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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뜰 Sep 13. 2020

가끔은 엉망이고 싶다

코로나 집콕이 힘들어

우리 아버지는 밤이면 두 손 한 가득 맛있는 걸 사 오셨다. 그래서 오빠 나 남동생 삼 남매는 밤마다 아버지를 기다렸다. 술이 거나하게 취하셔서 무교동 무과수 제과점의 바게트 빵이라든가 동그란 크림빵이라든가 일식집에서 누룽지나 생선뼈 튀긴 것 얇은 나무 도시락에 싸인 것이라든가 아버지의 두 손엔 매번 다른 종류의 맛있는 것들이 가득가득 안겨져 있었다. 한밤중에 쓸데없는 걸 사 온다고 엄마는 뭐라 하셨지만 우린 그런 아버지가 너무 좋았다. 쓸데없는 거!  문득 그 쓸데없는 거가 그립다. 한 밤중에 쓸데없는 걸 마구 먹는 그런 일탈. 술이 거나하게 취해 제정신이 아닌 일탈. 마구 흐트러지는 일탈. 그런 게 갑자기 많이 그립다.


 그 그리움이 나의 화로 변했을까. 문득 너무도 규칙적이며 이성적인 우리의 삶이 지겹게 느껴진다. 아, 너무 재미없다. 이런 거 말고 무언가 짜릿한 그 무엇. 정신 나간 거 아냐? 하는 행동. 쓸데없는 먹거리. 그런 것들. 그런 삶의 삐끗거림이 그리워서였을까. 밭에 가봐야지 하는 그의 재촉에 그냥 화가 난다. 그냥 기분이 안 좋다. 난 좀 흐트러지고 싶다. 그럴 때가 있다. 그는 너무 반듯하다. 일생에 단 한 번도 흐트러지는 법이 없다. 우리 아버지는 밤이면 밤마다 정신이 뿅~ 살짝 흐트러지셨는데 말이다.


남편은 체질적으로 술을 마시지 못한다. 항상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다. 우리 아버지는 술을 참 즐기셨다. 우리 딸~ 하면서 내가 가는 날엔 소주를 이미 냉장고에 차갑게 준비해놓고 기다리셨다. 엄마의 아우성에도 나는 그런 아버지에게 갈 때마다 빨간딱지 진로소주 한 박스씩을 안겨드리곤 했다. 아빠는 건강을 위해 술을 끊으셔야 해. 가 엄마가 주장하는 아빠에게 술을 사드려서는 안 된다는 이유였고 그렇게 사느니 내 일찍 가고 말지 가 술을 계속 드셔야 하는 아빠의 이유였다. 엄마처럼 항상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남편은 엄마 편이다. 절대 아버지에게 술을 사드리지 않았다. 아버지는 술을 끊으셔야 한다고. 술 선물이 아니면 선물로도 안 쳤던 우리 아버지는 참으로 섭섭하셨을 게다. 술을 모르는 사위가.


그는 절대 내가 왜 화가 났는지 모를 게다. 하긴 나도 모르는데 그가 어떻게 알까. 그냥 왠지 기분이 그런 날인걸. 거기에 밭에 가자하니 더더욱 합리적이기만 한 생활에 화가 난 것이다. 그런데 싸운 것도 아니요 화낼 일도 없었는데 화를 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도 그냥 화가 나는 걸 어쩌겠는가. 그가 말하는 대로 밭에는 따라간다. 그런데 영 기분이 아니다. 나 머리 아파. 감기가 오려나 봐. 그래? 그럼 여기 차 안에 있어. 하고 그는 홀로 나간다. 일단 시간은 벌었다. 조금 눈을 감고 누웠다 창 밖을 보니 밭에서 갈고리를 들었다 놓으며 그는 바쁘다. 그래. 같이 해야지. 내가 혼자 이렇게 있을 수는 없지. 그런데 오늘은 그냥 착실한 삶이 싫다.


그래도 그 혼자 일하게 둘 수는 없지 않은가. 착한 마음이 오늘은 이긴다. 그래서 차 문을 열고 나와 트렁크에서 커다란 감색 장화를 꺼내 신고 그가 일하고 있는 밭으로 간다. 잡초는 그야말로 극성을 부리고 있다. 덩굴로 된 잡초는 나무들 사이에서 부직포 위까지 올라와 완전 풀 숲을 이루고 있다. 그가 낫을 주며 가운데를 끊으라 한다. 그러면 그가 쇠갈고리로 부직포 양 옆으로 끌어내겠단다. 알았어. 나는 열심히 낫질을 한다. 그는 열심히 갈고리질을 한다. 우리 밭의 작은 감나무가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낸다. 덩굴 잡초들 사이에서.


후드득 비가 스친다. 흙이 잔뜩 묻은 궁둥이 의자며 낫이며 호미며 장갑 등을 빨러 계곡 아래로 내려간다. 물이 콸콸 콸콸 힘차게 흐르고 있는 곳에서 하나하나 깨끗이 닦는다. 그는 자꾸 왜 아침에 화가 났냐고 물어본다. 아, 그러나 그걸 어떻게 설명할까. 그냥 막 방탕하고 싶은데 나의 삶은 너무 교과서적이다. 가끔은 막 흐트러지고 싶다. 그냥 그럴 뿐이다. 그러나 코로나 때문에 어쩔 수도 없다. 그냥 집콕에 질린 결과일 수도 있다.


하하 그것도 잠시 기분일 뿐 난 다시 합리적인 그에게 이성적인 아내가 되어 모범적인 생활을 한다. 그렇게 오늘도 하루가 마무리된다. 쓸데없는 것들을 한 아름 사들고 오시며 호탕하게 웃으시던 아버지가 많이 그립다. 어느새 돌아가신 지 7 년이다. 그런 날이 있다. 내가 술에 취했는데 상대방은 말짱하다는 것. 그건 참 묘한 기분이다. 나만 바보 같다 해야 할까 그래서 난 절대 남편과 있으면서 혼자 술에 취하지 않는다. 나만 혼자 엉망이 된다는 건 무언가 억울하니까. 그러나 친정아버지의 피를 받아 술을 마실 수 있다. 즐길 수도 있다. 다만 참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간다.


밭 아래 계곡 (사진:꽃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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