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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뜰 Apr 20. 2020

방부제 미모

<2016년 8월 2일>


내가 전화를 안 드렸다면 아무 말씀 안 하셨을 것이다. 의례적 체크로 전화를 드렸는데,

"내가 방부제를 먹었다 글쎄."

오잉? 내용인즉슨, 지난번 서울 갔을 때 엄마 장을 봐드리면서 요즘 꽤 맛있다는 종가집 동치미 냉면도 사다 놓았는데 오늘 마침 그걸 끓여드셨는가 보다.


"저거 칼국수나 그런데도 다 있던 건데, 네 아버지 돌아가시고 한 3년 내가 그런 걸 해 먹어 봤어야지. 냉면 사리 속에 조그만 봉투가 있길래 당연히 수프인가 보다 하고 먹을 때 국물에 넣었다. 그런데 다 먹을 때 까지도 국물 안에서 녹지 않고 새까만 게 탱글탱글 살아 있는 거야. 그래서 왜 안 녹지? 하고 자세히 봉투를 보니 '먹지 마시오'라고 쓰여있더라. 방부제였어. 나이가 실감 난다. 어떻게 그걸 먹냐. "

창피하다며 오빠나 동생에게는 절대 말하지 말라 하신다. 난 놀래서 빨리 그 봉투 째 들고 가까운 내과에 가시라 하고 일단 종가집에 전화를 한다. 상황을 설명하고 어떡해야 할까 묻는다. 여학생 같은 앳된 목소리가 '어마나, 어떡해요.' 마구 걱정하며 알아보고 다시 전화하겠단다. 십여분 후 전화가 왔다. 그런데 분명 같은 사람인데 처음 나의 전화를 받고 함께 놀라며 걱정하던 그 여학생이 더 이상 아니다.


"그건 우리 소관이 아니어요. 분명 먹지 말라고 되어있으니까요. 무어라 말씀 드릴 게 없습니다."

앗. 이게 뭐지? 어색하게 우리 소관 아니라는 말만 되풀이한다. 더 이상 대화나 상담이 아닌 일방적 통고 형태랄까. 알아보고 온다더니 상사에게 그렇게 지시를 받은 걸까. 85세 노인이 실수로 먹었을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당황하는 소비자에게 좀 자상하게 답할 수 없었을까. 병원을 가보라든가, 이건 어떤 어떤 성분이니 크게 걱정할 게 아니라든가, 여하튼 함께 걱정하는 차원의 상담이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함께 놀라 걱정하던 그 모습이 그 어떤 매뉴얼보다 나아 보인다.  


그런데 얼마 전 행한 치매 상세 검사 MRI에서도 아무 이상 없다는 진단을 받으셨는데 어떻게 그걸 수프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그 어떤 큰 병의 시초가 아닐까 은근히 걱정된다. 친구들은 아무 탈 없으시다는 말을 듣고 안심하며, 방부제 드셨으니 이제 늙않으시겠다고 깔깔댄다. 


"엄마~ 친구들이 이제 더 이상 안 늙으시겠대. 방부제 드셨으니 방부제 미모를 갖추 신거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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