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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뜰 Jan 22. 2021

할머니 새 신발

처음인데 비가 와서 미안해!


헉. 엄마는... 그러니까 90이 코앞인 89세 나의 엄마는 전철역에서 내려 쏴아 쏴아 쏟아지는 빗속으로 내딛기 전 운동화에게 다정하게 말하고 있었다. 주섬주섬 우산을 펼 쳐들던 나는 엄마의 그런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란다. 90이 코앞인 할머니에게도 저런 감성이 있단 말인가. 미처 나 마저도 생각 못한 예쁜 마음. 새 신발인데 비를 맞히기가 너무 안타까운 엄마의 마음. 아, 정서는 어디 가는 게 아니구나. 




헉. 갑자기 엄마가 널브러지셨다. 신호대기 중 파란 불이 들어와 서둘러 건너려던 참이었다. 마침 난 가방에서 무얼 꺼내느라 엄마 손을 놓고 있었고 그 잠깐 사이에 인도에서 차도로 발을 옮기는 순간 쭈르륵 엄마가 미끄러지며 그대로 길거리에 누워버리신 거다. 맞은편 신호대기에서 건너오던 사람들이 그 장면을 고스란히 목격하고 달려와 엄마를 부축한다. 아. 부러진 이 팔이 또 부러진 것 같아. 아이고. 꽝 꽝꽝. 도대체 왜? 바로바로 횡단보도에 노랗게 칠해져 있는 아주 미끄러운 경사 때문이다. 신호를 대기하며 서있던 엄마가 파란불이 들어오자 건너가려고 무심코 그 노란 곳을 밟자마자 미끄럼 타듯 쫙 미끄러지신 것이다. 유난히 노랗게 칠해지고 경사진 곳이 미끄럽기도 했지만 가장 중요한 건 엄마의 신발이 미끄러웠기 때문이다. 새 신발을 사야지 하면서도 매번 잊어 이걸 계속 신었더니 밑창이 다 닳아 자꾸 미끄러진다고 대수롭지 않게 말씀하신다. 옷이 두꺼워서 다행이야. 여름이면 뼈가 다 부러졌을 게다. 하시지만 난 아찔하다. 아, 그렇지. B가 곧 온다고 했지. 즉시 캐나다에 있는 남동생 B에게 카톡을 날린다.


 너 올 때 절대 미끄러지지 않을 엄마 신발 사와라.  


그러나 즉시 온 답은 이곳 코로나 때문에 쇼핑몰 거의 다 문 닫았어. 누나가 당장 사드려. 헉! 그렇다면 내가 사드려야 한다. 집으로 떠나는 날 저녁 7시 38분 열차니까 그날 사기로 했고 그게 바로 오늘이다. 엄마랑 느긋하게 점심을 먹고 운동화를 사러 나선다. 동창 방에 엄마가 운동화가 미끄러워 넘어져 큰일 날 뻔했다는 톡을 하니 마라톤을 해 운동화에 전문가라는 친구가 무엇보다 신발엔 돈을 들여야 한다며 백화점에 가 유명 브랜드 운동화를 사드리란다. 운동화가 우리 신체에 얼마나 중요한지 열변을 토해 백화점에 갔으나 의외로 백화점 운동화 코너는 썰렁~ 종류도 많지 않아 아웃렛몰에 간다. 딱 들어서는 곳에 아웃도어 여러 상표들. 


어르신네가 안전하게 다닐 수 있는 운동화 주세요.
미끄러지지 않고 쿠션도 있는 걸로요.  


제일 먼저 있는 B사에 가서 이야기하니 쿠션이라면 스포츠화로 가보란다. 이곳 아웃도어는 쿠션과는 거리가 좀 멀다고. 그런가? 그런가요? 엄마랑 나는 4층 스포츠 코너로 간다. 역시 맨 앞에 있는 N사에 들어가 권하는 걸 신어 본다. 편하다. 그러나 바닥이 어째 미끄러울 것만 같다. 미끄럼 방지가 더 중요하다면 3층 아웃도어 코너로 가보란다. 모지? 아웃도어에선 스포츠 코너로. 스포츠에선 아웃도어로. 사실 B사는 신발을 신어본 것도 아니요 시작부터 쿠션이라니 스포츠사로 가라고 한 것이다. 장사 안 하려나? 우린 그런 의문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N사의 판매원 아가씨는 이렇게 저렇게 엄마에게 신겨드리며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그렇게 사근사근 온갖 설명을 다 해준다. 엄마도 운동화가 무척 편하다고 하신다. 그러나 아무래도 바닥이 미끄러워 보여 의문하니 미끄럼 방지가 더 우선이라면 아웃도어에 가셔야 할 거라고 너무나 친절히 마치 자기 어머니에게 할머니에게 하듯 안내한다. 그렇구나. 미끄럼 방지가 우선되어야 한다면 그건 또 아웃도어구나. 


미안해요 일단 아웃도어에 가보고 다시 올 께요. 감사합니다. 


엄마의 까다로운 요구를 다 들어주며 이 신발 저 신발 가져다 신겨준 그 아가씨가 정말 고마워 인사를 열심히 하고 엄마를 꼭 잡고 3층 아웃도어 코너로 다시 간다. 그러나 이번엔 아까의 그 B사에 가지 않는다. 판매원이 전혀 적극적이지 않았으니까. 그 옆의 K사에 간다. 필요한 사항을 말하니 피부가 아가처럼 매끈한 약간은 통통한 청년이 전문가다운 입장으로 곁에 착 붙어 부드럽게 설명해준다. 그리고 자신 있게 신발을 권한다. 미끄럼 방지 우선이라면 당연히 아웃도어라면서. 권해주는 걸 신어 본다. 밝은 색을 권하나 사시사철 오래 신으려면 무난한 색이 좋다며 감색을 고르신다. 발은 235인데 운동화이니 하나 크게 신어야지? 하며 240을 고르신다. 그런데 꼭 낀다. 이 운동화가 좀 작게 나왔다며 245를 그 청년은 친절하게 권하며 다시 신겨드린다. 몇 번을 왔다 갔다 편한가 그 매장을 돌아보라 하니 여러 번 왔다 갔다 하던 엄마는 맘에 드신다 하여 결제를 한다. 그리고 집으로 향한다. 집에 가자마자 밥을 해 먹고 나는 열차를 타러 나가야 한다. 시간이 빠듯하다. 서둘러요 엄마. 


그렇게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 조금 더 가는 데 엄마가 말한다. 아무래도 여기가 이상하게 아파. 왼쪽 발등이 아프시단다. 오른쪽 발등은 괜찮은데 왼쪽은 왜 이럴까? 그래요? 그럼 안되지. 땅 밟기 전에 가서 이야기합시다. 퉁퉁하니 아기 같은 맑은 피부에 맘 좋게 생긴 매니저는 이리저리 눌러봐 주며 너무 조여서 그랬나 보다며 아프시다는 발등 쪽 끈을 풀어준다. 정성껏 돌봐주는 그 청년에게 감동해서일까 엄마는 곧 괜찮아졌다 하셔 다시 우린 서둘러 길을 떠난다. 그런데 이번에도 매장 끝까지 걸어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오니 조금 걷다 또 아프다 하신다. 아무래도 왼쪽 발등이 불편해. 그래요? 그럼 안되지요. 다시 가 봐요. 그래서 다시 그 매니저에게 간다. 아무래도 아프시다네요. 이리저리 눌러보며 다시 처방을 해준다. 다시 우린 나온다. 이젠 정말 서둘러야 한다. 그런데 어느 정도 가다가 또 말씀하신다. 아무래도 여기가 아파. 다시 나는 엄마를 모시고 매니저에게 간다. 매니저가 다시 만져준다. 괜찮다. 다시 나간다. 그렇게 조금 걷다 다시 말씀하신다. 아무래도 왼쪽 발등이 아파. 이쪽만 그렇네. 난 다시 모시고 가려지만 그럼 열차를 놓친다. 도저히 집에 들렀다 가기엔 열차시간이 빡빡하다. 어떡하지? 아, 어떡하지? 그러나 이렇게 아프시다는데 그대로 갈 수도 없고. 엄마는 너 열차시간 늦으니 그냥 가자 하신다. 당신이 나중에 오겠다고. 그러나 매장이 90을 코앞에 둔 어르신이 홀로 다닐 수 있게 그렇게 만만한 곳이 절대 아니다. 사방이 미끄럽고 여기가 저긴가 나도 매장이 헷갈릴 지경인데 엄마가 홀로 여길 찾아온다? 그건 불가능이다. 그렇다고 아프시다는데 이대로 갈 수는 없지 않은가. 지금 아직 땅을 밟지 않아서 괜찮지 밖으로 나가는 순간 운동화를 바꿀 수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아, 어떡하지?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등장하는 나의 해결사님 남편에게 전화한다. 이러고 저러고 어쩌고저쩌고 상황을 설명하니 열차를 연기하고 충분한 시간으로 엄마 운동화를 잘 골라드리고 오라 한다. 그래? 오케이. 신나서 소리치고는 재빨리 열차표를 검색한다. 일단 당장 떠나야 할 나의 표를 반환한다. 헉. 시간이 임박해 벌금을 물어야 한다. 할 수 없지. 벌금 물고 취소! 이제 재빨리 다음 날 열차를 검색하니 헉! 몽땅 매진. 기왕 있는 거 청소도 해드리고 여차여차 하루 더 돌봐드리려 저녁 열차를 찾으니 이미 다 매진이다. 그리고 보니 금요일! 그렇구나 금요일 저녁엔 열차가 이리 다 매진되는구나. 가장 늦은 표 있는 시간대가 한시쯤. 일단 그거라도 재빨리 예매한다. 세상에 좌석이 한 개 남았는가 저 멀리 16호 열차의 한 자리로 이동한다. 난 항상 5호 열차를 애용했는데 아니 16호라니. 이런 맨 끝 칸을 이용해본 적은 없다. 내리자마자 리무진으로 재빨리 달려갈 수 있도록 에스컬레이터가 딱 대기하고 있는 6호나 7호 칸이 최고지만 몇발짝 더 걸어도 특실 옆의 5호가 한적하고 좋아 항상 5호 칸을 이용하는데 우아 16호라니. 멀어도 한참 멀다. 그래도 할 수 없다. 그거라도 재빨리 예매한다. 


엄마~ 열차 연기했어요. 맘대로 편하게 고르세요.


발은 아프다면서도 내가 열차를 놓칠까 봐 그냥 가자던 엄마를 안심시키고 다시 그 청년에게 가서 왜 이렇게 아플까요 한다. 하하 어떻게 하나? 그 와중에 다른 손님들이 와서 그 청년은 잠깐 실례요 하면서 그 손님들에게 가서 바쁘다. 운동화가 쫘악 진열된 앞에 앉아있던 엄마랑 나는 왜 꼭 이 신발만? 하면서 다른 신발을 신어 본다. 이 신발이 아무래도 이상한 것 같으니까. 다른 걸 신더니 안 아프다 하신다. 그런데 가격이 꽤 비싸다. 생전 이런 비싼 가격의 운동화를 사 본 적 없는 엄마는 무슨 운동화를 이렇게 비싸게 사냐 영 불안해하신다. 마라톤을 해 운동화에 전문가인 친구 말을 해드린다. 운동화는 좋은 걸 사야 한대요. 생명줄이래요. 




그렇게 무려 다섯 시간에 걸쳐 고른 운동화를 신고 엄마는 좋아하신다. 예쁘다. 편하다. 지하철 안에서도 몇 번을 발 끝을 모아 살짝 위로 올리며 예쁘지? 정말 편하다. 내게 자랑하신다. 그리고 내려 전철역 밖에 비가 쏴아 쏴아 내리니 그 예쁜 신발에게 미안하셨는가 보다. 처음인데 비가 와서 미안해~ 하하 감성은 어디 가는 게 아니다. 


(사진:꽃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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