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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뜰 Sep 10. 2020

태풍에 쓰러진 나무들

가긴 가야 할 텐데. 우리 밭 나무가 몽땅 쓰러져 있을 텐데. 그런데 사실 용기가 안 났다. 가서 어떻게 해야 할지 엄두도 안 나기 때문에 그냥 집콕하면서 세월아 네월아 마냥 기다렸다 할까. 마이삭 이후엔 하이선이 곧 온다는데 태풍 다 끝나고 가지 뭐 하는 걸로 버텼지만 하이선마저도 끝나고는 더 이상 핑계가 없다. 가봐야만 했다. 그래도 무언가 가기 싫어 밍그적거리고 있을 때 같이 땅을 산 후배 S에게서 전화가 왔다.


언니~ 나무 세우러 갑시다. 3시에 보아요.


화들짝. 그래. 가야지. 그럼 그럼. 우리 스스로는 가기 싫었지만 가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기에 울고 싶을 때 누가 뺨 때려준 느낌으로 당장 가기로 한다. 코로나 때문에 모든 모임은 취소되고 집콕하다 실로 오랜만의 외출이다. 나무를 가지치기할 전정가위와 낫 호미 궁둥이 의자 등을 챙기고 시원한 얼음물과 커피를 챙겨 후다닥 떠난다. 가는 길에 농협에 들러 쓰러진 나무를 세울 수 있는 뽈대도 넉넉히 구입하고 나무와 뽈대를 연결해줄 헝겊으로 된 든든한 끈도 산다. 기왕이면 새들이 무서워할 꽃분홍색으로. 준비는 다 되었다. 과연 우리의 밭은 어찌 되었을까?



하이고 오오오 초토화라 해야 할까. 나무들은 바닥에 뿌리째 혹은 일부가 꺾인 채 쓰러져있다. 아, 어쩌나. 무얼 어째. 한 걸음 한 걸음 해나가면 되지. 낫으로 잡초를 베어가면서 나무를 낑낑 세우고 곁에 뽈대를 세우고 빨깐 끈으로 단단히 잡아매는 작업을 한다. 한 발짝 한 발짝 조금씩 해나간다. 태풍에도 잡초는 풀이 아니라 마치 나무처럼 큼지막한 줄기를 자랑하며 높게 높게 자라 있다. S와 나는 나무 주위의 잡초를 낫으로 제거하고 남편들은 나무를 세워 폴대를 꼽고 빨간 끈으로 묶는 작업을 한다. 아. 힘들다. 그래도 씩씩하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어느새 해가 기울며 시원한 바람이 솔솔 불어온다. 집콕만 하다 밭에 나오니 고된 일을 해 몸은 천근만근 피로가 몰려오지만 무언가 마음은 더할 수 없이 상쾌하다.



대추는 주렁주렁 열려있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르니 고라니에게 주기 싫어 다 따가기로 한다. 맛있는 사과는 이미 고라니 차지가 되었는지 하나도 없다. 지난번에 왔을 때 그렇게 탐스럽게 달려있었는데. 태풍에 날아간 건지 누가 따간 건지 아무 데도 없다. 위아래 논으로 되어있는데 논을 돌보는 아저씨가 걸어간다.


안녕하세요?


아무래도 우리의 엄나무를 팽개친 아저씨 아닐까 싶지만 우린 반갑게 인사한다. 누군가 톱으로 자른 것 같은 상황. 우리의 엄나무가 사라졌다. 봄에 그렇게나 맛있는 순한 잎을 제공했던 그 튼튼한 엄나무가 사라졌다. S는 아래 논의 농부 아저씨를 의심한다.


금년 봄 맛있는 순을 제공했던 우리의 엄나무


농사짓다 우리 나무가 거슬렸나 봐요. 그래서 베어버린 게 틀림없어요.


아무리 그래도 그럴까? 그렇게 아래 논 농부를 의심하고 있는데 윗 논의 아저씨, 아래위 논을 모두 농사짓는단다. 헉. 아래 논 주인? S의 눈이 착 가늘어진다. 혹시 나무 베지 않으셨어요? 아니 그렇게 대놓고 말하면 어떡해. 그녀 말에 그 아저씨. 태풍에 멀리 날아가던데. 하는데 S는 영 의심을 풀지 않는다. 아래쪽 논에 붙어있던 엄나무는 위쪽 논에 잘린 채로 나뒹굴고 있었다.


언니. 오래전 잘린 모습이야. 이번 태풍에 아니야.


일부러 톱으로 자른 모습이 있다며 의심의 눈을 풀지 않는다. 눈을 착 째린다. 하하 그래도 어쩌냐. 내년에 새로 사 심어야지. 논에서 멀리 심자 이번엔. 아래위 농사를 짓는다는 그 무뚝뚝한 아저씨는 우리가 상냥하게 인사하니 동물들 때문에 농사짓기 힘들다 하신다. 게다가 우리 밭에 풀이 무성하니 동물들이 마구 내려온다며 불만을 표하신다. 멧돼지도 와서 놀다 가고 고라니에 온갖 동물들이 와서 놀다 간단다. 자주 안 와본 게 살짝 미안해진다. 아, 정말 잡초는 아니 잡초 나무는 무시무시하다.



농부가 일을 마쳐야 할 시간. 해님이 꼴딱 넘어가려 한다. 그만하자. 다만 대추는 따가자. 하여 대추를 한 아름 따온다. 맛은 없다. 하하 너무 일찍 따서일까?  그래도 두고 가면 몽땅 동물들 몫이 되고 마니 한 개라도 더 챙겨 오기로 한다. 그리고 호박밭을 뒤지는데 너무 무성한 풀 때문에 이건 완전 보물찾기 수준이다. 그래도 세 통의 커다란 호박을 수확한다. 하하 푸짐한 우리들 수확.



깨끗이 닦아서 햇빛에 말리면 빨개진다는 S말대로 집에 오자마자 대추를 커다란 통에 담아 물로 빡빡 씻는다. 깨끗이 깨끗이. 채반에 건져 베란다 햇빛 잘 드는 곳에 두는 것으로 오늘 작업 끝. 제발 쓰러졌던 나무들이 잘 살아나야 할 텐데.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라 했던가. 몸은 노곤노곤 피로가 몰려오는데 정신은 반짝 아주 맑아진다. 하하 육체노동의 매력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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