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과 가을 일 년에 꼭 두 번. 남편 대학 동창들은 일박이일 부부모임을 갖는다. 그 게 어느새 몇십 년의 세월이다. 순서대로 회장 총무를 맡아 회장단이 맘대로 프로그램을 짜는 거다. 이번에 나의 남편이 회장이다. 30여 명의 손님맞이에 우리는 발품을 팔아 숙소를 정하고 여행 코스를 잡고 드디어 그 날이다.
날이 좋아야 하는데 부슬부슬 봄비가 하염없이 내린다. "비 오는 바다 풍경도 꽤 괜찮아~" 그렇지. 비 오는 바다. 좋아. 오늘 만남은 울산역에서 시작이다. 금요일이라서일까? 역 안에 사람들이 한가득이다. 목을 빼고 빼고 젤 키 큰 사람만 찾는다. 드디어 등장하는 남편 친구 A 부부. 전날 밤 보리밥 먹은 게 탈 나 꼬박 굶었다는 이 커플은 그야말로 기진맥진이다. 차 뒷좌석을 따뜻하게 덥히니 좋아한다. 뜨끈뜨끈 궁둥이가 부슬부슬 비 오는 날 배탈 난 분들에겐 최고다. 하하
비가 주룩주룩 더 심하게 내린다."오늘 실컷 와야 내일 안 오겠죠. 통도사 갈 때만 비가 안 오면 됩니다." 쏟아지는 비를 걱정스레 내다보는 우리를 뒤에서 안심시킨다. 윈도 브러시가 바깥 풍경 제대로 한번 찰칵하기 힘들게 매우 바삐 움직인다. 그만큼 비가 세게 내리고 있다. 에구.
간절곶 공원이 깔끔하게 정리된 곳. 그 한가운데 스타벅스. 그리고 그 바로 옆에 우리가 묵을 펜션 딱 두 동.
행여 누구 다른 사람에게 갈까 봐 아담한 펜션 두 동 모두를 이미 한 달 전부터 통째로 잡아뒀다. 그래!!! 부부당 한 개 씩의 침실! 그렇게 미리 선납을 하고 통째로 빌렸는데 갑자기 등장하는 결석자들. 이미 완납했는데. 할 수 없이 남자방 만들고 여자 방 만들고 그리고도 나오는 결석자엔 어쩔 도리가 없다.
그래도 커다란 상 두 개를 쫙 펴고 오손도손 모여 앉아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이 단체방. 누군가의 방에서 하면 맘껏 어지르고 나올 때쯤엔 방 주인에게 너무 미안하던 그런 게 없으니 참 좋다. 졸릴 때까지 맘껏 수다 떨고 다시 여자들 여자 방으로 가서 여자끼리 실컷 수다. 그리고 각자 방으로 흩어져 잠을 잤다. 깨끗한 곳에서. 단체방 아주 유용했다. 결석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생긴 방이지만. ㅎㅎ
"여학생들은 모두 스타벅스에 있습니다."
쏟아지는 빗 속에 막강한 힘을 자랑하며 낑낑 많은 짐들을 순식간에 옮겨주는 남편 대학 동기들. 보고픈 우리 여학생들을 만나기 위해 서둘러 스타벅스로 간다. 아~ 커피 향 좋다. 부슬부슬 내리는 봄비와 바다 그리고 친구 완벽한 조화 아니겠는가.
자, 떠나자. 동해바다로~
가 아니라 동남해 간절곶으로~ 비가 쏟아져도 폭풍우가 휘몰아쳐도 우리는 바다가 좋다. 그래서 걷는다. "나도 같이 가요~" 노란 우산이 가세한다. 일 년에 단 두 번이지만 흐르는 세월 속에 많이 친해진 우리. 남학생 레알 동창인 듯 아내들끼리도 너무 반갑다. 쫘악 펼쳐진 바다를 향해 우리는 달려간다. 파란 우산이 막 뒤집히려 한다. 조심조심. 우산을 꽉 붙들고. 오호 쓰러질 것 같아. 바람에 날아갈 것만 같아. 그래도 파도와 함께 여학생들끼리만의 이 자유가 너무 좋다.
어민 후계자로서 직접 배를 타고 나가 고기를 잡아온다는 Y횟집. 쫄깃쫄깃 회 중심이란다. 장소 선정에도 회장은 어려워라. 발품을 팔아 이 곳 저곳 다 다녀보고 먹어보고 시끌벅적 유명한 곳을 골랐으나 그곳은 단품 식사 중심이라는 말에 취소. 이 곳으로 바꿨다. 그래서인지 반찬이 영 아니다. "회가 좋으면 되지." 회가 맛있다고 격려의 말을 듣지만 글쎄 어느 집을 택해야 했을까.
바다에 나가 직접 고기를 잡는 집이라더니 천장에 커다란 배가 달려 있다. 여학생들도 자리를 잡는다. 만나면 만날 수록할 이야기가 많아진다. 자 다 같이 파이팅! 남편 따라 새롭게 맺어진 인연, 밤늦도록 서로 이름 외우며 친해지려 애썼던 우리 여학생들도 밀린 수다가 한창이다.
결석자들 때문에 갑자기 생기게 된 여자 방 남자방. 일단 남자방에서 모두 모인다. 커다란 테이블을 옆방 것도 가져다 놓아 두 개 펼쳐 놓고 그리고 그 위에 먹거리를 차린다. 많은 웃음을 쏟아내며 회의는 진행된다. 봄비 내리는 간절곶 바다 펜션 아담한 방 안에서 우리의 대화는 무궁무진이다. 세월이 많이 흘러 이제는 그냥 얼굴만 보아도 서로 훈훈해지는 대학 동기동창 그리고 그 아내들. 얼마나 소중한 인연들인가.
길을 걸으면 만난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
쭉쭉 뻗은 기막히게 멋진 소나무들이 바다 앞에 딱 버티고 있다. 흐음~ 자꾸자꾸 숨을 들이켠다. 신선한 산소가 마구마구 몸속으로 들어오는 것 같다. 간절곶 소망길! 한반도의 새해를 여는 이 곳에서 해맞이를 하며 한 해 소망을 기원하는 해안길이란다.
그대로 넓고 넓은 바다로 이어진다.
바다를 따라 길게 길게 이어진 길. 그 끝에 우리가 어제저녁 회를 먹었고 오늘 아침 미역국을 먹을 횟집이 있다. 폭풍우 속에 걷던 어제의 그 험악한 길이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었구나. 맑고 깨끗하게 개인 하늘 아래 잔잔한 파도의 조용한 바다가 반짝반짝 빛난다.
철썩철썩 처얼썩~
이 아니라 살랑살랑 아주 조용히 파도치는 바다. 뒤를 돌아보니 우리가 잠잔 숙소에서 걸어온 길도 만만치 않다. 아 끝없는 바다.
옛날 옛날 아주 옛날에 회야 강을 사이에 두고 두 어부가 사이좋게 살았다. 강양호와 진하랑이라는 이들의 아들과 딸은 서로 사랑한다. 그러나 두 어부가 심하게 다투고 원수지간이 되자 둘은 도망친다. 둘이 만나자 쫙 갈라졌던 강물이 닫히며 이들의 댕기와 두건이 두 마리 학으로 변해 날아간다. 훠이훠이 훨훨~
어제 먹은 횟집에서 살아있는 게루치를 넣고 끓인 미역국을 먹는다. 그런데 푸짐한 미역국을 예상했는데 미역도 국물도 너무 적다. 뒤늦게 도착한 나만 그런가? 하고 조용히 먹었건만 나중에 물어보니 모두들 그렇게 적었단다. 그래서 주인아주머니에게 왜 그렇게 조금 주었냐고 하니 너무들 남겨서 그랬단다. 더 있다며 크게 푹 퍼준다. 이미 식사들 다 했는데 이제야 더 주어서 어찌할꼬? 진작 물어볼 걸 그랬다.
나중에 밖에서 단체 촬영이다 모다 한참을 있다 깜빡 잊은 게 있어 다시 들어와 보니 한가득 사람들이 식사 중이다. 삼촌~ 오빠~ 형부~ 아버지~ 어머니~ 그 잠깐 사이에 부르는 호칭도 다양하다. 거기에 시끌벅적 애들까지. 모두 가족들인 것이다. 조용하던 횟집에 단체손님 맞느라 온 가족이 총출동했나 보다.
혹시 우리가 먹어야 할 그 미역국으로?
문득 그런 의문이 든다. 이 많은 식구들의 아침식사도 해결하려고 정작 예약한 우리에겐 그렇게 조금씩 떠 준 걸까? 하는 의문이 살짝 든다. 아무리~ 그러나 그러면 또 어떠랴. 작은 횟집에 무언가 경사 난 듯 온 가족 뒤풀이가 매우 즐거워 보였으니 말이다.
파란 하늘에 두둥실 흰구름. 어쩜~ 어젯밤 그 폭풍우는 어디로 간 걸까? 너무도 맑은 날씨에 우리는 흥분한다. 즐겁게 가고 있는데 와우 출입 통제. KBS 전국 노래자랑이란다. 저거 가 보면 진짜 재밌다며 뒤에 앉은 C부부가 할담비 이야기를 해준다. 영상까지 보니 너무 재미있어 통도사고 뭐고 다 취소하고 막 녹화장에 가고 싶다. 하하
드디어 통도사로 진입. 양산시청에 장문의 글을 올려 신경 써서 받은 해설사 얼마나 베테랑 일지 두근두근 설렘이 가득하다. 드디어 통도사 메인 주차장 도착. 53년생 대부분인 남편 친구들은 65세 국가 인정 노인으로 공짜입장. 우리나라 10대 절경에 들어간다는 통도사 소나무길을 걷는다. 어젯밤의 을씨년스럽던 날씨는 귀신같이 사라지고 통도사 가는 길은 너무도 밝고 화사하다.
'안나 까레리나'와 '전쟁과 평화'를 두꺼운 원서 그대로 읽어보아요~
우거진 아름드리 멋진 소나무들 사이에서 푸하푸하 깊이 숨을 쉬며 이야기한다. 유난히 책을 좋아하는 그녀와 나는 오늘 많이 통한다. 어쩌다 나온 영어 소설 읽기에 그녀도 나도 침을 튀기며 경험담 쏟아내느라 정신이 없다. 다이제스트 판이 아닌 두툼한 원서 그대로 읽었을 때의 그 묘미를. 많은 사람들 가운데 무언가 통하는 사람은 꼭 있게 마련이다. 하하
앗, 베테랑 해설사가 나올 줄 알았는데 너무나 신참으로 보이는 어린 해설사의 등장이다. 대학동창이며 매우 학구적 운운하며 너무 부담을 준 걸까? 선임은 다 빠지고 신참에게 미룬 것 같다는 결론에 이른다. 하이고~ 열심히 최선을 다하지만 신참임이 퐁퐁 느껴지는 딱 외운 것만 읊는 듯한 해설. 에구.
우리나라에서 스카이 대학이 최고이듯 이 통도사가 바로 스카이대학격이어요.
프로가 아닌 꼭 아마추어 모습으로 학생처럼 또박또박 외운 걸 읊던 어린 해설사는 문득 남편 학교를 한껏 치켜세운다. 어린 학생을 돌보듯 우리는 따뜻한 웃음으로 그녀가 긴장하지 않도록 부드럽게 반응한다. "아하 '영축산 통도사' 요 거이 바로 흥선 대원군의 필적이군요~" "정말 멋집니다~ "해가면서.
쉬~ 조용히 하라네요. 예불 중이라고
그곳 지킴이 아저씨에게까지 저지당하는 신참 해설사. 볼륨을 낮추고 조용조용. 내부에 불상이 없어 참배 기능만 있는 대웅전에서는 지금 불교 설법이 한창이다. 내부에 불상이 없고 불단 뒤편으로 부처님 진신사리가 봉안된 금강계단이 있다.
본래 통도사 자리는 큰 연못이었다. 아홉 마리의 악한 용이 살고 있었는데 자장 스님께서 설법하니 다섯 마리는 통도사 앞산 넘어 오룡골로 날아가고 세 마리는 울산 삼동 골로 간다. 나머지 한 마리는 눈이 멀어 떠나지 못하고 사찰에 남아 도량을 지키겠다고 간청하니 연못 한 귀퉁이를 메우지 않고 남겨 살도록 한다. 이 조그만 연못의 물은 아무리 세상이 가물어도 절대 마르는 일이 없고 비가 억수로 쏟아져 홍수가 나도 절대 넘치는 법이 없단다.
앗, 마침 한 무리의 스님들. 공부하러 가는 걸까? 아님 식사하러 가는 걸까? 무언가 잠시 규제에서 벗어난 듯 자유로운 모습이 학창 시절 우리를 보는 것 같다.
개구리가 보인 대요. 아주 선한 사람에게만
우리는 모두 바위에 뚫린 작은 구멍을 통해 개구리를 찾느라 여념이 없다. 맑은 석간수가 나오던 이 바위에 자장율사가 손가락으로 구멍을 뚫어 금개구리를 살게 하였다는 전설이 있고 지금도 불심이 강한 성도에게는 보인다 한다.
자장암 툇마루 같은 곳에 앉아 하염없이 펼쳐지는 구비구비 멋진 산들을 구경한다. 가슴이 뻥~ 뚫리는 듯 한 느낌이랄까 아~ 그냥 막 기분이 좋아진다.
저 멀리 구비구비 천성산이 보이는 곳에서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한다. 망중한이랄까 무언가 바쁜 삶에서 잠시 멈추어 간다. 가슴이 탁 트이도록 시원하게 천성산과 영축산이 구비구비 절경을 이루고 있다. 고려시대 1345년 영숙 대사가 창건했다는 비로암. 거의 700년 전 이야기다. 세월은 그렇게 흘러간다. 죽고 태어나고 죽고 태어나고 그렇게 한 참을 지난 후에 우리가 와서 이렇게 앉아 있다. 두둥실 흘러가는 구름만큼이나 우리의 삶도 그렇게 흘러 가나. 어젯밤의 폭우가 무심할 정도로 반짝반짝 해님이 밝게 빛나는 곳에서 우리는 마냥 이야기를 나눈다. 언제 만나도 즐거운 대학 동기 동창, 50여 년 전 추억을 함께 할 수 있는 귀한 인연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