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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뜰 May 04. 2020

은퇴한 남편의 바둑 취미

남편은 바둑을 좋아한다. 그런데 친구를 불러서 두는 것은 아니고 기원에 가는 것도 아니고 주야장천 짬만 나면 바둑 TV를 보는 것이다. 문득 어릴 때 애들에게 바둑 가르치던 때가 생각난다. 겨우 네 살 다섯 살이었을까 그 어린애를 데리고 시내 한가운데 있는 유명한 바둑 기원에 다니며 아침마다 자는 애를 깨워 바쁘게 다니던 기억이다. 좀 느긋하게 놓아두지 그렇게 못살게 굴었을까. 남편의 바둑 TV 즐기는 것을 난 의례 그러려니 했다. 붙박이처럼 가만히 소파에 앉아 바둑 TV를 즐기는 남편. 문득 오늘에야 드는 생각. 아. 실제로 두는 것과 그냥 방송으로 보기만 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지 않을까? 


"여보~  여보가 상 받은 그 커다란 바둑판. 그걸 놓고 탁 앉아서 직접 두면 어떨까?"


남편은 회사 다닐 때 바둑 대회 나가 커다란 밥상 같은 오동나무 바둑판을 대상으로 받아온 적 있다. 물론 신혼 때지만. 그 커다란 바둑판을 지금까지 끌고 다녔는데 정말 크고 무겁다. 그렇다고 항상 그 바둑판 위에서 바둑 두기를 즐기느냐 그건 아니다. 그래도 신주모시듯 항상 정성껏 모셔온 바둑판이다. 그걸 놓고 혼자 주거니 받거니 바둑 TV를 보며 직접 둔다면 얼마나 괜찮겠나. 아,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나는 그렇다 쳐도 그는 왜?


"바둑알이 없어."


헉, 그랬던 거야? 바둑알이 없는 줄 알았어? 에고. 하긴 그는 바둑 TV를 보기만 하지 그걸 두는 건 잘 못 본 것 같다. 그런데 바둑 TV는 정말 열심히 본다. 


"아니야. 있어. 내가 잘 모셔두었는걸." 


내가 뒤적뒤적 찾으러 가려하자 


"쓸데없는 일 벌이지 마라."


점잖게 한마디 한다. 그럼 그렇지. 지저분한 걸 싫어하는 남편은 내가 또 바둑판 벌린다고 온통 어지를까 봐 지레 겁을 먹는다. 그래? 그렇다면 전자 바둑판. 그렇다. 버리기 잘 못하는 나는 아이들과 어릴 때 들고 다니던 자석 바둑판도 버리지 않은 채 아직 어딘가 고이 모셔놓고 있다. 바둑판 자체가 자석으로 되어있고 바둑알 하나하나에도 자석이 붙어있어 흔들리는 차 안에서도 절대 바둑알이 떨어지지 않아 애들과 아빠가 꽤 즐기던 바둑판이다. 자그마하고 야무지게 생겨 어디고 들고 다닐 수 있는 그 바둑판이 버리기 아까워 애들이 다 커서 떠났어도 어딘가 잘 모셔두었는데 찾아볼까?


찾아서 대령한다.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부담되는 오동나무 바둑판이 아닌 아주 작아 그가 앉은 소파에서 그대로 할 수 있는 딱 맞는 바둑판. 하하. 너무 좋아한다. 그럼 그렇지. 바둑 TV만 보는 것과 정말 두면서 보는 것은 차이가 클 걸. 오홋 남편 은퇴 후 24시간 함께 지내는 우리, 이제야 균형이 맞게 되었다. 난 노트북을 두들기고 그는 바둑알을 두고 아주 잘 되었다. 음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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