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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뜰 Mar 08. 2021

은퇴한 남편과 단둘이 무 한 박스

여보, 이건 아니지 않아? 우리 둘 뿐인데 무 한 박스를?  그래도 여기 낱개로 파는 게 너무 안 좋다. 가성비 박스가 나아. 비실비실 그야말로 가냘픈 무 한 개에 1,200원. 깍두기를 담그려는 우리는 영 무가 탐탁치않다. 이거 몇 개를 사야 해? 맛도 없게 생겼다. 그래서 두루두루 둘러본 결과 커다란 무 박스를 발견하였으니 12개에 11,000원 제주도 무란다. 살짝 안을 들여다보니 무가 아주 탐스럽다. 낱개로 파는 거는 제주도 무도 아니고 모양도 크기도 영 아니다. 그래서 우린 갈등한다. 그렇다고 우리 둘이서 무 한 박스는 아니지 않아? 저 팔뚝만 한 무 12개를 가져다 어떡하자고? 진정합시다. 그래서 다시 낱개로 파는 무에 가보지만 아 정말 손이 안 간다. 무 한 다라이 깍두기 담그고 그리고 남는 건 뭇국도 끓여먹고 무채도 만들어먹고 어묵탕도 만들어먹고 무 쓸 일은 많으니까 그래 우리 박스를 사자. 오케이. 이리저리 돌며 둘이 결론을 내린다. 박스를 사자.


그다음 파를 사러 다니나 쪽파는 보이지도 않고 대파는 우아 정말 너무 비싸다. 여보 그냥 냉동실 파 쓰자. 반찬 하는 데 넣어 먹으려고 대파를 썰어놓은 게 항상 냉동실에 준비되어 있다. 그걸 쓰기로 한다. 그리고 대신 아직 1,500원인 두툼한 부추를 한 단 산다. 그래 파란색은 부추로. 하하. 마늘 생강도 냉동실에 있으나 오늘은 모두 생 것을 쓰고 싶다. 마늘 조금 생강 조금 싱싱한 것들로 준비한다. 세상에 우리 둘이 무 한 박스라니. 과연.


잘 담가야지. 난 차에 타자 즉시 백종원 깍두기 담그기를 튼다. 그냥 대충 담글 수도 있으나 그래도 기왕이면 백 아저씨 레시피 고대로. 어쩜 저렇게 구수하게 감칠맛 나게 방송할까. 그냥 옆집 아저씨가 뚝딱 만들어주듯. 하하 깔깔 웃으며 둘이 함께 차 안에서 백종원 아저씨 유튜브를 보며 깍두기에 대한 준비자세를 경건히 한다.


여보~ 난 밀가루 풀 쒀야 해. 정리는 여보가~ 크게 외치고 손만 닦고 재빨리 가 밀가루 풀을 쑨다. 식혀야 하니까. 껍질 벗기지 말라니까 빡빡. 아, 그런데 무 정말 좋다. 조금 베어 먹어보니 맛도 있다. 아주 단단하다. 우리 그 비실비실 낱개로 파는 무 안 사기를 잘했어. 그런데 이미 저녁 8시가 다 되어 우리는 배가 고프다. 깍두기는 깍두기 우리 배는 배. 우선 밥을 해 먹자. 달래를 한 묶음 사 왔다. 아무것도 안 넣고 달래만 듬뿍 넣어 된장 풀고 뽀로록 끓여 달래로 범벅을 해 갓 지은 밥과 함께 그리고 임성환 작가의 새 드라마 결혼 작사 이혼 작곡과 함께 맛있게 밥을 먹는다. 하하


자, 이제 밥 신나게 먹은 거 다 치우고 깍두기 시작. 넓은 거실에 신문지를 깔고 커다란 도마와 함께 식칼 그리고 썰은 무를 담을 커다란 스텡 다라이 푸하하하 그리고 서방님 앉을 방석. 깍두기는 공학도 답게 자로 잰 듯 정확하게 썰어내는 남편 몫. 난 무 씻어주고 부추 다듬고 마늘 빻고 생각 지찌고 풀 쑨 거에 고춧가루 넣어 불리고 등등 자잔한 것들.  


무려 8개의 무를 썬다. 남은 4개로 우린 맛있는 무 요리를 두고두고 해 먹기로 한다. 정말 탁월한 선택이야. 그렇게 저녁 먹고 치우고 무를 다 썰고 보니 새벽 한 시 반. 여보 한 시간은 절여야 해. 두시반까지 우리 기다려야 해. 파리에 있는 아들한테 전화할까? 알맞은 시간인데 지금. 커피도 한 잔 하자. 어차피 한 시간 기다려야 하는 걸. 맛있는 빵까지 함께. 그렇게 간식타임을 가지며 우린 새벽 두시반에 절인 무를 한번 설렁설렁 헹궈낸다. 둘이 낑낑 대며. 푸하하하 그가 들어주고 내가 휘휘 젓고. 그렇게 채반에 깍두기를 건저내고 물기 대충 빠진 후에 다시 스텡 다라이에 투하. 자. 이제부터 내가 달라는 거 다 줘.


부엌 바닥 스텡다라이 앞에 난쟁이 의자를 놓고 자리 잡는다. 새 고무장갑을 꺼내서 끼고. 제일 먼저 고춧가루. 그리고 밀가루 풀에 고춧가루 풀어놓은 거. 영차 영차. 아, 너무 힘들어 여보~ 내가 버무릴까? 아니야 그래도 나의 손 맛이 들어가야지. 힘들지만 내가 한다. 영차 영차. 부추~ 남편이 즉각 대령. 난 또 버무리고. 대파. 냉동실에서 한 봉지 그대로 다 투하. 마늘 생강. 그리고 새우젓. 멸치젓. 그리고 아주 비싼 소금 조금. 주물럭주물럭. 하이고 힘들어. 자 간을 봅시다. 여보 한 개. 나 한 개. 어때? 맛있다. 매워. 응 금년 고춧가루 산 게 땡고추인지 맵더라. 좀 싱거운가? 새우젓 더 넣을까? 그래 한 숟가락만 더 넣자. 버물버물. 김치통~ 김장 때 쓰던 커다란 김치통 한가득 깍두기가 담긴다. 모든 정리를 마치고 나니 새벽 4시. 우아. 우린 왜 김치만 담갔다 하면 밤을 꼴딱 새울까. 하하 그래도 좋아. 내일은 흰쌀밥에 저 깍두기를 척척 얹어 밥을 먹자. 잘 자~ 내일은 아주아주 늦게 일어나는 거다. 안녕. 얼마나 맛있을 까 우리 깍두기.


(사진:꽃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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