구들 따라 그냥 움직여야 하는데 혼자 하니 물건을 충분히 보고 싶은 대로 다 구경할 수 있으니 재미있고 좋다.  그러나 딱 두 가지, 팬티와 머리핀은 잘 못 산 것 같다. 폼나는 우산을 한 개 구입했다. 생각이 깊지 못 한자들 난 그들을 경멸한다.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생생하게 어제 듣던 그 음률이 떠오르며 입에서 맴돈다.  


1980년 5월 1일 목요일


오늘은 배달된 다이나마이트지를 각 그룹사에 분배하는 날. 제일화재 빌딩 앞에 있는 산더미 같은 양을 9층 쇼우룸까지 옮기고 제일화재 주재기자에게 인수인계해야 한다. 모든 일을 마치고 나오는데  누가 내 손을 확 잡아끈다. 그다!  나도 혹시나 그가 보일까 살짝 두리번거렸으나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1980년 5월 4일 일요일


쓸데없는 생각임을 아는데도 자꾸 생각이 난다. 앙케트 지를 들고 그 옆에 앉았을 때, 그리고 5월 1일,  9층 쇼우룸에서 나오는 길에 나를 확 잡던 장면이.  커피를 함께 마셨다.  화요일이 빨리 기다려진다. 보고 싶다. 자꾸 생각난다. 나도 참 웃기는 여자다. 그 정도에 보고싶기까지 하다니? 정을병 씨의 '옆으로 걷는 광대'를 읽고 있는 중.


1980년 5월 11일 일요일


마음을 어떻게 정리해야 하는 걸까. 솔직히 말해 친구들보다 늦게 시집가기는 싫다. 그러나 너무 결혼에 조바심 내지 말자. 내 갈 길을 가자. 그리고 너무 내 옆줄 맨 앞에 앉은 J 와만 친하지 말자. 골고루 잘해 주어야 해.


늙은 내가 망령이지 내참. 중고생들이나 쓸 이런 노트를 사다니.  난혜가 준 일기장이 너무 불편해 새 노트를 샀다. 그 해의 일기장을 사는 건 나의 연말 행사인데 할 수 없지 뭐.  내 이야기는 얼마나 많고 많은가.  지금은 밤이고, 내일 출근 준비를 하고 있다.  아, 좋다.  좋은 만년필이 한 자루 있었으면.....


난 참 바보인 것일까. 무엇을 원하는 건지 그리고 어떻게 살려는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다. 내일은 도시락을 싸갈까?  반찬은?  그럼 후진 가방을 들어야 하는데 그건 싫다. 에잇 그냥 사 먹으련다.  나도 미선이처럼  점심시간에 혼자 나가 앉아있을 수 있을까? 모르겠다. 그 애는 참 독특하다. 그리고 용감하다. 혼자 있는 걸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난 혼자 있으면 사람들이 '쟤는 지금 왜 혼자 있을까?' 할 것만 같은데 말이다.  새로 산 이 노트는 그래도 대충 괜찮은데 뒷장에 너무 심하게 앞에 쓴 글자가 비친다. 거금 1,500 원이나 들여서 샀는데.


Smile!  의 좌우명이었다. 중학교 2학년, 아니면 1학년이라고 기억하는데 왜냐고 물어보는 선생님께 또랑또랑 잘도 대답했던 것 같다. 그때부터 난 철학이 있었던 것일까. 갑자기 그때 일기가 보고 싶어 진다. 보겠다.


1980년 5월 12일 월요일


월요일 아침 비, 내가 좋아하는 비가 억수로 쏟아지고 있다. 그래그래 땅콩 비스킷, 웨하스, 새우깡 탓인지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내 아랫배는 불룩, 전혀 신선한 감을 주지 못하고 있다. 똥배가 점점 더 나오는 것 같다. 미용체조는 이를 악물고 해야 할 텐데 술에 술탄 듯 물에 물탄 듯 그러고 있다. 이렇게 비라도 쏟아지면 마냥 걷고만 싶어 진다. 나의 취미생활은 과연? 여가를 부엌일로 밖에 못 때우는 걸 보면 분명 문제가 있긴 있다.


5월 12일이라는 오늘 하루에도 과연 내가 특수성을 부여할 수 있을까? 인간은 고독하기 마련이고, 괴롭기 마련인 것을. 회사 갈 시간은 다 되어가는데, 어째 쭈뿌등한게 선뜻 내키질 않는다. 그러나, 나의 사는 스타일 IGNORE! 그래, 무시! 나의 이런 지저분한 감정 무시!  비가 오고, 난 즐거울 수밖에 없는 거야. 그렇게 사랑을 베푸는 거야. 나의 튀어나온 똥배에도 불구하고 어디 쾌활하게 웃어보자. 12일이라는 오늘 하루를 특별하게 만들어보자.  '유혹자의 일기'를 어서, 어서 읽어야지.  오늘! 속으로 힘차게 뛰어들리라.  일기장아~ 이따 밤에 다시 만나. 그땐 너무 좋아 흥분된 마음으로 올께~


밤 10시 10분. 겨우 내가 이부자리에 들어온 시간. 무척 피곤한 하루. 특히 경인에너지 김용래 씨가 원고를 펑크낼 땐 정말 울고만 싶었다. 비가 종일토록 주룩주룩 내렸다. 아, 피곤해 정말. 우선은 나의 일에 열중할 뿐이야.


1980년 5월 18일 일요일 아침


사보기자인 나를 사람들은 사보이름을 따서 '다이나마이트 미스최'라고 불렀다. 사진출처:한화데이즈


내 이름은  '다이나마이트 미스 최'  어딜 가나 '다이나마이트 미스 최'라고 부르며 들 즐거워한다. 나도 좋다.


1980년 5월 26일 월요일


마음이 이럴 수 없게 산란하고 복잡하다. 내가 주장하던 삶의 태도는 어디 갔단 말이냐. 모든 것 차치하고라도 내 生은 내가 결정하는 것, 생각하며 사는 태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인원이에게 너무 많은 이야기를 했다. 말을 많이 하고 나면 꼭 후회가 따른다. 그날따라 인원인 어쩜 그렇게 맞장구를 잘 쳐주는지 난 별걸 다 말해버렸다. 아이고 어떡하나 나도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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