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라차부리 드래곤힐즈 C.C.
남자들이 18홀에서 기다리고 있다. 나의 남편은 왼쪽 팔이 아프고, J의 남편은 허리가 아프고, P의 남편은 배가 아프다며 이 홀을 끝으로 돌아가잔다. 부부 4팀이 앞에 남자팀 뒤에 여자팀으로 라운딩 중이다. 오늘 27홀을 내리 치기로 했는데 부상자 속출로 남편들이 포기한 것이다. 남편들이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 우리 아내들의 펏이 진행되고 있다. 이럴 때 멋지게 땡그랑~ 원펏을 하면 오홋 정말 신나는 일이다. 모든 남편들의 함성을 받으니 말이다. 원펏은 바로바로 요런 때 해야 하는데. 흠.
앞으로 잠깐 돌아가 보자. 한 타 한 타 정성껏 친 나의 볼은 매끈하게 잘 뻗어나가 쓰리온이 가능한데 마지막 써드샷이 벙커에 빠졌다. 그러나 실망은 금물, 그린 근처 벙커이기에 잘만하면 여전히 쓰리온이 가능하다. 파 4인 이 홀에서 그럼 파를 기록할 수 있다. 신중하게 어드레스 하는데 앗. 색상도 선명한 주홍색 볼이 나의 종아리를 땅 치는 게 아닌가. 헉. 이게 뭐지? 이 볼이 내 머리로 떨어졌으면 어쩔 번 했어? 모 그리 심하게 아프지는 않으니 그냥 둔 채 내 볼을 그린 위로 올린다. 오케이. 그린으로 걸어간다. 장갑도 벗고 퍼터 뚜껑도 벗기고 나름 준비를 하고 있는데 회색 옷의 뚱뚱한 남자가 그 벙커 위 언덕배기에서 내려오며 두리번거린다.
공 벙커에 있어요~
크게 외쳐주나 들리지 않는지 계속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그린으로 올라오고 있는 캐디에게 벙커 속에 볼 있음을 알려주라고 크게 외친다. 캐디가 달려가 말해주고 그 남자는 공을 찾아 언덕으로 다시 올라간다. 음. 그런데 나 지금 모지? 우쒸, 이제야 많이 속상하다. 당연한 듯 볼을 집는 그 남자에게 속상했을까? 난 사실 큰 일 날 뻔한 것이다. 그 볼에 탄력이 남아있었다면? 난 큰 부상을 입었으리라.
정신이 다른 데 가있으니 나의 펏이 제대로 될 리 없다. 캐디에게까지 그렇게 소리쳐 공 있는 곳을 알려줄 필요 가 있었을까. 괜히 친절을 베풀었나 싶다. 얼마나 큰 사건인데 그들에게 말했어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에구 이런저런 갈등으로 머리가 복잡하다. 이 펏을 성공시키면 나이스 파!인데. 그러면 남편들 앞에서 꽤 폼나는 건데. 우리 네 명의 여자들은 서방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심조심 퍼팅을 한다. 한 펏이 끝날 때마다 와우 나이스 펏! 남편들의 함성이 크다.
그런데 난 집중이 안된다. 크게 다칠 뻔했다는 걸 말했어야지. 우쒸. 자꾸 아까 벙커에 떨어지던 공 생각에 머리가 복잡하다. 그런 채로 공을 굴리니 홀을 비켜 멀리도 간다. 이 세상에 오직 나 홀로 존재하는 듯 그런 무아지경으로 집중해 공을 넣어야 땡그랑 들어가는데. 이 산란한 마음으로 무슨 펏이냐 말이다. 결국 쓰리 펏을 하고야 만다. 파가 순식간에 더블 보기가 된다. 우쒸. 나이스 펏!!! 상대방 여자들의 땡그랑 펏이 터질 때마다 남성들 함성이 커진다. 속상하다. 참으로 엉망진창의 펏 때문에 영 기분이 좋지 않다. 우쒸. 이게 모두 그 벙커에서의 공 때문이야.
그렇게 모두 숙소로 왔다. 남편들이 그만하자는데 굳이 27홀 고집할 아내는 아무도 없으니까. 점심을 먹는데 우리 옆 옆 테이블에 앉아있는 남자. 뚱뚱하고 회색 옷이고 바로바로 그 나의 종아리를 가격한 볼을 찾던 사람이다. 나의 펏을 망가지게 한 주범. 말을 할까? 그냥 가. 이제 와서 무슨! 그때 당장이라면 또 몰라. 이제 와서 무얼 어쩌려고. 그래 가자. 그냥 가. 가까스로 마음을 달래고 나가는데 마침 그와 딱 마주친다. 앗! 그동안 다독인 마음은 몽땅 어디로 가고 자동 빵으로 내 입에서 말이 튀어나온다.
저기요 제가 벙커에서 댁의 볼에 맞았어요.
그 남자가 친 볼이 아니고 그의 아내가 친 볼이었다. 아내가 내게 와 미안해 어쩔 줄 모른다. 사실 아프지는 않다. 난 그저 원펏이 그 때문에 쓰리 펏 된 게 속상할 뿐이다. 남편들 앞에서 멋진 펏을 보여주지 못한 게 속상해 내 입에서 절로 말이 튀어나간 것 같다. 너무 미안해하는 그의 아내 앞에서 도리어 내가 미안하다. '지나간 샷은 잊어라' 그 원칙을 난 못 지킨 거다. 그 어떤 사소한 생각에 매달려 현재 지금을 망치고 있었던 것이다. 과거도 잊고 미래도 잊고 그저 지금 이 순간의 샷에만 집중해야 하는데. 삶도 마찬가지. 지난 과거도 미래의 걱정도 모두 놓아두고 오로지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할지어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