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ccata and Fugue in D minor/Bach
토카타와 푸가 D단조 BWV565
Toccata and Fugue in D minor BWV 565
빠바밤~ 빠바 바바 밤 밤~ 강렬한 음으로 천천히 그러나 힘차게 시작한다. 페달 아래 건반을 이리저리 돌며 부드럽게 오가는 발. 4단 건반을 두두두두 어루만지듯 두둘기며 위아래로 바삐 오가는 손. 즉흥적이며 화려하고 격정적이다. 1709년 24세 청년 바흐의 젊은 힘과 개성이 잘 나타나 있는 <토카타와 푸가> 다. 제목이 왜그리 요상할까? 정열적인 토카타와 아름다운 푸가를 대조시켰기 때문이다.
토카타?
터치 즉 건반을 만지면서 쓸어내려가듯이 아주 자유롭게 두드리는 것으로 박자가 정해져 있지 않아 연주자가 기교를 부리며 뽐내기 좋다.
번쩍번쩍 번갯불이 요동치며 쏴아 억수 같은 비가 쏟아지는 밤 저 괴괴하고도 으스스한 성에선 드라큘라 백작이 이히히히히히~ 피 빨아먹은 시뻘건 송곳니를 드러내며 오르간으로 이런 토카타 음악을 종종 연주한다. 이 자유분방한 토카타 곡 뒤에는 형식미의 극치인 푸가곡이 따라온다.
푸가?
도망가다는 라틴어가 어원으로 원래 선율과 비슷한 다른 멜로디들이 계속 쫓아가며 겹쳐진다.
바흐는 오르간을 위해 작곡한 토카타와 푸가 명곡이 매우 많기에 무슨 암호 같지만 D단조니 작품번호인 BWV565니 요런 걸 꼭 적어줘야 제곡을 찾을 수 있다. 지금 이 곡 <토카타와 푸가 D단조 BWV565>가 수많은 바흐의 파이프오르간 곡 중에서 제일 유명한 것으로 북독일 오르간 악파 대가 북스테후대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자 여기서 팁 한 가지. 잠시 이태리어를 공부해보자.
cantare (to sing) 칸타타 (노래한다의 성악곡)
sonare (to make sound) 소나타 (악기 소리 낸다의 기악곡)
toccare (to touch) 토카타 (두드린다의 건반악기 곡)
요한 세바스챤 바흐는 대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음악적 재능을 나타낸다. 와이 대음악가 집안이라고 하느냐? 200년 동안 50명 이상의 음악가를 배출했기 때문이다. 그 시초는 빵집 주인 파이트 바흐로 현악기 일종인 찌터를 연주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파이트의 장남 요하네스는 J.S. 바흐의 증조할아버지로 베히마르 거리의 악사다. 그의 장남 요한은 바흐 가문 최초 작곡가로 30년 전쟁시대 생활감정이 생생하게 반영된 3곡을 남겼다. 요한의 동생 크리스토프는 J.S. 바흐의 할아버지로 악사다. 그 동생 하인리히는 비범한 음악가로 1곡의 칸타타가 현존한다. J.S. 바흐 이전의 최대 바흐가 이 하인리히의 장남 요한 크리스토프다. 아이제나흐 교회 오르가니스트며 작곡가다. 그의 동생 미하엘도 음악가였으며 그의 막내딸 마리아 바르바라는 훗날 J.S. 바흐의 첫 아내가 된다.
J.S. 바흐의 할아버지 크리스토프에겐 세 아들이 있다. 장남 게오르크 크리스토프는 바흐 집안 최초로 칸토르(교회 합창장)라는 높은 지위에 오른다. 그 동생 요한 크리스토프와 요한 암브로지우스는 일란성쌍생아로 악사가 된다. 이 암브로지우스의 막내아들이 바로 J.S. 바흐 즉 요한 세바스챤 바흐로 1685년 3월 21일 태어난다.
여기서 또 잠깐! 1685년엔 무슨 일이? 1685년은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낭트 칙령을 폐지한 때다. 낭트 칙령이 무엇이냐. 하~ 또 삼천포로 빠지지만 그래도 호기심 천국 어쩔 수 읍써여 헤헤 학교 다닐 때 시험보려고 딸딸
외웠겠으나 이렇게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을 줄이야. 몬 걱정. 잊으면 다시 찾아보면 되지~ 오케이. 1598년 프랑스 국왕 앙리 4세는 30여년에 걸친 신, 구교도 사이의 분쟁을 잠재우기 위해 낭트 칙령을 발표하여 신교도의 종교 자유를 인정해 준다. 그러나 1643년 왕위에 오르며 절대 왕권을 휘두른 루이 14세는 신교도 활동을 금지하고 가톨릭만을 프랑스 종교로 인정한다. 그러다 바흐가 응애응애 태어난 1685년 마침내 낭트 칙령을 폐지해 신교도의 종교자유를 뺏고 그들의 교회를 허물어버린다. 신교도인 위그노들은 살기위해 영국을 비롯한 유럽 전지역과 미국으로 이주한다. 상인과 수공업장인들이 많았던 많은 위그노들의 이주로 프랑스 경제는 타격을 입는데 전쟁과 지나친 사치로 프랑스 혁명의 움직임이 서서히 시작된다. 위그노란? 구교도들이 프랑스 내의 신교도를 빗대어 부른 말. Huguenot
바흐는 엄청나게 많은 작품을 남기고 음악형식을 채워놓아 음악의 아버지라 불린다. 아버지께 바이올린을 배우고 백부 요한 크리스토프의 오르간 연주를 들으며 자란 바흐는 1694년 10살 때 잇따라 양친을 잃고 맏형 요한 크리스토프를 따라 오르도르프로 이주한다. 이 형은 바로크 시대 대작곡가 요한 파헬벨의 제자로 J.S. 바흐에게 파헬벨의 양식을 가르친다. 어린 바흐는 형이 가지고 있는 유명 작가들의 많은 작품들을 남몰래 필사하며 공부한다. 라틴어와 루터 정통파 신학도 배운다.
1702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바흐는 튀링겐 지방 소도시 오르가니스트를 지원하나 떨어지고 1703년 4월 바이마르 궁정악단에 바이올리니스트로 취직한다. 단 3개월이지만 바이올린 연주 경험을 쌓고 독일 바이올린의 대가 베스트 호프를 알게 되어 독일 바이올린 악파의 다성적 연주법을 배운다. 훗날 무반주 바이올린곡의 기초가 된다. 그러나 바흐가 원했던 것은 한낱 궁정악사가 아니라 집안 가족 거의 모두가 차지했던 오르가니스트의 지위였다. 노력 끝에 드디어 1703년 8월 아른시타트의 교회 오르가니스트로 취임한다. 이 고장 당국자들도 바흐 재능을 높이 평가해 겨우 18세인 그에게 이례적인 높은 급료를 주고 새로 만들어진 성능 좋은 오르간까지 준비한다. 오르가니스트로서 일하는 한편, 성가대를 훈련시키는 것도 그의 의무였으나, 혈기왕성한 그는 젊은 대원들과 충돌하여, 어떤 때는 대원중의 한 사람과 거리의 난투극을 벌이기도 한다.
1705년 10월, 바흐는 1개월 휴가를 얻어 북 독일 소도시 뤼베크를 방문해 당시 최대 음악가 북스테후데의 연주를 듣는다. 그의 장려한 오르간 곡이나 칸타타에 완전히 매료되어 아른시타트로 돌아온 것은 4개월 가까이나 지나서였다. 시의 성직 회의에서는 그의 무책임을 엄격하게 견책했으며 오르간 코랄의 연주에 별로 들어보지 못하던 악구를 많이 혼입 시켰다는 점과 성가대의 훈련을 게을리했다는 점도 곁들여 바흐를 비난한다. 이 시대는 바흐가 오르간 연주와 작곡의 기초를 굳혀, 서서히 자기 양식을 형성하고 있던 시대로 전주곡과 푸가, 혹은 토카타와 푸가에 북스테후데의 영향이 뚜렷이 나타나 있다.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는 <토카타와 푸가 D단조 BWV565>도 그 가운데 하나다.
아른시타트의 성직 회의와 충돌 후 1707년 6월 중부독일 소도시 뮐하우젠 성블라지우스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로 취임하는데 당시 유명한 음악가 알레의 후임이다. 그해 10월에 이미 아른시타트에서 사귀었던 육촌 누이동생인 바르바라와 결혼한다. 훗날 이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일곱 자녀 가운데 장남 빌헬름 프리데만과 차남 칼 필립 엠마누엘은 특히 뛰어난 음악가로 성장한다. 뮐하우젠에서의 바흐는 오르가니스트로 활약하면서 교회 칸타타 <하나님은 나의 왕이시도다>도 작곡하는데 이것은 바흐 생전에 인쇄 출판된 단 하나의 교회 칸타타이다.
그런데 당시의 뮐하우젠은 교리주의에 빠진 루터 정통파와 개인의 종교 감정이 우선인 경건파와의 싸움이 심했다. 바흐 집안은 대대로 루터 정통파에 속했었으나, 바흐 자신은 경건파에 마음이 끌려 그의 작품에도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