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60년대 광화문에 있는 덕수 국민학교를 다녔다. 그때는 초등학교가 아니라 국민학교라고 했기에 초등학교는 영 어색하다. 그래서 그냥 하던 대로 덕수 국민학교라고 우리는 말한다. 그때 함께 뛰놀았던 친구들이 십여 년 전 다시 모였고 그리고 함께 환갑이 넘어가며 나이 들어가고 있다. 세월이 무섭게 지나가고 있다. '정성껏 의좋게 씩씩하게'라는 멋진 교훈이 아직도 생생한 그 학교 시절. 한 반에 백여 명 넘게 득시글거리면서도 3부제 수업까지 있었으니 각 학년에 10반이 넘어가면서도 말이다. 그러니 지금 초등학생들 숫자가 매우 작다는 이야길 들으면 정말 기분이 묘하다. 어쨌든 그중 네 명이 카톡을 한다. 그냥 가끔씩 사는 이야기를 주고받는 정도이다. 세계 각국에 흩어져있는 그 애들. 아르헨티나의 고기 잘 굽는 아이, 시애틀의 사진 잘 찍는 아이, 시카고의 글 잘 쓰는 아이, 서울의 산 잘 타는 아이, 그중의 시카고의 글 잘 쓰는 아이가 정말 가끔씩 올려주는 재밌는 이야기들. 마치 일일극 드라마처럼 아주 궁금하게 해 놓고 딱 멈추더니 그 2부 이야기를 오늘 올려왔다. 난 다른 할 일이 많아 뒤로 미루려 했지만 생각을 바꿔 그 애 이야기를 먼저 올리기로 한다. 그렇게 난 꼭 해야 할 일을 가끔은 뒤로 미루기도 한다. 어떠냐 내 인생 내 맘인걸. 하하. 자, 궁금증을 자아내며 딱 멈추었던 그 애의 제2부 이야기를 들어보자.
<나땜에 상처 받은 사람 2부>
아마 1980년대 중반쯤이었던 거 같다. 유치원 포함 17년간 몸담았던 교육계를 은퇴한 후 회사에 입문한 지 2년 정도 지났을 28살 즈음 친한 친구 5명이 휴가기간을 맞추어 피서철로 한창 붐비던 동해안으로 낭만을 찾아 떠났다. 배낭만 메고 3등 열차만 탔던 학창 시절과는 달리 휴가 보너스에 비록 중고 기아 브리사였지만 승용차도 뽑아 업그레이드되어 한껏 부픈 마음들이었다. 여름 피서의 필수조건인 여자 친구는 그 당시 용어로 현지 조달하기로 하고 일정은 첫날 경포대. 둘째 날 하조대. 세째날 낙산으로 한 3박 4일 일정이었다.
첫날 경포대에선 기대와는 달리 민박 삐끼를 잘못 만나 바가지요금에 남자들만 우글거리는 곳으로 잘못 잡아 영 잡치고 아침 일찍 하조대로 향했다. 첫날의 실패를 교훈 삼아 하조대에서는 민박 투어를 일일이 하여 빨랫줄에 여자 옷이 걸려있거나 방문 앞에 여자 샌들만 있는 곳을 추적하여 한 곳을 찍어서 민박을 잡았다. 예상대로 여자들만 일행인 한 팀이 있었고 물에 빠져도 주둥이만 둥둥 뜰 입심들을 가진 우리 일행과 자연스레 친해졌다. 상대 일행은 3명이었는데 기대만큼의 쭉쭉빵빵(?)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그런대로 나름 수수했다. 저녁을 같이하고 바닷가에 나가 캠프파이어도 하고 나름 재미있었다. 우린 굳이 낙산까지 안 가고 눌러앉기로 하고 즐거운 시간을 하루 더 보냈다.
근데 그 3 명중 한 명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말수는 적었지만 눈이 사슴처 럼크고 환하게 웃으며 리액션을 잘해주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암튼 나름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서울에서 한번 보자고 전화번호를 교환 후 휴가를 마치고 회사로 복귀한 얼마 후 퇴근길에 문득 생각이나 긴가민가하면서 전화를 해봤는데 까르르 웃으며 누군지 알겠다고 하길래 내친김에 다음날 약속을 잡았다. 명동의 어느 경양식집이었는데 다음날 퇴근하면서 그곳에 가 기다리며 입구 쪽을 보고 있었는데 한 30분이 지나도 안 보이는 것이었다. (그 당시는 핸드폰이 없을 때라 마냥 기다려야 했음) 불길한 예감이 스치며 김새서 일어서 나오는데 누가 뒤에서 툭 쳤다. 돌아보니 낯 선거 같은데 큰 눈을 보니 그녀였다.
해변에서 보던 민얼굴에 가벼운 옷. 쬬리슬리퍼차림만 연상하고 있었는데 확 달라진 헤어스타일에 세련된 투피스. 이것저것 액세서리. 굽 높은 하이힐.. 화장발 조명발 더하니 못 알아본 것이었다..ㅎㅎ속으론 쾌재를 불렀지만 티 안 내려고 어금니를 꽉 깨물고 비싼 와인과 스테이크를 시키고 반가운 해후의 시간을 가졌다. 그 이후로도 몇 번 데이트를 하며 점점 그녀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무엇보다 같이 있을 때 나에게 집중하는 것이 참 좋았다. 한 달여 시간 동안 구름 위를 걷는듯한 기분이었다. 근데 약간 의아한 건 자신의 얘기를 잘 안 하는 거였다. 그래도 그냥 말수가 그리 많지 않아서 그런가 보다 했다. 내가 아는 건 이름 석자. 집이 어디에 있고 나이는 나보다 한 살 아래인 27.. 직업은 시내 지하상가에서 아동복코너를 운영한다는 정도.. 가족. 학교. 친구에 관해 선 언급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상식 수준이 높고 교양이 몸에 배어있으며 남을 배려하는 인품이 좋았다.
어느덧 나는 그녀를 결혼대상으로 삼았다. 어느덧 단풍이 물들기 시작하는 10월 중순쯤.. 우리는 일박이일로 여행을 가기로 했고 남산 순환도로를 손잡고 걸으며 농도가 핑크빛인 데이트를 했고( 형이하학적인 상상은 하지 말기를.. 다 알면서..) 국립극장 입구로 나와 장충동 태극당 부근 커피숍에 들러 커피 한잔 하던 중 그녀가 갑자기 평소와는 다르게 나를 똑바로 보며 할 말이 있다고. 그리고 그녀가 한 말은 나를 혼란에 빠지게 했다.
그녀는 중학교 3학년 때까지 남부럽지 않은 유복한 집안에서 공부도 꽤 잘했던 여학생이었는데 부친의 급박한 사업 몰락으로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 가족이 졸지에 뿔뿔이 흩어지게 되어 동생들과 지하단칸방 신세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중학교는 간신히 졸업했지만 고교 진학은 포기할 수밖에 없어 6개월 동안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아는 사람이나 친구들을 만날까 두렵고 창피해서. 동생들을 먹여 살려야만 해서 먼 동네 의류상가 시다로 들어가 절치 부시 마여 10년 만에 내 점포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비록 학업의 꿈은 접었으나 무식하단 소리 듣기 싫어 책은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했다. 이 이야기를 나에게 조심스레 하면서도 눈물 안 떨어지려고 위쪽을 간간이 보며 하는 행동이 진심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묵묵히 듣기만 하던 나는 오늘은 이만 일어서자고 하며 헤어졌다.
집으로 오며 내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나는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그녀를 좋아했다. 하나 내부모형제가 받아들일 수 있을까에는 자신이 안 섰다. 우리 부모형제 8명이 다 대학을 나왔는데 과연 잘 조화가 될 수 있을까?
밤새 뜬눈으로 지샌 후 다음날 출근해 일 보던 중 우리 부서 여직원이 날 찾는 전화라고 전화를 돌려준다. 잠시 머뭇거리다 받았다. 그녀였다...
이번 주말에 점 포문 닫는데 몇 시에 어디서 만날까 하며 약간 들뜬 목소리다. 여름휴가 3일 빼곤 연중무휴인 상가라 문 닫기가 어려운데 나하고의 여행 때문에 어렵사리 상가대표 허락받았다고. 난 정말 어렵게 대답했다. 미안하다. 못 갈 거 같다. 그리고 나라는 사람 잊어버리라고. 잠시 참 묵이 흐르더니 풀 죽은 목소리로 잘 알겠다고 한다. 전화 끊는다고 하고 내가 먼저 끊었다. 그리고 회사 17층 베란다로 나가 담배 한대를 깊게 들이켜고는 큰 한숨을 쉬고 자리로 돌아왔다. 죄의식인지 뭔지도 모르겠다. 그냥 심장이 더러워진 거 같았다.
그리고 세월이 어느 정도 흐른 2~3년 후 성탄절을 며칠 남긴 눈이 오던 날 회사 동료들과 퇴근 후 소주 한잔 거나하게 하고 버스 뒷좌석에 앉아있는데 미도파 앞 정류장에서 눈에 익은 큰 눈의 여인이 선물 쇼핑백 여러 개를 들고 타는 것이었다... 그녀였다.. 바로 뒤를 이어 검정 롱코트 차림의 인상 좋은 남자가 같이 오르면서 앞자리에 나란히 앉아 환한 대화를 나누는데 정겨운 모습이었다. 아마 남편인 듯싶었다. 저 뒤에서 물끄러미 바라보며 행복을 찾은듯한 모습을 보니 정말 마음 한편의 무거웠던 부담이 씻어지는 듯했다. 지금은 어디에서 어찌 지내왔는지 모르겠지만 정말 행복했었기를 바라고 앞으로도 행운이 깃들기를...
.
.
.