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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뜰 Jun 08. 2020

사라진 네 시간 반

아깝다. 너무 아깝다. 시계를 보니 아홉 시다. 내가 아까 일어났을 때는 네시 반이었다. 새벽에 눈이 떠진 황금 같은 그 시간을 버릴 내가 아닌데. 왜 그랬을까. 아, 왜 그랬을까. 하루가 이미 저만치 시작되고 말았다. 그때 일어났다면 꽤 많은 걸 할 수 있었는데. 아깝다.


잠을 더 자야 한다


문득 왜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안방에서 눈이 떠진 순간 난 옷과 노트북을 챙겨 들고 쿨쿨 자고 있는 그가 깨지 않도록 살며시 나왔다. 핸드폰을 들고 화장실에서 브런치를 클릭했다. 읽고 쓰고 신나게 할 수 있는 시간이다. 샤워할까? 하다가 문득 어젯밤 잠든 시간이 생각났다. 파리에 있는 아들이 전화하겠다고 한 시간이기에 정확히 기억했다. 새벽 한 시 반이었던 것이다. 앗. 그렇다면 겨우 세 시간. 이건 아니잖아? 잠을 더 자야지? 세 시간만 잘 수는 없지. 해서 방으로 살그머니 들어와 다시 나의 이부자리로 들어간 것이다.


살짝 눈 떠진 게 7시 반. 마침 이부자리로 가져온 핸드폰으로 브런치 글을 읽기 시작한다. 그래. 누워서라도 읽으면 되지. 그러나 읽다 어느새 잠들었는지 눈이 번쩍 떠져 시계를 보니 8시 반. 아. 뭐야. 귀한 시간 다 흘러가고 있네. 일어나야지. 그냥 누워서 읽도록 하자. 아까 읽던 글을 읽는다. 얼마안가 툭. 또 잠이 들었는가 다시 눈이 떠져 시계를 보니 아홉 시! 헉. 이게 뭐야. 귀한 시간이 다 지나가버렸어. 그때 왜 다시 잤을까? 시간마다 깨면서 왜 벌떡 일어나지 못했을까? 그야말로 해가 중천에 떴다. 아깝다. 오늘 하루 절반을 다 써버린 느낌이다. 새벽부터 정말 많은 걸 할 수 있었는데.


그럼 이제 어떻게 할까? 이렇게 후회만 하면서 오늘 하루를 흘려보내? 그건 아니지. 그래선 안되지. 이미 엎질러진 물. 역사에 이프란 없다 하지 않던가. 후회란 영 쓸모없는 것. 어제를 생각해보자고. 코너별로 집 정리 중인데 어제는 뒷베란다를 할 차례였다. 너무 어질러져있어서 밍그적거리다 결국 그가 산책 가자는 때에야 발동이 걸렸다.


여보 이제야 내가 발동이 걸린다. 나 뒷베란다 치우고 있을게 혼자 다녀와.
아 심심해서 싫다. 같이 가자. 시간 많은데 다녀와서 하면 되지.
그래도 발동이 잘 안 걸리잖아. 걸렸을 때 해야 해.
아, 그러지 말고 운동도 중요하니까 함께 가자. 걷자.
그럴까? 시간 많은데 그냥 함께 나가?


아니 그러면 오자마자 해는 질 것이고 닦고 밥 먹고 뭐하면 그대로 시간은 또 흘러가리라. 지금 부릉부릉 발동 걸렸을 때 해야 한다. 갈까 말까 몇 번을 망설이다 뒷베란다 가스레인지 밑의 커다란 장을 일단 확 열어젖힌다. 그래. 해야지. 하루 한 코너씩이라도. 언제 사두었는지 모를 율무에 수수에 찹쌀에 현미발아 쌀에 노란 콩에 녹두까지. 아니 이 안 보이는 곳에 뭐가 이리도 많아? 도대체 왜 이리 꽁꽁 숨겨두었을까? 건강에 좋다고 율무니 수수니 한꺼번에 잔뜩 사놓고는 그래도 어디서 들은 거는 있어 벌레 안 생기도록 생수병에 넣어 꼭 막아둔 것까지는 좋았는데 뒷베란다라서 사놓고 까맣게 잊은 것 같고 그런 채로 세월은 휙휙 흘러가버렸다. 찹쌀? 이거 도대체 언제 꺼지? 그런데 냄새도 안 나고 벌레도 없고 찹쌀 모양 그대로다. 그래도 안돼.  언제 샀는지 조차 기억도 안 나는데 버려. 베트남 G7 커피 누군가에게 선물 받은 것 같다. 잘 통에 담아두었는데 유통기한을 보니 2019년 10월. 아슬아슬 지났다. 아깝지만 버리자. 더 아까운 거. 이건 분명히 미국에서 사 온 건데. 작은 깡통에 들어있는 입에 넣으면 싸~ 하면서 입냄새 싹 가시게 하는 것. 헉. 이것조차 유통기한이 2019년 9월이다. 몇 개월이 지났잖아. 이런 건 유통기한 지나도 괜찮지 않을까?게다가 뜯지도 않았는데 놔둘까? 이 중국차는 도대체 언제 적 차일까? 놔둬도 될까? 차는 상하는 거 아니니까 그대로 둘까? 망설 망설. 한 개 한 개 들여다보고 버릴까 말까 망설이다 보니 산책도 반납하고 열심히 일했지만 겨우 뒷베란다 한 코너를 정리했을 뿐이었다.


자, 이제 내가 할 일은 가장 고난도의 작업. 집에 들어오자마자부터 현관문까지의 넓은 공간. 커다란 장도 짜 놓은 그곳을 집에 들어오자마자 눈이 다 시원해지도록 깔끔하게 만드는 일이다. 과연 발동이 걸릴 수 있을까? 꽤 고난도인데? 밭에서 신는 장화며 갈고리며 낫이며 호미며 그런 것들로 정신없이 어질러져있는 이 곳을 깔끔하게 만들 수 있을까? 안보이게 어딘가 들여보내야 하는데 이미 장 안은 꽉꽉 차 있다. 들통에 찜기에 남편의 음악용 케이블 박스에 안 쓰는 그릇들에 걸레까지. 걸레라. 난 걸레를 모아둔다. 못 쓰게 된 수건을 언젠간 베란다 창틀처럼 아주 지저분한 곳을 빡빡 닦으려고 모아둔다. 그러나 베란다 창틀까지 닦을 여유는 생기지 않아 패스. 그렇게 세월이 흐르며 걸레만 쌓여간다. 게다가 집 바닥 걸레질은 드드드드 돌아가는 자동 걸레로 세상 편하게 하니 무릎 꿇고 빡빡 문질러야 하는 저 수건 걸레는 안 쓰게 되지만 모아둔다.


장에 쟁여놓은 것들을 몽땅 꺼내보니 한심하다 한심해. 이러고도 살림하는 주부라고 할 수 있을까? 아, 해도 너무했다. 그러나 이렇게 자학만 하고 있을 수는 없지 아니한가. 그래. 늦었다고 하는 때가 제일 빠른 때라잖아. 힘을 내자고. 욕심부리지 말고 하루 한 코너씩만. 그래. 난 잘할 수 있어. 정리의 여왕이라 마법을 걸자. 안 해서 그렇지 내가 하면 또 얼마나 잘하는데. 그럼. 오늘 못하면 내일 하고 내일 못하면 모레 하고. 관심을 갖는다는 게 중요하다. 오케이. 파이팅!!!


<사진:시애틀의사진잘찍는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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