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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뜰 Apr 26. 2021

썩은 배

엄마~ 바나나와 딸기, 바나나와 키위, 토마토와 오렌지래~

알았쓰. 과일 주스를 먹고 싶어 하는 아드님께 나는 집에 있는 온갖 과일을 있는 대로 쑤셔 넣어 드르륵 갈아서 줬다. 키위 오렌지 딸기 토마토 바나나... 모든 과일을 한 꺼번에. 그걸 마신 나의 아드님, 잠깐만 엄마! 하더니 드르륵 검색으로 과일들 궁합을 알아내 내게 알려준다. 그래서 오렌지와 토마토만 갈아주니 무슨 주스인지 확실하고 맛있다 한다. 고뤠? 다음엔 딸기와 바나나 일대일로. 오호 아주 잘 어울리네~  다음엔 바나나와 키위~ 그렇게 과일주스 매력에 폭 빠져들고 있었다. 


맛있는 사과를 사러 농수산물 센터에 갔다. 남편과 나, 둘 뿐이니 평상시 굳이 이 도매시장까지 오지 않는다. 그러나 요즘 사과는 정말 잘 사야 하고 또 아드님께서 오셨기에 과일 소비가 많아 농수산물 센터를 들르기로 한 것이다. 싱싱한 과일을 많이 사서 안기려고. 농수산물 센터에 가니 도매 가게가 쫘악 펼쳐져있는데 호객행위하는 입구의 가게들을 거쳐 중간쯤의 어느 가게 앞에 우린 섰다. 그러나 그 주인은 어느 손님과 이야기 중이라 입구에 서서 그들의 흥정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옆 가게에서 우리가 푸짐하게 쌓인 사과를 보고 있으니 살 거냐고 묻는다. 아 쫌 보는 중입니다. 이건 얼마입니까? 일단 가격을 물었을 뿐인데 만 팔천 원입니다. 하더니 사십 대쯤? 화려하고 씩씩한 아주머니가 다가오더니 무조건 그 수북이 쌓인 사과를 봉지에 담기 시작한다. 


아니 아직 결정한 것도 아닌데


남편이 당황해 말해보지만 워낙 씩씩하고 상냥한 그녀에게 우리는, 아니 '나'는 폭 빠져든다. 어어어 하는 새에 그러니까 매사에 신중한 남편이 어어어 하는 새에 나랑 그녀는 모든 딜을 마쳤던 것이다. 사과를 봉투에 파팍 담으며 사과 전문 매장이라는 말부터 시작해 요즘 사과는 정말 잘 사야 하는데 이 사과가 얼마나 맛있는지 까지 줄줄줄 읊는 그녀에게 난 신뢰를 파팍 준다. 덩달아 그 한쪽 켠에 놓인 커다란 배 두 개와 자몽 한 소쿠리 그리고 레몬 한 소쿠리. 전혀 싱싱해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과일 주스를 만드는 데는 괜찮겠다 싶어 눈길이 가는데 그걸! 사과를 다 담은 그녀가 그 모두를 그냥 오천 원만 주고 가져가라는 것이다. 오마 낫. 그렇게 싸게. 맘도 좋으시네. 이 아줌마 정말 괜찮네. "네~ 주세요." 아줌마와 나 둘이 척척 호흡이다. 


사과는 주스 해먹을 만한 거 없나요?


사과도 기왕이면 좀 싼 주스용이 있을까 싶어 물어본다. 비싸게 사는 멀쩡한 사과는 깎아 먹고 주스는 따로 사서 갈아먹는 게 효율적일 것 같아서이다. 사과 한 팩을 가져온 그녀는 흠이 조금 있을 뿐인데 12,000원짜리 9,000원에 가져가라며 선심 쓰듯 말한다. 주스 만든다니까 특별히 그 가격에 드리는 거라고. 그렇다면 이게 웬 횡재냐. 네, 그것도 주세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그 잠깐 사이에 그녀랑 나는 아주 친해진다. 아, 과일은 꼭 이리 와야겠어요. 우리 여기 별로 오지 않았는데 와보니 참 좋네요. 하하 호호 즐거운 웃음을 쏟아내며 나는 전화번호를 묻는다. 단골 맺으려고. 성급도 해라 나는 푸하하하. 그런데 자기는 점원이고 여기 사장님 번호라며 준다. 앗 사장님 아니셨어요? 네. 점원. 모두들 나를 사장인 줄 알아요. 하하 여하튼 그렇게 흐뭇하게 매매를 하고 집에 왔다. 그리고 그 큼지막한 배를 자르는 순간 아, 나는 또 나의 그 못된 병. 무조건 싼 것에 눈길과 마음이 가는 그 심각한 병이 도졌음을 깨달은 것이다.


커다란 배 밑바닥은 동전만 하게 썩어있다. 반을 다 도려내야 흰 살이 나왔다. 흰 살이라도 먹을 수가 없다. 뭉클 대는 그 안 좋은 촉감이라니. 아, 난 왜 과일을 만져보지도 않고 싸다고. 아줌마가 선심 쓰는 거라고 그대로 멀리서 배의 커다란 모습만 보고 덜렁 받아왔을까. 레몬도 썰어보니 반은 썩어있다. 자몽도 엉엉 전혀 싱싱하지 않다. 주스도 싱싱해야 그 맛이 나지 왜 주스라고 꼭 시들시들 별 볼일 없는 과일을 사 오려 했을까. 그것도 아드님 드실 건데! 내가 무엇에 씌웠지. 9,000원이나 주고 산 사과도 푸석푸석 그야말로 엉망진창이다. 하이고 나도 참참참! 그 아줌마랑 수다 떨며 호흡이 잘 맞는다고 신났던 순간이 바보 멍청이 같다. 어쩐지 그렇게 급하게 사는 거 아닌데 쏟아 담더라. 남편의 못마땅한 한 마디가 들려온다. 아, 모두 버리게 생겼다. 난 왜 그랬을까. 아 왜 그랬을까. 


모르면 비싼 걸 사라던데. 난 쥐뿔도 모르면서 가장 싼 것에 맘이 갔으니. 갑자기 싸게 준다 하면 도대체 왜 정신을 못 차리는 걸까. 그래도 아무리 싸도 이런 걸 먹을 거라고 판 그녀에게 마구 괘씸한 마음이 든다. 그것도 인심 쓰듯이. 점원이기에 그랬을까? 주인이라면 다음을 생각해 저런 건 팔지 않지 않았을까. 농수산물센터까지 가서 아주 싱싱한 걸 사 오는 대신 싸구려를 한 보따리 사온 내가 너무 한심하다. 아, 난 도대체 얼마나 지나야 살림에 도사가 될까? 좀 현명한 주부가 될 수는 없을까? 바보.


(사진:꽃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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