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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뜰 Apr 25. 2020

고리타분하게 학보사가 뭐야

나도작가다공모

대학에선 방송국이 최고야. 방송국 가자.


Y는 고리타분하게 학보사가 웬 말이냐며 나를 방송국으로 잡아끈다. 대학 들어가 얼마 안돼 교내 방송국, 학보사, 영어신문사 세 곳의 시험이 동시에 치러지는 날 매우 복잡한 계단참에서 나는 Y와 딱 마주친다. 앗, 너? 혹시? 그치. 우리 불광동 과외. 초등 때 유난히 짓궂었던 그 애를 나는 즉시 알아본다. 학보사 간다니까 같이 방송국 시험 보잔다. 팔랑팔랑 팔랑귀 나는 그래. 가잣. 경쟁이 매우 치열한 방송국 시험을 보러 간다. 결과는? 내가 붙고 그 애는 떨어진다. 그렇게 나의 인생에서 무언가 가슴 설레는 글쓰기는 살짝살짝 빗나간다. 신문기자를 꿈꾸며 제대로 가다가 왜 발길을 돌렸을까. 프로듀서는 전문 글 쓰는 게 아니다. 음악을 선정하고 포맷을 짜는 게 더 주요 업무다. 난 사실 글이 쓰고 싶었는데 내참.  


아, 너도 빨강머리 앤 읽었구나?


중학교에 들어가 빨강머리 앤으로 단짝 친구가 된 K와 나는 본격 문학소녀가 된다. 함께 문학반에 들고, 세계명작을 읽어나가고, 서로 글을 써주고 낭독하는 둘만의 문학의 밤도 연다. 그렇게 글쓰기를 좋아하면서도 그게 바로 내가 잘하는 거며 내 적성이라고는 생각 못했다. 나의 직업으로는 더더욱 네버. 영어를 해야 한다가 머릿속에 쾅! 박혀있었으니 영문학과만이 갈 길이라 생각했다. 끊임없이 일기를 쓰고 그걸 다시 읽으며 재밌어하면서도 나의 갈 길을 국문과라든가 글쓰기라든가 그런 쪽으로는 절대 생각 못했다.


여고시절엔 또 애들이 몰리는 노래선교단에 응시해 합격한다. 내가 좋아하지도 잘하지도 못하는 노래와 신앙훈련으로 여고시절을 거의 다 보낸다. 가끔 문학반 친구들이 교내신문을 만들어 나누어줄 때는 그게 너무 부럽지만 이미 한번 정해진 길을 탈퇴하여 바꿀 엄두조차 못 내고 3년을 보낸다. 그렇게 글쓰기는 완전히 내게서 떠난다. 그래도 매 해 일기장은 한 권씩 남긴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 홍보실에 취직해 그룹 사보를 만든다. 드디어 글의 세계로 들어가는가? 그런데 헉. 그때 대기업들에선 사내 방송을 만들기 시작하였으니 우리 그룹에서도 사내방송을 시작하는데 홍보실에 그 과제가 떨어진다. 대학 방송국 피디 출신이라는 이유로 내가 차출되어 방송을 맡게 된다. 글은 외부 유명인사에게서 받아 회사 밖에 있는 스튜디오로 가 현직 유명 아나운서와 함께 일주일치 사내방송용 카세트를 제작하는 업무다. 내가 쓰는 글이라고 해봐야 중간중간 연결해주는 짧은 멘트뿐. 그렇게 본격 글쓰기와는 또 멀어진다.


세월은 흘러 흘러 결혼하고 아이들 키우며 전업주부만 하다 그 애들이 다 커갈 무렵 아이 러브스쿨로 갑자기 몇십 년 전 초등학교 동창들을 만나게 되면서 나의 글쓰기는 다시 전면에 나타난다. 속속 모여드는 친구들에게 난 옛날 우리 이야기를 쓰고 애들은 무척 좋아한다. 덩달아 흥이 나 더욱 열심히 글을 쓰지만 동창애들 몇이 볼뿐이다. 아니 우리 동창들은 많아 백 명 이상이다. 그래도 그게 끝이다.


우와~ 조회 수가 십일만 명이 넘었어.


프랑스 파리에서 직장에 다니는 작은 아들은 일 년에 한 번 정도 길게 휴가를 나온다. 작년 겨울 오랜만에 집에 와 뒹굴뒹굴 휴가를 즐기던 아들은 글 읽고 쓰기를 좋아하는 엄마에게 브런치를 강추한다. 그 애 덕에 알게 된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나는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뜬다.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내 글에 반응한다. 잘 쓰고 싶다. 늦었지만 제대로 글을 써보고 싶다. 옛날 일기장을 뒤진다. 큰아들 낳는 이야기에서부터 음악, 여행, 영어, 소설, 골프 등 쓰고 싶은 게 너무 많다. 그래. 좋아. 해보는 거야. 할 수 있는 만큼씩 매일. 조회 수가 늘고 구독자가 늘고. 그러면서 나의 글 쓰는 실력도 늘어가는가. 어느 날 올린 글이 십일만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읽히기도 한다. 난 너무 좋아 남편에게 소리친다. "여보, 우리 천명 넘기는 거 보고 너무 좋아하던 거 기억 나? 세상에 십이만 명을 향해 달려가고 있어~" 노력하는 만큼 보상이 주어지는 느낌이다. 그래. 난 이제 제대로 시작한다. 주먹을 불끈 쥐고 내게서 항상 살짝 비켜갔지만 절대 놓을 수 없었던 글쓰기에 박차를 가하리라. 생각만으로도 쿵쿵쾅콩 가슴이 설렌다. 그래! 본격 시작이다.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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